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에서 쌓아온 걸음 - AMORE STORIES
#서성환 100년
202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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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에서 쌓아온 걸음

가야 할 길이라 결심했다면 자신을 믿고 우직하게 걸음을 내디딘 장원. 그가 향한 세계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선명하고 확실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희미하기에 결심이 필요한 일, 다가가기 위해 용기가 요구되는 곳이었다. 막막함 속에서도 장원이 우보천리(牛步千里)1)의 정신으로 더 넓은 세계를 탐색한 데는 자신의 선택을 믿는 용기가 필요했을 테다. 화장품을 향한 진심을 알아본 이들과 켜켜이 쌓인 신뢰 또한 태평양이 세계로 나아가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든든한 무기였다. 일찍이 장원의 태도와 성정을 높이 산 해외의 인연들이 수출의 험로에서 징검다리가 되어준 것이다.

 

1) 우보천리(牛步千里) : 소의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뜻으로, 서두르지 않고 일을 처리함을 이르는 말.

 

 

걸음 하나, 일본

 

"장원은 실천이 말보다 앞에 있는 사람이구나."
—요시노향료 관계자

 

 

1975년 일본 오리지나루사를 방문해 고려 인삼의 효능을 설명하는 장원

 

 

태평양화학공업사는 1960년대부터 일본과 교류해 왔다. 첫 거래 상대였던 요시노향료는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태평양과 탄탄한 신뢰를 쌓아나간 기업이다. 그 우정이 이어질 수 있던 데는 화장품을 향한, 태평양을 향한, 사람을 향한 장원의 진심 어린 태도가 있던 덕이다. 이루고자 하는 바를 발화하기 전에 몸으로 익히고 실천으로 행하는 그의 성정은 바다 건너에서도 빛을 발했다. 한국 화장품이라는 것이 아직 생소하던 시절, 성공 가능성이 제로라 불리는 일본 시장에 장원의 결단력과 요시노향료의 조력 덕에 가까스로 진입한 것이 그 일례다. 바이어에게 건넨 태평양의 제품은 인삼으로 만든 화장품 '진생삼미'. 이 제품을 개발하기까지 태평양은 수많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개성은 고려인삼이란 단어를 세계에 알린 고장이자 장원의 고향이었다. 인삼밭이 펼쳐진 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에게 인삼은 삶과 아주 가까운 재료였다. 그런 인삼을 화장품 재료로 떠올리게 한 건 프랑스에서 식물 재배의 현장을 본 이후였다. 언제나 마음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인삼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며 '인삼 화장품을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에 이른 때가 바야흐로 1964년, 진생삼미의 탄생이 1973년이니 그 사이 숱한 고민과 연구가 쌓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인삼에 대한 연구가 없던 시절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 효능과 성분을 분석한 건 물론이거니와 인삼 특유의 냄새나 피부에 발랐을 때 자극이 생기지 않도록 개선해 나간 시간까지, 장원과 연구원 사이에서 흘러가던 희로애락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고 강렬했다.

1971년 도쿄지사를 개설하고 일본 진출에 성공한 장원은 진생삼미의 효능을 알리기 위해 안팎으로 애썼다. 비록 수출 성적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일본 진출이 아시아 시장을 여는 마중물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그 시기 두터운 인망과 열정으로 일본인 조력자들과 더욱 탄탄한 관계가 형성된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태평양화학과 함께한 일본인들은 장원을 이렇게 회고한다. 겸손하고 수수한 모습, 인간적인 끌림이 담긴 눈빛, 화장품을 향한 절실함이 깃든 인물이라고.

 

 

걸음 둘, 미국

 

"아모레가 LA에 왔습니다."
— 『LA한국일보』

 

 

해외 시장에 진출했어도 그 이후의 행보가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는 꿈처럼 먼 곳이었다. 부, 힘, 선진화… 모든 게 다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곳으로 진출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 진출의 문을 두드리는 건 험준한 절벽을 오른 이들에게만 겨우 허용된 듯했다. 절벽을 오르는 방법도, 문을 두드리는 기회도 결코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던 나라였지만 장원은 기필코 그곳으로 향하고자 했다. 희뿌연 길에서도 멈추거나 뒷걸음질치는 법이 없이, 코앞의 땅만 보며 걸어 나간 인내의 시절이다.

