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기술로 열어낸 광활한 세계 - AMORE STORIES
#서성환 100년
20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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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기술로 열어낸 광활한 세계

“우리 연구실이 이렇게나 커졌구나!”

 

 

장원의 소신은 한결같았다. ‘기술 우위 정신’. 장원은 배움에서 그치는 것은 도태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여겼다. 그가 바라는 인재는 지혜와 전문성을 갖추고, 자신과 회사의 기술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움직이는 이들이었다. 제조 능력은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른 태평양화학이었지만, 장원은 이대로 만족하다가는 머지않아 임계치에 이를 거라는 걸 일찍이 직감했다. 산꼭대기에 올라 정상에서 만족감에 취해 즐기는 데 심취해 버린다면 더 높은 산으로의 등산은 시작도 하지 못할 터였다. 그의 예리한 판단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한국으로 하나둘 들어오는 외제 화장품의 면면이 심상치 않았다. 이보다 더 촘촘한 연구 과정과 더 전문적인 결과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떻게 전문성을 높일 수 있을까 고민을 이어가던 그 시절, 장원에게 찾아온 인연이 바로 연구자 구용섭이다.

 

 

1950년대 제품개발연구원과 구용섭 님

 

 

“나를 좀 도와주시오.
우리 함께 좋은 화장품
한번 만들어 봅시다!”

 

 

태평양은 국내 장업계를 한층 성장시킨 유수의 그룹이지만, 구용섭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만 해도 장업계가 유망한 직종은 아니었다. 하물며 구용섭은 연세대학교 화학 기계학을 맡던 교수의 실험 조교로 일한 엘리트인 데다가 시세이도 공장장을 맡은 이력도 있는 인재였다. 전쟁 이후,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던 그는 화장품 회사에서 함께하잔 장원의 제안이 적잖이 당황스러웠으나 거절을 이야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이 일이 자신이 할 만한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왜 거절을 머뭇거리는지, 그 자신도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거절을 전하면서야 그는 깨달았다. 장원의 목소리와 눈빛에 마다할 수 없는 간절한 열망이 스민 까닭이었다. 그것이 바로 장원의 진정성이었다. 구용섭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태평양에 입사하더라도 학교 출강을 이어 나가고 싶다고. 장원은 그런 그에게서 전문성을 향한 신뢰와 강인한 정직함을 보았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했고, 그때 저 먼 곳에서 움튼 불씨 하나가 크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1963년 연구실 내 조향실

1963년 영등포 공장 연구실

 

 

”기술은 진보한다.
멈추면 뒤처지는 게 기술이다.
멈추지 말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구용섭이 태평양화학에 입사하면서 우리나라 화장업계 최초로, 무려 1954년에 기업 안에 연구실이 만들어졌다. 설비가 잘 갖춰진 으리으리한 연구실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었다. 화장품에 연구가 깃든다는 것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과 같았다. 장원은 연구원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도 지치거나 무력해지지 않도록 회사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계속 정진해 나갈 것을 강조했다. 연구소에서의 그는 듬직하고 우렁찬 동료였고, 품이 넓고 든든한 선생이었다. 장원은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와 개발을 목도하며 과학에 뿌리를 둔 완제품을 만드는 것이 당장의 목표라 여겼다. 구용섭은 약속대로 출강을 이어 나가며 연구를 지속했지만,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강의에서 손을 뗐다. 그는 자신의 전문성이 필요한 곳이 바로 여기, 태평양화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용섭은 연구소에 발을 들임과 동시에 ‘ABC 수백 분’, ‘ABC 유액’ 라인에 ‘ABC 100번 크림’을 개발하면서 태평양의 내로라하는 상품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뛰어난 감각과 경험을 토대로 사업을 이끌어가는 장원의 우직한 걸음이 가능한 이유는 언제나 사람들 덕분이었다. 장원 주변엔 전문성, 기술력, 성실함, 정직함을 모두 갖춘 고마운 인재들이 있었다. 그들이 장원 곁에 머무는 이유는 장원 역시 그들에게 든든한 조력자였기 때문일 테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 좋은 친구이자 동료, 신뢰 깊은 협업자로서 점점 더 끈끈해지는 인연은 태평양이 뛰어난 개발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 좋은 지반이 되어주었다.

 

 

19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준공

2010년대
용인기술연구원(미지움)

 

 

“우리 연구원들이
새로운 꿈을 꾸게 할 거다.”

 

 

장원은 본사와 공장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건물의 규모를 키웠고, 그 안을 탄탄히 채울 내실도 꾸준히 다져나갔다. 장원은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생산 라인과 더불어 유통까지, 더욱 확실한 여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집중했다. 회사는 점점 커졌고, 연구실도 그에 맞춰 성장해 갔다. 장원은 한 뼘 성장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더 큰 내일을 보았고, 매 순간 그보다 더 뻗어나갈 미래를 보았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구용섭을 독일로 유학 보내는 결심을 하게 된다. 구용섭의 절대적인 지지와 협력 덕분에 장원은 유럽의 최신 설비를 수입하고, 외국에서 일찍이 만들어 나간 개발 기기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고군분투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성장이었다. 태평양화학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개발과 연구가 물 흐르듯 이루어지면서 태평양은 탄탄한 제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승승장구. 거듭되는 연구실 증축, 그리고 마침내 1958년. 아시아 그 어디에도 없는 최신 기계, ‘에어스푼’이 태평양화학 제2공장에 들어온 순간, 장원은 예상할 수 없는 속도로 태평양이 세계로 뻗어나갈 것임을, 그 속도 역시 빨라질 것임을 알았다. 기반을 탄탄히 다지며 앞을 내다보던, 혜안과 지혜를 두루 지닌 장원의 추진력 덕분에 제2공장이 신축된 지 1년 뒤인 1959년에는 태평양공업주식회사가 프랑스 거대 화장품 회사인 코티사와 기술 제휴를 맺기에 이른다. 장원의 기민한 판단과 진실한 열망이 세계적인 범위로 단숨에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Editor’s Epilogue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

누구에게나 부족한 점은 있다. 미흡한 점을 메우고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부족함에 발목 잡혀 나의 장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닐 테다. 오히려 시각을 바꾸어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내 주장을 당당하게 펼칠 줄 아는 자신감은 분명한 무기다. 그런 만큼 내 주장은 한 발짝 뒤에 두고 타인의 생각을 헤아리고 위하는 데 집중하는 면모 또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타인의 심정을 살피고 다정하게 위할 줄 아는 마음은 함께 일하는 이들 사이에서 동료애와 우정이 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테다. 당신은 지금 나만의 무기를 갈고 닦기 위해 어떤 것에 집중하고 있는가? 아주 작은 일이어도 좋으니,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에 윤기를 더할 성과를 차곡차곡 더해 보자. 부족하다 느낀 점이 어느 순간 장점으로 탈바꿈해 있을 테니!

 

 

 

 

글·사진 이주연(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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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개정판 수류산방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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