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하고 가까스로
은메달을 받았으니 이거야말로 큰 경사 아닌가?"
태평양이 제자리를 지키며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던 1974년, 장원은 기업의 성장과 더불어 사회를 위해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아름답게"라는 슬로건을 제정하고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 것도 기업의 소명을 다하자는 결심에서였다. 그 기조의 일환으로 닿은 것 중 하나가 침체된 스포츠 문화를 살리는 것. 1976년, 태평양 여자 농구단은 열 번째 구단으로 농구계에 출사표를 던진다. 한국화장품을 제외하고는 기업이 여자 농구팀에 나선 일이 없던 때였기에 태평양의 행보엔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게다가 서초동에 1억 5천만 원을 들여 체육관을 건설하는 혁신적인 투자까지 진행됐으니 스포츠계의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태평양 여자 농구단의 등장은 파란과도 같았다. 1976년 여자실업농구연맹전에서 전문가들의 예견과는 다르게 첫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이변을 몰고 왔고, 추계 여자실업농구연맹전에서는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10년 전부터 몰락의 길을 걸어온 여자 농구에 재기의 활력소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기세를 몰아 1984년 개최된 LA 올림픽 여자 농구 종목에서는 한국 선수단이 세계 속에 우뚝 서는 쾌거를 이루었다. 은메달을 거머쥐면서 영광과 환희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그때 장원의 얼굴에 퍼지던 너른 미소는 전에 없이 밝고 찬란했다.
"내 한번 농구협회 회장직을 맡아보리다.
열심히 해서 농구를 다시 한번 살려 봅시다."
농구를 향한 장원의 순수한 열정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간 것은 1983년, 농구협회 회장직을 권유받으면서부터다. 기업인은 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장원이었지만 다음 해에 열릴 LA올림픽을 생각하면 당장 공석인 협회 회장직 자리가 눈에 밟혔다. 장원은 심사숙고 끝에 회장직을 받아들였고, 선수들 경기력 향상을 북돋으며 탄탄한 대비를 시작했다. 또한 프로 축구·야구에 집중된 관심을 농구로 돌려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고 농구계의 부활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기획하고 실행하는 장원의 전략가적인 면모는 스포츠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모든 스포츠가 쉬는 비시즌 기간에 집중하여 겨울철에 장기 레이스를 펼치는 아이디어로 새 문화를 탐색한 것이다. '마케팅의 귀재'라 불리던 장원은 그 별칭에 걸맞게 하늘을 나는 코끼리 '점보'에서 영감을 얻어 대회 명칭을 '점보 시리즈'로 정하면서 네이밍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풀 리그 방식과 크로스 토너먼트 방식을 섞어 게임 수를 크게 확장한 점보 시리즈는 대회 첫날부터 관심과 열기로 뜨거웠다. 경기 내용은 물론, 전광판 광고를 향한 대중의 흥미가 특히 굉장했다. 전광판 광고란 공이 링이나 백보드를 건드릴 때마다 1초 동안 글자 광고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세계에서 네 번째로 도입된 이 광고는 신기술이 이룩한 마법 같은 일이었다. 전광판 광고를 통해 대중의 관심과 함께 경기에 필요한 광고 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성공적인 기획이었다. 점보 시리즈의 흐름은 안팎으로 순조로웠다. 점보 시리즈는 상승 곡선을 그리며 개막 2개월을 맞기 전부터 관중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팬클럽, 오빠부대까지 생겨났다. 차갑게 식어 있던 농구계에 장원이 다시금 불씨를 틔운 것이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농구 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했던 당시. 서성환 회장은 한국 농구의 발전을 위해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승부만큼 한국인의
중국 땅에 알려 주고 오십시다."
장원과 농구계의 만남은 스포츠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장원은 스포츠를 매개로 세계와의 교류를 살피고자 했다. 그리하여, 1984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청소년농구대회를 통해 중국과의 정기적인 교류가 시작됐다. 한국과 중국의 근사한 승부가 가능했던 데는 방한한 중국팀을 향한 존중의 태도와 스포츠 정신이 있던 덕이다. 선의의 경쟁을 펼친 한국과 중국은 활짝 핀 표정으로 앞으로의 교류를 약속한다. 장원은 스포츠를 통해 해외 교류를 이어 나가는 것이 현시점에 해야 할 일이라 판단하고, 쿠바 농구협회에 서한을 보내는 등 스포츠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84년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는 중국과의 원활한 교류의 장이었음과 동시에 장원과 한국에 기쁨을 선사한 행사이기도 했다. 62대 61이라는 극적인 점수 차로 중국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찬란한 성과와 흥미진진한 경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장원이 청년이던 시절, 비행기에서 내려 바라보았던 드넓고 광활한 세계 중국. 그 땅에서 농구팀이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쥐고 돌아온 장면은 그에게 뭉클한 감동과 남다른 감회를 건넸다. 농구협회 회장직으로 국내 농구의 위상을 크게 올린 것은 물론,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린 데 장원의 역할이 컸음은 분명하다. 스포츠 분야에 책임을 다하는 기쁨은 언제나 달가웠지만 그 기쁨은 1985년을 끝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장원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어 사임해야 했던 까닭이다. 곧 우리나라에서 개최될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임 의사를 밝히는 게 못내 아쉬운 장원이었지만 그의 행보는 스포츠계에 누구도 예상한 적 없던 굵직한 행적을 남겼다. 스포츠계는 "역대 농구협회회장 중 가장 화려한 공적과 혁신적인 사업을 펼쳐 한국 농구의 새로운 금자탑을 세웠다."며 장원의 공적에 마지막까지 찬사를 보냈다.
