한발 앞을 내다본 마케팅의 귀재 - AMORE STORIES
#서성환 100년
202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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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앞을 내다본 마케팅의 귀재

화장품 광고에는 보통의 광고와는 다른 특유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고운 모델과 수려한 패키지,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카피가 조화로이 이루어진 모습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늘날 공식처럼 다져진 이 삼요소의 조합은 태평양의 화장품 광고로부터 출발했다. 장원에겐 마케팅, 광고, 디자인 분야에 일찌감치 예리한 감각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 없는 분야가 화장품에 꼭 필요하다는 걸 간파한 것은 천부적인 감각일 수도 있겠고, 어머니와 화장품 사업을 해나가며 켜켜이 쌓은 경험에서 빚어진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 감각이 처음 빛을 발한 것은 1940년대 말, '메로디 크림(MELODY CREAM)'을 탄생시키면서였다. 메로디 크림은 1948년, 회현동에 사업장을 열고 장원이 세상에 선보인 첫 제품이었다.

 

 

태평양화학공업사 최초로 상표를 붙인 ‘메로디 크림’의 상표 도안

 

 

장원은 품질제일주의에 기반을 두고 만든 자신의 첫 작품에 근사한 옷을 입히고자 했다. 뛰어난 품질과 청결한 용기, 세련된 상표가 어우러진 일제 화장품의 면면을 살피며 이를 뛰어넘고자 여러 방면으로 고민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실력 있는 인쇄소 '공영사'를 만나게 된다. 그곳은 메로디 크림의 상표를 한결 섬세하게 만들어 줄 고급 기계를 갖춘 실력 있는 인쇄소였으나 장원의 구상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직접 주문을 넣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국내와 격차가 큰 제작비와 운송비까지 감당하기엔 다소 무리인 투자였지만, 장원은 공영사와의 의논 끝에 과감하게 결정했다. '메로디 크림에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혀 보자'고. 공을 들인 상표의 효과는 반드시 빛을 볼 거라 예감한 장원은 그 당시 화장품 상표의 대부분을 디자인하던 도안사 송영식을 스카우트하여 디자인에 집중했다. 태평양 제품에 가장 멋진 옷을 입혀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결정이었다.

 

 

화장품 귀신이 붙은 사람이
'마케팅의 귀재'라 불리기까지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마케팅 실무를 체화해 가는 장원을 보고 ‘화장품 귀신이 붙은 사람’이라 칭했다. 그 말은 훗날 '마케팅의 귀재'로 바뀌어 일평생 그를 장식하는데, 과연 장원의 천부적인 마케팅 감각은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했다. 그 첫째가 브랜드 네이밍이었다. 창성상점으로 명맥을 이어온 가업을 한층 더 너른 세계로 이끌기 위해 '태평양상회(太平洋商會)'로 이름을 바꾸고 'TAIPYUNGYANG'으로 영문 표기를 하면서 새 출발을 이끈 장원. 그 이후 네이밍의 행보는 꾸준히 보폭을 넓혀 'ABC'로 이어진 제품을 비롯해 부드럽게 발음되는 '메로디', 전 사원을 대상으로 브랜드명을 공모해 선정한 '아모레'까지 감각 있는 이름을 만들어 나갔다. 장원은 일찌감치 화장품 품질뿐 아니라 그 이름에도 상당한 역할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었다. 보태어 네이밍에 걸맞은 용기와 레이블을 위해 세심한 고민을 곁들이는 세심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ABC 포마드의 포장 디자인과 용기를 이야기해 볼 수 있을 테다. 업계에서 '용기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획기적이던 이 행보는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녹색 패턴, 시장에서 통용되던 검은색 대신 ABC를 양각한 흰색 병을 채택하여 디자인 하나로도 다른 제품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만들기도 했다.

둘째는 최초의 광고 기법을 여럿 선보였다는 점이다. 광고에 알맞은 음악을 입히는 신선한 아이디어는 지금껏 CM송이라 불리며 대중의 감각을 자극한다. 아모레 CM송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흥얼거리는 국민 가요가 된 것이 그 출발이었음은 여러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또한, 장원은 화장품의 질감과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컬러 광고가 핵심이라 여기고, 컬러 윤전기가 널리 보급되기 전인 1970년대부터 컬러 지면으로 화장품 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인쇄 기술로는 간단하지 않던 과정이었으나 화장품 광고에 막중한 책임과 역할이 있음을 파악하고 예리하고 과감하게 남들이 하지 않던 선택을 해나간 것이었다.

셋째는 최초의 광고 모델 기용이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자본주의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광고는 최신 기술, 최고 감성, 최다 자본을 결합해 하나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곤 했다. 그 중심에 가장 화려하고 최첨단에 가닿은 것이 화장품 광고였다. 예나 지금이나 화장품 광고 모델엔 한 시대를 풍미한 톱스타가 동원되고, 화장품 광고 모델은 여전히 배우들의 로망으로 꼽힌다. 장원은 1956년부터 신문 광고에 미인 모델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 화장품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제품 그림 정도로 자그마한 광고가 나가던 시절, 톱스타 김보애로 시작해 이민자, 최무룡, 홍세미, 한혜숙, 주미, 금보라, 황신혜, 이영애… 내로라하는 모델을 광고에 담았으니 획기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었다. 대중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톱스타가 등장하는 광고로 쏠렸고, 그들이 선전하는 태평양 제품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회장님은 하나를 말하면 벌써 멀리 나가 계셨어요."
ー디자이너 한광수

 

 

