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무래 (가명)
#INTRO
입사한 지 어느덧 N년 차가 되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최소 2/3 이상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출퇴근 길에도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느새 인생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곳에서의 시간을 이제는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회사에서 그 일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며 느꼈던 것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제 삶의 아름다운 단면들(NEW BEAUTY)을 조심스럽게 남겨보려 합니다.
1 발걸음이 경쾌해지는 날
클라우드 속 오래된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제 입사 지원서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낯익은 질문 하나가 담겨 있었는데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평상시 인터뷰에 나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문항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이렇게 답했더군요.
“사람들은 누구나 거울을 봅니다.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날은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해집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그렇게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 회사에 다니고 싶고, 고객들의 걸음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출근하고 싶다니…”
몇 년 전의 제가 쓴 글이지만, 읽는 순간 실소가 터졌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출근길에 발을 질질 끌며 나왔거든요.
그런 생각 끝에,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지금의 나는 과연 그때의 내가 그렸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단순히 출근이 피곤하고 일이 바빠서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온전히 마음에 들어 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살아가며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괜찮다 싶다가도 문득 남들과 비교하면 초라한 마음이 들고, 비교하지 않으려 하면 이번엔 스스로 너무 안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조급함이 밀려옵니다. 그런 잡념들을 머릿속에 가득 품고서 거울 속 푸석한 눈동자와 마주치곤 합니다.
2 화장하지 말고 출근해주세요
"내일은 화장하지 말고 출근해서 제 제품 좀 테스트해 주세요."
퇴근 전에 팀 방에 남기는 톡입니다.
뷰티 회사에 다니면 자연스레 옷도 잘 입고, 화장도 늘 말끔하게 하고 다닐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품 테스트를 하려면 쌩얼로 출근해야 하니까요. 제 취향이 아닌 제품을 발라봐야 할 때도 너무 많고요. 주말에 손은 쉴 수 있어도, 얼굴은 좀처럼 쉴 틈이 없습니다. 지속력을 확인하려면 8시간은 피부 위에 올려두고 관찰해야 하니까요. 시간이 늘 부족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클렌징하고 다시 바르다 보면, 가끔은 정말 얼굴이 벗겨질 것 같습니다.
“앗… 혹시 지금 한 번만 발라봐주실 수 있을까요?”
이미 화장한 동료에게 그걸 지우고 다시 테스트해달라는 부탁은 제 입장에서도 망설여지는 일입니다. 한동안 미안한 마음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도 일정이 촉박해지면 결국 부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료가 제품을 테스트하는 날의 사무실은 거의 실험실 수준입니다.
“죄송한데, 그럼 오늘은 반쪽 얼굴에만 발라봐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1/4씩 다른 버전으로 나눠서 비교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시작되는 얼굴 내 ‘땅따먹기’.
좌측엔 버전 A, 우측엔 버전 B, 턱 쪽에는 컬러를 바꾼 C, 이마에는 타사의 타겟 제품.
본인도 바쁠 텐데, 동료는 묵묵히 또 그걸 들어줍니다. 아예 세수를 하고 와서 다시 제대로 바르고 말해주겠다며 클렌징 폼을 챙깁니다. 하루가 끝날 때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오늘 이쪽이 좀 덜 뜨네”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제품을 키워내는 데도 주변의 따스한 도움이 필요합니다.
3 모두의 취향을 맞추는 불가능한 미션
이렇게 열심히 테스트해서 내놓는 제품들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제형도 누구에게는 건조하고, 누구에게는 번들거립니다.
어떤 얼굴에는 커버력이 부족하다가도, 또 다른 얼굴에서는 딱 좋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겟을 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세웁니다.
이 제품은 어떤 사람에게 가야 사랑받을 수 있을지,
이런 설계가 없으면 제형은 절대 “완성”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되는 이 간단한 진실이 매일의 업무 속에서는 참 어렵고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처음 설계했던 방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매일매일 고민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이제 모르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누군가에게 “좋다”라는 말을 들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쁘다가도,
“별로다”라는 한마디엔 금세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고객이 남겨주는 따뜻한 리뷰 한 줄 한 줄이 그렇게도 고맙습니다.
“이 부분 정말 신경 썼는데 알아봐 주시다니.”
또는 “아, 이건 조금 숨기고 싶었는데 들켰네...”
가끔은 “그래, 이런 타입이라면 분명 좋아해 줄 줄 알았어!” 하며 혼자 속으로 뿌듯해하기도 해요.
어떤 고객님들은 어쩜 그렇게 스윗한 리뷰를 남겨주실까요?
"제 인생은 이 제품 전후로 나뉘어요."
"이건 정말 역작입니다."
"담당자님, 많이 버세요…"
그런 한마디면, 정말 그 말처럼 많이 벌지는 못해도 배가 부른 것처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실 저도 제품을 사도 리뷰는 거의 남기지 않는 편인데,
이런 댓글을 볼 때마다 세상은 생각보다 좋은 사람들로 가득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포인트를 채우기 위한 리뷰였다면 굳이 남기지 않았을 다정한 말 한마디들.
그런 말들이 제 피곤한 하루를 따뜻하게 감싸안아줍니다.
4 어쩌면 아름다운 매일들
얼마 전,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봤습니다.
도쿄의 공중 화장실을 청소하는 한 남자의 단순한 일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길을 걷고,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은 일을 합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 그저 더러운 화장실을 청소하는 단순한 일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그는 나름의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매일의 햇빛과 나뭇잎 그림자, 잔잔한 음악을 통해 자신만의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갑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책임을 다하며 묵묵히 하루하루를 반복하는 그의 모습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출처 : 영화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몇 년 전 제가 입사지원서에 적어냈던 ‘아름다움’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푸석하고, 쫓기며 버티듯 살아가는 하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니 알게 됩니다.
제 삶 곳곳에는 여전히 주변의 따스한 도움과 다정한 말들이 스며 있고,
또 저 역시 그들에게 작은 기쁨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요.
푸석한 얼굴로 쫓기듯 일하는 하루일지라도,
그런 내 노력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제가 잘 살고 있다는 작은 확신을 줍니다.
지금 이 하루하루의 고단함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아주 조용히 깨닫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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