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떠난 씨앗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아직 닿지 못한 곳으로 향하기 위한 씨앗의 여정은 언제나 대담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한 포기 풀, 꽃과 나무에는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삶의 자세와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식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꿈을 이루어 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960년, 유럽 시찰 당시 경험했던 광활한 라벤더 밭의 보랏빛은 아모레퍼시픽 창업자인 서성환 선대회장에게 식물의 힘에 대한 믿음을 더욱 심어주었지요. 꽃과 식물에서 업(業)을 시작해 가장 한국다운 화장품을 소개하고, 우리를 대표하는 차를 대접하고, 더 나아가 식물원을 열어 사람들에게 쉼을 선물하고 싶다는 소망.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우리 안에서 꾸준히 펼쳐지고 있습니다.
결국 ‘아모레퍼시픽’이라는 숲을 이루게 한 근원은 식물 아닐까요?
식물에게 배우는 용기와 꾸준함_식물 세밀화가 이소영
씨앗은 기다릴 줄 아는 존재입니다. 가뭄과 추위를 묵묵히 견디고 바람에 날리거나 때로 동물에 먹혀 정처 없이 이동하다가도 적절한 때를 만나면 기다렸다는 듯 온 에너지를 쏟아 싹을 틔웁니다. 식물이 지닌 무한한 힘도 이러한 씨앗의 발아 과정에서부터 점차 자라나는 거겠죠.
개인 작업실에서 세밀화를 그리는 이소영 작가
개인 작업실에서 세밀화를 그리는 이소영 작가
작가님을 통해 ‘식물 세밀화가’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이 많을 거 같습니다. 15여년 간 식물 세밀화가로 일하며 사람들에게 식물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해온 건 식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식물과 가까이 지냈어요. 부모님께서 제가 도시에 살면서도 자연을 잘 느끼며 자랄 수 있도록 공원이나, 식물원, 산과 같이 식물이 있는 장소에 자주 데려가 주셨거든요. 가까이에서 식물을 접할 기회도 많았고요.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 앵도 나무가 있었는데, 매년 이맘때쯤 나뭇가지에 분홍빛의 꽃이 한가득 피어나던 기억이 나요. 앵도 열매가 열리면 아버지가 바구니를 가져오라 하셔서 한가득 열매를 따 주셨는데, 그걸 먹으며 식물은
나에게 많은 걸 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고요. 식물과 친숙하게 지낸 만큼, 자연스럽게 관심이 깊어져 원예학을 전공하게 되었죠.
4월 원료식물원에 핀 장미조팝나무(좌)와 복사나무의 꽃(우)
하지만 식물이 좋아서 원예학과에 진학하고자 했을 때 주변에 말리는 사람도 많았다고요. 아무래도 진로를 결정할 나이에는 선생님이나 어른들의 말에 영향을 받기 쉬운데, 그런데도 작가님이 자신의 결심을 밀고 나갔던 힘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식물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이지 않았고 원예학과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었어요. 식량자원을 재배하는 농부가 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길로는 가능성이 적다 보니 주변 어른들은 걱정하셨죠. 그런데 저희 아버지께서는 되려 ‘평생 식물만 보고 살면 얼마나 행복하겠니’ 하시며 제 뜻을 지지해주셨어요. 저 역시도 앞으로 식물이 더 사랑받을 날이 올 거라고 믿었어요. 디자인사를 봐도 굉장히 화려한 것을 추종하는 시대가 지나면
단순미가 있는 미니멀리즘이 주목을 받잖아요. 과학기술의 발달이 지속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 삶의 가장 기본 요소인 자연에 대한 관심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죠. 지금이 바로 그 시대인 거 같아요.
이소영 작가 작업실 모습
원예학과를 졸업한 후에는 어떤 길을 걸어왔나요?