광고 마케팅은 그 이후로도 태평양의 순항을 이끄는 장원의 탁월한 정책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광고에 집중하는 장원의 행보에 비해 선전부(홍보실) 인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장원이 고군분투하며 그 공백을 메워왔지만 여러 방면에서 무리가 따랐고, 이 방면에 전문성 있는 인력이 없다는 작은 걱정이 마음에 굴러다니곤 했다. 이러한 갈증은 1969년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한광수가 입사하면서 해소되기에 이른다. 장원은 한광수의 디자인에 관해 별다른 코멘트 없이 수용하는 쪽으로 마케팅을 이끌어 나갔다. 그것은 전문 직종을 향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장원은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온다는 신념에 따라 선전부를 위한 스튜디오를 만들고 상업 사진 전문가를 고용하면서 광고에 퀄리티를 더해 나가는 데 집중했다. 화장품의 퀄리티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색상과 질감이 제대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촬영 환경을 꾸리는 데 소홀히하지 않은 것이다. 아직 촬영 기술이나 장비가 전문 직종으로 자리 잡지 않은 시절이었음에도 최대 해상력을 갖춘 핫셀블라드 카메라와 렌즈, 받침대는 물론이고 환등기를 비롯한 촬영 장비들을 종류별로 구비하여 광고 퀄리티를 높였다. 전문 직종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미비하던 1970년대, 태평양은 이미 탄탄한 전문 조직의 뿌리를 다져 나가고 있던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남들보다 한발 앞서 광고계를 살피고 준비해 나간 장원의 예리함 덕에 태평양의 화장품 포스터는 제작됨과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누렸다. 그의 집중과 선택, 노력이 있었기에 1975년에는 국내 상업 포스터 중에서는 흔치 않게 우수 작품을 선정하는 미국 『그래피스 애뉴얼(Graphis Annual)』 연감에 수록되는 열매를 맺기도 했다.

 

 

1975년. 1983년, 1988년 광고 포스터

 

 

"여성들이 화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리드한 건 그 당시 태평양화학의 공이 컸죠."
ー미용연구실 상무 황혜숙

 

 

선전부는 장원의 지원과 관심에 발맞춘 성과를 이어 나갔고, 1971년에는 국내 최초로 메이크업 캠페인 '오 마이 러브(Oh, My Love)'를 기획해 한국 여성들의 화장 패턴에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만 해도 색조 화장이란 특수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만 하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는데, 그 거부감을 덜어내는 것이 이 캠페인의 목적이었다. 장원 역시 통념을 모르던 바 아니나 이제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고, 시대적 울타리를 벗어나 새 시대의 감각을 만들어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971년, 조선호텔에서는 일곱 명의 모델에게 신비, 청순, 기품, 환희, 이상, 정열, 매혹을 키워드를 화장으로 표현하는 발표회가 열렸다. '두드려 맞은 것마냥 눈두덩을 시퍼렇게 칠하는 게 화장이냐'는 소리가 오가던 시절에 진행된 이 발표회는 화장이 여성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획기적인 장이 되었음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그 이후 길거리의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연한 화장을 하고 다니던 여성들이 ‘오 마이 러브’ 광고처럼 색조 화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평양 선전부가 기획한 획기적인 캠페인 덕에 한국 여성들의 화장 패턴이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은 한층 더 활기차고 화려해졌다.

 

 

1971년의 ‘오, 마이 러브’ 캠페인 장면. 사회에 당당한 이슈가 되었던 오 마이 러브 캠페인은 한국 여성들의 화장 패턴을 바꾸어 갔다.

 

 

"광고는 이연자산(移延資産)이다."

 

 

미화인생(美化人生)을 꿈꾸며 화장품을 만든 장원은 대중에게 화장이 하나의 문화로 스며들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 방법으로 아름다운 디자인과 광고, 마케팅에 집중한 장원. 날카로운 감각으로 과감한 선택을 마다하지 않은 그는 '마케팅의 귀재'라 불리며 광고 이론을 모르는 '광고쟁이'로 태평양을 성실하게 이끌어왔다. 다른 기업이 마케팅에 집중하지 않던 시절부터 매출에 5% 이상을 광고비로 사용해 온 장원은 자신의 선택에 언제나 확신이 있었다. 경리부장이 여타 기업과는 사뭇 다른 재무 구조에 의아해할 때, "광고는 비용이 아닌 자산이오. 미래의 자산!"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던 데는 그의 시선이 한발 앞선 미래에 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너른 시야로 기꺼이 더 먼 세상을 바라보며 지금 투자해야 할 것을 확실하게 헤아린 장원 덕에 태평양은 대중과 한 뼘 먼저 가까워질 수 있었다. 장업계의 문화가 한층 성장하고 우리나라 화장품 광고사에 꽃이 핀 데는 광고가 중요하다는 걸 간파한 장원의 노력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하다. 경험에서 빚어진 감각, 전문가를 향한 존중,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예리함. 오늘날 우리와 곁 하는 화장품 광고는 장원의 굳건한 걸음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산물이다.

 

 

 

 

Editor’s Epilogue
미래를 향한 용기 있는 노력

'지금 여기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맞을까?'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다.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집중하는 데 회의감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엔 당장 눈앞에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일도 있다. 특히 노력과 시간이 쌓여야 하는 방면에선 더더욱 그렇다. 미래를 위해 정성을 쏟는 일엔 반드시 결과가 있다. 설령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자산이고 좋은 경험이 된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겠노라 마음먹은 일이라면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가 보자. 당도할 내일에 분명한 변화가, 확실한 경험이 쌓여 있을 테니. 내 결정을 믿고 한걸음씩 걷다보면 미래는 한층 단단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글·사진 이주연(산책방)

진행 어라운드

평전 개정판 수류산방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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