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본사
글
박성진 사이트앤페이지 대표
2018년 어느 날, 후암동에 사는 지인을 보기로 했다. 뜨는 동네를 일부러 찾아다니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기회인 만큼 내심 후암동이나 이태원, 경리단길의 핫플에서 만나는 것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장소는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였다. 주변의 좋은 곳들을 제쳐두고 왜 남의 기업 사옥에서 보자는 걸까? 따로 브랜딩 된 대형 복합몰이 지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로비를 아무리 잘 꾸몄다 한들 시각적인 즐거움이 고작이지, 대기업 사옥이라는 근본에 불편함이 클 텐데 어쩌려고 그러지. 그간 해외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비슷한 사례만 보더라도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향했던 거리낌은 타당한 것이었다. 공간에 특히 예민한 나는 약속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었고, 용산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특색 없고 안전하게 그를 만났다. 그러고 나서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처음 찾게 된 것은 1년 후쯤 〈설화문화전〉에 방문하면서였다. 이때 지하에 주차를 하고 1층 로비로 올라왔는데, 나의 정확한 첫 느낌은 ‘뭐지? 이 광장은···.’이었다.
광장을 품은 건물, 하늘을 담은 연못
준공 5주년 기념 특별전시 〈BUILDING. BEAUTY〉를 보러 다시 찾은 아모레퍼시픽 본사 1층은 여전히 활기찼다.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 남은 시간을 찔끔찔끔 흘려보내는 사람, 위에서 내려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수년 만에 우연히 만난 지인을 앞에 두고 화들짝 놀라는 사람, 2층 테라스에 앉아 낚시하듯 허공에 시선을 던져둔 사람, 강연장 앞에서 입장을 길게 기다리는 사람, 높은 서가 사이를 유영하며 책을 찾는 사람, 어린이집 가방을 한 손에 들고 핑크퐁 노래를 불러야 하는 사람. 본사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을 모두 지우고 보더라도 이곳에는 다양한 사람이 한데 모여 있다. 이유와 목적이 있는 발걸음 사이로 우연과 산책의 걸음들이 뒤섞여 있다. 이들에게 낯선 기업의 로비에 들어왔다고 느껴지는 긴장은 전혀 없다. 대기업 본사의 로비라는 본래의 기능이 마치 부속물인 것 같은 생경하고도 즐거운 풍경이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업 사옥의 풍경은 절대 아니다. 어떤 장소가 이런 모습과 분위기를 띨까? 정방형 평면, 확 트인 실내 오픈 스페이스, 또 그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사면의 테라스, 빈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는 백색의 웅성거림, 심지어 1층에 자리한 원형 인포메이션 데스크까지. 이건 (BTS만 없을 뿐) 뉴욕 그랜드센트럴 터미널에 들어선 느낌이다.
정방형 아트리움이야말로 이곳 건축의 출발점이자 모든 가치의 응결점이다. 보통 건축을 보거나 이야기할 때 ‘밖에서 안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 좋지만 아모레퍼시픽 본사에는 역으로 ‘안에서 밖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옮겨가는 것이 더 흥미롭다. 아트리움이라는 실체 없는 빈 공간의 존재 의지가 먼저였고, 기둥과 벽, 천창이 존재의 현현을 위한 언어로 동원된 것 같다. 낮고 넓은 건물의 형태와 배치, 중앙을 비우고 모서리로 숨어든 수직 코어(엘리베이터, 계단), 건물 상부를 관통하는 루프가든, 이 모두가 아트리움을 빚어내기 위한 과정과 전략처럼 보인다. 보통의 아트리움은 내부 깊숙이 빛을 끌어오는 공간적 장치이지만 이곳의 아트리움은 도시와 지역의 다양성에 감응하는 수용체이다. 그러니 굳이 밖으로 시선을 돌려 도시를 말할 이유가 없다. 파리의 발터 벤야민과 경성의 구보씨가 지금 시대로 돌아온다면 아케이드와 길거리가 아닌 이곳 아트리움에서 일일을 보내며 산책했을 것이다.
카페, 꽃집, 와인바, 레스토랑, 스토어, 미술관, 라이브러리, 어린이집까지 상이한 성격의 프로그램들이 서로 등돌리지 않고 하나의 빈 공간을 마주하면서 둘러앉은 이 풍경이야말로 본사의 본질적 가치를 담고 있다. 얼핏 나열한 기능만 보면 최근 유행하는 저층부 복합몰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것을 천박한 상업주의로 내몰리지 않도록 조율한 것이 바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섬세한 공간적 조율과 배치이고, 아모레퍼시픽이 갖는 연결과 공감을 향한 의지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에 떠 있는 거울 연못의 숭고 때문이다. 이 셋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이곳은 아우성치는 파놉티콘이 되었을지 모른다.