우선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식물 세밀화가를 정식 채용하는 국립수목원에서 4년간 식물세밀화가로 일을 했어요. 국립수목원은 한국의 식물 종을 보존하기 위해 식물 전반을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에요. 저는 조사실 소속으로 한국에 어떤 식물이 있는지를 조사해 분류하고. 그 식물의 기록물을 만들어 표본관에 소장하는 일을 했죠. 그렇게 국립수목원에서 식물 세밀화가가 하는 일의 전반을 경험하고 앞으로 식물 세밀화가로서 어떤 중심을 잡고 활동해야 할
지 기반을 잡은 후에는 유학을 위해 퇴사를 결심했고요. 영국이나 일본 등 식물 세밀화 연구가 한국보다 앞서 있는 나라로 유학을 떠나 한국의 식물 세밀화 연구를 더 선진적으로 이끌 방법을 배우고 싶었거든요. 지금은 식물 세밀화가 필요한 여러 분야에서 작업 의뢰가 많이 들어와서 우선은 프리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식물 세밀화의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려는 꿈은 놓지 않고 있어요.
이소영 작가가 원료식물원에서 직접 보고 그린 차나무 세밀화
대부분의 대중에게 식물세밀화는 예술적 영역으로 먼저 와 닿아요. 작가님의 작업만 봐도 세밀한 표현에 눈을 뗄 수 없죠. 하지만 식물 세밀화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죠?
식물 세밀화의 정식 명칭은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Botanical Illustration), 식물 종을 관찰해 그 형태와 특징을 정확하게 그려 기록하는 과학 일러스트레이션에 속해요. 의학으로 치면 인체 해부도 같은 거죠. 가장 흔하게는 식물 도감에 들어가 있는 그림이에요. 식물도감은 사람들이 식물의 이름이나 자세한 생김새가 궁금할 때 펴 드는데, 실제 식물과 책 속 식물 그림을 비교할 수 있으려면 식물의 뿌리부터 줄기, 가지, 잎, 꽃,
열매, 씨앗 등 식물 종의 총체적 특징을 그대로 옮겨 그려야겠죠. 식물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관찰한 후, 예술적인 해석은 배제하고 기록 목적으로 남기는 그림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돼요.
이소영 작가가 원료식물원에서 직접 보고 그린 차나무 세밀화
한 장의 식물 세밀화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제가 그려야 될 식물 종이 정해지면 그 식물과 그 식물이 속해 있는 가족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며 공부해요.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할지 숙지한 후에는 그 식물의 자생지로 직접 찾아가죠. 식물의 크기를 재고, 특징을 관찰하면서 현장에서 스케치를 최대한 많이 해요. 그리고 가능한 경우에는 식물을 채집해 와서 현미경이나 루페(loupe, 볼록렌즈를 사용한 확대경)로 더 자세히 보며 그림으로 옮기죠. 이 과정을 꽃이 필 때, 새잎이 날 때. 꽃이
질 때, 열매가 맺힐 때마다 반복하며 식물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정리해 완성합니다.
그 동안 작가님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나요?
루페로 식물을 관찰 중인 이소영 작가
루페로 식물을 관찰 중인 이소영 작가
<식물의 책>과 같은 에세이집 출간,네이버 오디오 클립 ‘이소영의 식물 라디오’ 진행, <서울신문>의 ‘이소영의 도시 식물 탐색’ 칼럼을 연재하는 등 식물 문화를 전하는 데 앞장서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작가님은 식물 세밀화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식물 문화를 전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는 이소영 작가
식물 문화를 전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오고 있는 이소영 작가
지금 우리가 만난 작가님의 작업실은 아담한 크기이지만 무한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합니다. 여러가지 식물 관련 사물들이 정말 많아요.
전 세계 곳곳에서 식물 관련 책과 사물들을 모으고 있어요. 저는 여행을 가도 그 지역 식물원과 중고서점에는 꼭 들려요. 중고서점에 가면 들어서자마자 식물 코너가 어디 있는지 묻고요. 작업실에 있을 때도 쉬는 시간마다 경매 사이트를 둘러봐요. 제 취미이죠. 그래서 구한 책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파견된 일본 식물학자들이 한국 자생 식물들을 기록한 것, 조선총독부 소속 식물학자와 우리나라 1세대 식물학자들이 독도에서 식물을 연구한 것
등 귀중한 자료가 많아요. 북한의 우표를 모아 둔 스크랩북도 있고요. 이걸 보며 북한에 어떤 식물들이 있는지 알 수 있죠.