"프로 야구는 국민이
이제는 스포츠를 통해 소비자에게 서비스하겠습니다."
장원과 스포츠의 인연은 농구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미 스포츠계에서 농구와의 연을 굳건히 맺은 장원에게 프로 야구와의 만남이 찾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 야구와 비슷한 '호무랑' 놀이를 하며 지낸 장원은 야구를 따듯한 감정이 밀려오는 스포츠로 기억했다. 자연스럽게 야구에 관심이 높았던 그에게 청보의 야구단 인수 제안이 들어온 것은 솔깃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1982년에 출범한 청보의 야구단은 출중한 성적을 거둔 팀이 아니었다. 오히려 18연패를 기록하며 하위권을 맴돌다 결국 1987년 야구단 매각이 결정된 것인데, 이러한 상황을 익히 아는 주변에선 우려와 걱정의 뜻을 비쳤다. 야구단 운영은 기실 기업 이미지를 올리기 위한 수단이기에 하위권 야구단을 인수하는 것이 태평양에 득이 될 리 없다고 여긴 이유다. 하지만 장원의 시선은 달랐다. 기업 이미지보다도 청보핀토스의 뿌리가 실향민이 많은 인천이라는 데 집중했다. 망향의 한을 달래는 데 기꺼이 함께하고 싶단 마음으로 태평양 야구단을 공식 출범한 것이다. 태평양 야구단은 팬들의 의견으로 '태평양 돌핀스'라는 이름을 얻고 경기장에 오르기 시작했다.
(우측) 1990년 4월 인천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하는 서성환.
장원은 구단 운영뿐만 아니라 야구에 대한 애정으로 초중고 야구 대회를 후원하는 등 스포츠의 저변과 문화 확대에 기여했다.
장원은 강한 승부욕으로 대형 선수와 유능한 감독을 영입하고 야구팀이 성장할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이었을까, 지지부진하던 성적이 점차 좋아지며 1989년에는 돌핀스가 승리를 거뒀고 기쁨의 물살이 야구팀 곳곳에 넘실거렸다.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간 선수들의 열정과 투혼, 그에 보답하듯 태평양 돌핀스에는 시즌 3위라는 선물 같은 일이 찾아왔다. 장원은 야구단에 더 많은 투자와 지원을 보탰다. 그러나 자본을 투입하는 만큼의 성과는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4년간 하위권에 머물 뿐, 돌핀스는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서서히 사그라지던 1994년, 시즌 개막을 앞둔 어느 날 감독이 돌연 "66승을 올려 포스트 시즌에 나가겠다."고 선언해 전문가의 빈축을 산 일이 있었다. 그간 돌핀스가 전력 보강을 탄탄히 했다는 소식이 없었기에 뾰족한 근거가 없다며 고개를 저은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반응과는 달리 기적은 일어났다. 만년 하위권에 머물던 돌핀스가 종합 2위로 훌쩍 올라선 것이다. 장원은 그간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을, 감독이 분투해서 만들어낸 전략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음 가득 환희와 기쁨이 들어찼다. 장원은 다음 시즌 우승을 격려하며 태평양 돌핀스의 선두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상황이 언제나 장원의 편인 것은 아니었다.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야구단은 매각되었고, 우승을 손꼽아 기다린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한 채 태평양 돌핀스를 떠나 보냈다. 하위에 머물던 야구팀을 품고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 장원. 화려한 맺음을 목전에 두고 돌아서야 했지만, 그들을 우승에 바투 데려다 놓은 행보는 스포츠를 향한 장원의 열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이루어내는 장원의 확고한 태도가 스포츠계에서도 알알이 빛났음을 우리는 안다.
Editor’s Epilogue
세계가 하나 되는 장
스포츠에는 갖은 정신과 문화가 깃들어 있다. 대중의 질서정연한 응원 문화, 선수들의 정정당당한 스포츠맨십, 감독과 스태프의 현명한 전략…. 스포츠 경기란 어느 한순간 기량을 발휘하는 일이 아니기에, 꾸준한 땀방울의 결과임을 알기에 많은 이가 스포츠에 열광하고 눈물짓는 것이 아닐까. 장원이 꽃 피운 스포츠 문화 또한 다르지 않았다. 장원은 스포츠계 부흥을 위해 힘쓴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 되는 국민을 목도하며 대중과 함께 선수단을 응원하는 뜨거운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스포츠로 하나 됨을 실감한다. 그 감각을 다시금 선사할 올림픽이 올해 8월 개막을 앞두고 있다. 개인·인종·종교·정치적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펼쳐지는 경기를 응원하며 끓어오르는 마음을 느끼게 될 장. 땀 흘리며 분투하는 선수단을 보며 환호하고, 패배에 쓴 침을 삼키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히 찾아오리라. 응원으로, 열기로 하나 될 2024 파리올림픽을 고대하며, 정직한 스포츠맨십을 그려보는 날이다.
글·사진 이주연(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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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개정판 수류산방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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