종종걸음으로 나아간 미국, 그곳에서 가장 먼저 이룩한 것은 1972년 뉴욕 지사의 개설이었다. 그러나 그당시 정부에서 시행한 수입 쿼터제가 미지의 세계에서 수출량을 늘려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며 장애물로 작용했다. 미국에 수출하기엔 태평양의 실력이 부족하다 판단한 장원은 고민 끝에 틈새 시장을 노려 낚싯밥을 첫 상품으로 택했다. 그러나 태평양과 낚싯밥이 쉬이 조화를 이룰 리 없었고, 품질이 보장되지 않으니 미국 시장으로의 진출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던 중 그에게 반달표 스타킹으로 유명한 유영산업의 매각 소문이 들려왔다. 유영산업은 그 당시 잡화 수출로 국내 실적 4,5위에 드는 기업이었기에 인수만 한다면 수출 압박에서 태평양도 홀가분히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유영산업을 인수한 태평양은 수입 쿼터제의 장벽을 넘을 수 있었고, 1978년 뉴욕에 현지 법인을 세우면서 사업의 물꼬를 텄다. 미국, 동남아, 일본까지 수출해 나간 펄 에센스 덕에 미국 시장에서의 행보는 안정성을 찾는 듯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는 미국 수출의 입구를 열고 저벅저벅 들어간 용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것을 예상하면서도 더 넓은 세계로 향한 장원의 담대함엔 조금씩 힘이 붙었고, 그 힘이 빛을 발한 건 1984년 LA 지사를 개설하면서였다. 로스앤젤레스 중심으로 캘리포니아 일대에 자리 잡은 교민들이 단골이 되어줄 것이라 한 수 앞을 내다본 장원은 투자 비용이 들더라도 캘리포니아에서 화장품을 판매하고 무역 업무를 해나가기로 결정한다. 교민들은 아모레 매장 오픈을 줄 서서 기다렸고, 그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태평양은 1986년 판매 실적 1백만 달러를 돌파한 뒤 1990년에는 태평양 LA 법인 신축 사옥을 준공하면서 미주에서의 사업을 정착해 나갔다. 자사 제품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신의 결정에 대한 믿음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걸음 셋, 유럽(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 그다음으로 살핀 것은 유럽이었다. 이미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는 독일을 살피는 것이 유리할 거란 판단으로 1977년 2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지사를 마련한 태평양. 이듬해 1978년 현지 법인까지 설립하며 독일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장원은 다시 한번 평생의 꿈을 되새긴다. 그 꿈은 다름 아닌 '화장품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에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을 싣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의외의 구석에서였다. 페이퍼 프로젝트로 연을 맺은 프랑스 제지사 여비서가 끄나풀이 되어준 것이었다. 친절하게 업무를 도와준 그에게 태평양이 발매한 '순정'을 선물한 것이 연이 되어 모나코 수입상과 소식이 닿은 태평양. 순정은 무색, 무향, 무알코올이 특징인 제품으로 화장품보다는 의약품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청결함이 돋보이는 이 화장품은 유럽인 사이에서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였고, 약국을 통해 판매할 만한 제품이라는 모나코 상인의 이야기는 기대에 힘을 보탰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의 진출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샤르트르(Chartres)의 PBS(parfums beauté de Suh) 공장 직원들의 기념촬영.
공장 벽에 ‘리리코스(LIRIKOS)’와 ‘SOON’ 간판이 보인다.

 

 

1990년 9월, 태평양은 프랑스 사르트르에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훗날 사르트르 공장에서 순정을 'SOON(순)'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했을 때, 장원 얼굴에 해사한 빛이 들며 "괜찮네!" 말간 한마디가 터져 나온 것을 많은 이가 기억한다. SOON은 오스카상 디자인 부문 대상을 받으면서 탄탄대로를 밟아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모나코 상인이 예견한 약국을 통한 판매는 성적이 부진했다. 이미 프랑스엔 탄탄한 화장품 기업이 자리 잡고 있던 탓에 약국에서는 SOON에 큰 관심이 없었고 입점이 성사된 약국에서도 얼마 안 가 재고 처리에 관한 연락이 빗발쳤다. 프랑스 탈라소테라피 전문 기관 로크롬 센터와 협력해 '리리코스(LIRIKOS)'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결과는 기대 같지 않았다. 이미 자리 잡은 내로라하는 브랜드 틈새를 비집고 우뚝 서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태평양 중역들은 프랑스 사업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 중심엔 언제나 수익성이 있었지만 장원은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보게, 아직 프랑스는 투자지, 경비가 아닐세." 그의 덤덤한 목소리는 늘 굵직한 여운을 남겼다.

 

 

걸음 넷, 중국

 

"중국은 곧 개방될 거야. 그러니 철저히 준비해 놓게."

 

 

장원은 몇 걸음 앞을 일찍이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국제 정세에 소홀히 하지 않고 태평양 안팎에 마음을 세심히 쓰는 그는 대체로 날카로운 선택과 판단을 해내곤 했다. 중국과의 국가 정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중국이 변하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임원들에게 중국이 곧 개방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장원의 예견대로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태평양은 일찌감치 마련해 둔 중국 시장 조사팀을 파견한다. 장원은 이때 다시 한번 예리한 판단을 내렸다. 세계적인 화장품 업계가 상하이에 진출할 때, 생각의 회로를 돌려 봉천(선양)에 진출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베이징이나 상하이는 이미 중국의 중심부가 된 터, 마케팅 학습을 하기에는 봉천이 제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곳에서 경험을 쌓고 나면 중심부로의 진출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반 바퀴 우회하는 결정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장원의 지혜이자 사업의 노하우였다.

당시 시장에 나온 아모레 한 세트 금액은 중국에서의 쌀 한 가마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가였다. 금액이 장벽이란 이야기가 돌았지만 당장 승부수를 던지기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장원은 마케팅 전략을 고수했다. 그의 예견은 중국 시장에 적중했다. 마침내 선양중싱백화점을 비롯해 백화점 열댓 곳에 입점한 것이다. 장원은 어떤 상황에서건 꾀를 부리거나 요령을 피운 적이 없다. 지름길을 찾지 않고 나아간 정직함은 바다 건너에서도 확실한 성과를 이뤄갔다. 때로는 쭉 뻗은 직선의 길을 내달렸지만 대체로 구불구불한 험로를 헤매야 했던 여정이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도 있었으나 장원은 덤덤했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려 애썼고, 고민 끝에 결정에 다다랐다면 후회 없이 나아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그는, 우직하게 태평양의 미래를 가꿔나간다.

 

 

 

 

Editor’s Epilogue
내 안에 신념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힘든 상황은 온다. 내 안의 문제일 수도, 내 밖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원인을 찾지 못해 답답할 때도 있을 테다. 목표로 향해 가는 길목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움츠러드는 이가 있는 반면,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속도가 다소 느려져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강직함은 내 결정을 믿는 신념에서 나온다. 수백 번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곁길로 새지 않고 부딪칠 용기가 새어 나올 터.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했다면 방해꾼이 나타나더라도 그 길로 가자. 내 안의 신념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글·사진 이주연(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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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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