이소영 작가가 직접 모아 온 식물 관련 도서와 자료
이번 인터뷰에서는 작업실 책상에서 식물을 관찰하고 종이 위에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이 단계 전에는 숲이나 정원 등의 자연 공간으로 나가 식물을 찾아다니는 탐험을 하셨겠죠.
오산 원료식물원을 찾은 이소영 작가
오산 원료식물원을 찾은 이소영 작가
오산 원료식물원 초입에 서 있는 향나무
아모레퍼시픽의 오산원료식물원 역시 작가님이 식물 세밀화 작업을 위해 자주 방문하는 공간이에요. 오산원료식물원의 첫인상을 기억하나요?
그동안 전 세계 다양한 식물원을 다녀보았지만 이만큼 공간 크기 대비 다양한 식물 종이 식재된 곳은 본 적이 없어서 처음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원료 식물원이라는 개념 자체도 굉장히 선구적이죠. 이곳은 정말 화장품 원료를 기르고 연구하겠다는 구체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는 곳이잖아요.
요즘은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컨셉의 식물원이나 수목원이 많이 생기는 추세인 거 같아 아쉽기도 하거든요.
입구를 지키고 있는 커다란 향나무가 식물을 향한 장원의 진심이자, 아모레퍼시픽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그 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라기까지 오랜 시간 식물을 아껴왔다는 상징이니까요.
오산 원료식물원 초입에 서 있는 향나무
장원은 화훼식물에 관한 관심이 미비할 때부터 식물을 연구하고 심어 길렀다고 해요. 대중에게 식물 문화의 가능성을 전할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서는 점은 장원과 작가님의 닮은 점이 아닐까 싶은데요, 작가님께서 장원의 삶을 돌아보며 더 본받고 싶었던 면모가 있으실까요?
오산원료식물원을 찾을 때마다 한참 머물다 가는 이소영 작가
오산 원료식물원에 핀 무궁화꽃
오산 원료식물원에 핀 무궁화꽃
그리고 이번 <선택의 정원> 프로젝트에서는 <선택의 정원> 프로젝트의 플랜트 도슨트로 참여했죠. 사람들에게 들려줄 공간 소개 멘트를 녹음할 때 어떠셨는지 소감이 궁금합니다.
오산 식물원 라일락 향을 맡고 있는 이소영 작가
오산 식물원 라일락 향을 맡고 있는 이소영 작가
작가님과 함께 한 오산원료식물원 첫 산책을 계기로, 일상에서도 주변 식물들과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작가님만의 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식물과 교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이소영 작가는
일단 식물과 같은 높이에서 관찰해 보라고 한다.
식물과 교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이소영 작가는
일단 식물과 같은 높이에서 관찰해 보라고 한다.
이 일을 하며 혹은 식물의 영향으로 자기 모습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나요?
4월에 활짝 핀 수선화
작가님이 생각하는 식물의 힘은 무엇인가요? <선택의 정원> 프로젝트를 방문할 젊은 세대가 식물의 어떤 면모를 마음 속에 새긴다면 장원이나 작가님처럼 여러 가지 선택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고 대담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요?
씨앗에서 싹이 돋고 뿌리가 나기 위해서는 어떤 자극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식물 키울 때도 물을 오래 주지 않다가 갑자기 물을 주었을 때 그 자극의 영향으로 꽃이 피어나기도 하죠.
이처럼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한 발판임을 믿고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겨울 지나 봄에 꽃이 피어나듯 자연스러운 흐름의 파도에 몸을 맡기면, 지금의 어려움도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거예요.
오산원료식물원 입구에 핀 사과나무꽃
오산원료식물원 입구에 핀 사과나무꽃
가느다란 박태기나무 가지에도 분홍 꽃이 피어 있다.
가느다란 박태기나무 가지에도 분홍 꽃이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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