지역과 문화가 융화되는 곳
국내 대기업 본사의 저층부와 로비는 내 경험으로 둘 중 하나의 분위기였다. 삼엄함 아니면 번잡함. 업무공간이라는 내적 기능에만 매달렸을 때 공항검색대나 지하철 개찰구와 같은 배타적 라인이 형성되고, 로비는 감시의 시선에 둘러싸여 삼엄함으로 가득 찬다. 로비에 값비싼 예술작품을 두고 세련된 갤러리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어쨌든 일종의 삼엄함이다. 이에 반해 번잡함은 아예 저층부를 방관했을 때의 느낌이다. 즉 복합몰이나 푸드코트로 분리해 운영하거나 위탁을 맡겼을 때 나오는 분위기다. 별도의 스페이스 브랜딩과 MD 구성으로 편의시설을 두지만, 이는 기업의 사옥이 포용적 공간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분명한 선을 긋고 저층부를 떼어버린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싫지만, 더 싫은 것을 묻는다면 후자의 번잡함이다.
도시와 건축에서 공공성과 지역성, 그리고 상업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아슬아슬한 경계를 갖는다. 공공성과 상업성은 양극단에서 대립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끗 차이이고, 공공성과 지역성은 비슷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은 성격이 다르다. 한 가지의 가치로 맹목적으로 채워진 건축은 결코 좋은 장소가 되지 못한다.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이런 도시와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문화와 상업을 한데 두었기 때문에 활기 속에서 공간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깥 세계가 가져야 할 공공의 활기가 안에서 펼쳐진다.
60년 동안 아모레퍼시픽이 같은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태어나서 환갑이 될 때까지 한곳에서 살아온 셈인데, 이쯤 되면 그곳에 대한 장소애(場所愛, topophilia)는 개인과 집단을 넘어서 지역과 사회를 향하기 마련이다. 아모레퍼시픽의 본사가 지금처럼 임직원들의 업무공간을 넘어서 주변 지역을 향한 복합문화공간처럼 열리게 된 것은, 이곳에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있고, 또 새로운 미래를 담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마곡이나 판교 같은 곳으로 옮겨 새로 사옥을 지었다면, 단언하건대 지금과 같은 본사의 건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 건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를 연결 짓는 하나의 헤리티지다.
전통이 모던이 되는 순간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아모레퍼시픽 본사 설계에서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들고나왔다. 달항아리의 구체와 본사의 정육면체, 이 둘 사이에 형태적 차용과 직관적인 연관성이 읽히지 않으니 참 다행이다. 치퍼필드는 달항아리에 녹아든 우리 고유의 ‘미감’에서 ‘영감’을 받고, 그 형태와 재료가 아닌 바로 그 ‘감(感)’을 건축이라는 추상의 세계로 표현한 것이다. 달항아리가 갖는 소박하고 투박한 미의식, 낮은 무게중심과 비례감, 절제를 통한 존재의 표현... 달항아리는 이곳 건축과 연결된 하나의 은유 세계이다. 그러니 이 은유를 너무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날 달항아리를 한국의 미감으로 정립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진작가 구본창의 작품은 어쩌면 달항아리 그 자체보다 더 미학적이고 전통적이다. 사진에 담긴 무감하고, 중성적인 백색 담묵(淡墨)의 세계. 이는 우리의 전통이 모던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아모레퍼시픽 본사 아트리움에서 이런 밝은 담묵의 세계와 전환이 느껴지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일까. 2층 테라스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이곳이 빛은 있지만 그림자가 없는 세계라는 것. 보통의 아트리움이 빛과 그림자의 강렬한 대조 속에서 인상파의 유화 같은 풍경을 이루지만, 이곳은 담묵의 깊이 속으로 모든 개체와 움직임이 통합되어 스며든다. 널찍한 정방형 평면에서 건물의 1층은 깊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천창의 빛 또한 연못의 물과 깊은 격자형 우물 구조 속에 산란하니 결국 아트리움에는 빛은 있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보통의 기업 사옥처럼 높고 좁은 타워형의 커튼월 건물이라면 이처럼 질박하고 무감한 공간의 표정과 깊이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본사를 방문했던 지난 9월 25일 아모레홀에서는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초청 강연이 열렸다. 5년 전 본사를 설계했던 그가 2023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이 쏠린 상황이었다. 현장에는 국내 건축계의 주요 인사 및 일반 대중, 아모레퍼시픽 임직원 등 총 4백여 명이 함께 자리했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건축철학과 함께 본사 설계에 대한 배경과 의도를 밝혔다. 그 가운데 내 귀에 계속 맴돌았던 말이 있다. “이 건물은 하나의 아름다운 건물이자 단순히 아름다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와 도시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원칙의 선언이다.”
세련되고 멋진 디자인으로 건물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지역과 사회와 연결된 건강한 ‘장소’를 하나 만드는 것은 큰 노력과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아모레퍼시픽 본사는 단순한 건물이 아닌 이미 하나의 장소로서, 이 도시의 풍요로운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Beauty Road’는 뷰티 문화를 창조해 온 아모레퍼시픽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매 월 하나의 주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칼럼을 통해 아모레퍼시픽의 가치를 색다른 관점으로 만나봅니다
글 박성진
사진 포토그래퍼 노경 / 맘보 / 아모레퍼시픽
영상 맘보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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