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북촌 조향사의 집 展>
글
김유라 오브뮤트(OVMUTE) 조향사 겸 작가
작은 책상 위 수십 개의 향료들. 꽉 닫은 뚜껑 사이로 자연에서 얻어진 오색빛깔 향기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작업을 위해 책상에 앉으면 향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제주도 감귤꽃의 화사한 웃음소리, 담양 대나무의 시원한 바람 소리, 고흥 유자의 달콤한 노랫소리까지. 각기 다른 향의 소리를 듣다 보면, 한 방울씩 떨어지던 액체가 어느새 작은 병 속에서 만나 아름다운 층위를 이룬다. 투명한 층으로 아슬하게 쌓여있던 향들은 서로에게 이어지며 하나의 언어로 탄생한다.
향, 조향사의 언어
조향이란 원하는 향이 나올 때까지 고르고, 섞고, 다시 고르는 작업이다. 어찌 보면 단순할 수 있는 작업이지만, 조향사에게 향료란 작가의 단어와도 같다. 한 방울의 향료마다 조향사의 문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언어들 중에서 향의 언어는 가만하다. 은근하게 곁을 떠돌며 고요 속에서 말을 건다. 무심코 스친 향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뇌리에 박혀 분위기를 구성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린 주인공처럼, 순간의 모든 것을 무의식에 각인하는 향은 그 어떤 언어보다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토록 강력한, 완성된 언어로써의 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선 조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향료는 크게 자연의 동식물에서 추출한 천연향료, 그리고 화학적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 합성향료로 나뉜다. 어느 하나가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천연의 향은 많은 조향사들에게 영감과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천연향이 전체 향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적다. 이유 중 하나는 극도로 낮은 수율에 있다. 천연오일의 추출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가열을 통해 향을 얻는 증류법, 재료에 압력을 가하는 압착법, 휘발성 혹은 비휘발성 용매를 이용하는 용매추출법이 있다. 수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이 연구되고 있지만, 힘주어 짓이겨도 온전한 즙 한 방울 얻기 힘든 식물에서 향기 성분을 얻어내는 건 쉽지 않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의 앱솔루트를 한 방울 얻기 위해서는 약 170송이의 장미가 필요하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저렴한 합성향료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향료를 얻었다면, 다음으로는 향료가 가진 ‘시간’ 을 이해해야 한다. 시간은 곧 분자량으로, 적은 분자량을 가진 향은 초반에, 많은 분자량을 가진 향은 후반에 모습을 드러낸다. 문장의 문법처럼, 향료들의 시간을 이해해야 소통 가능한 언어로써의 향이 만들어진다. 첫 향은 단박에 코를 사로잡는 시트러스(Citrus)가 자주 쓰인다. 반짝거리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레몬, 베르가못 같은 향들이 기분 좋게 시선을 끌기에 제격이다. 향의 중간은 조향사가 말하는 주제다. 화려하면서 중심이 될 만큼의 무게감도 지닌 플로럴(Floral)이 많이 사용된다. 그리고 마지막, 잔향은 묵직하고 긴 시간을 가진 우드 혹은 머스크(Musk) 계열이 등장한다. 때로는 앞선 화려함에 잊히기도 하지만, 조용히 다른 향들을 지탱하며 은근한 여운을 남긴다.
조향사의 집에 담긴 3가지 노트
누군가가 사는 집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누군가를 보고 그가 사는 집을 떠올릴 수 있을까? <조향사의 집>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도 이 지점이었다. 조향사의 공간은 그가 만드는 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 것인가. <조향사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곧바로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언어로써의 향과 같은 집에 살고 있다. 1층에 들어서면 반겨주는 아뜰리에는 첫 향과 같다. 시선을 잡아끄는 조향사의 환상이 가득 담긴 공간이다.
천천히 돌아가는 턴테이블과 오래된 빈티지 서적들이 놓여있고, 큰 창으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을 따라가다 보면 세월의 손 기름이 배어있을 것 같은 예스러운 조향 오르간이 보인다. 조향 오르간은 향료를 한눈에 보이게 놓을 수 있는 조향사의 상징적인 가구다. 어떤 방식으로 향료를 정리하고 배치했는지를 보면 그의 작업방식을 알 수 있다. 60년대에 사용되던 것을 복원했다는 조향 오르간이 어떤 손길을 거쳐왔을지 신비로운 상상의 나래에 빠진다. 오르간을 둘러싸며 집안 곳곳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과 식물들은 시각적인 향을 뿜어낸다. 자세히 둘러보니 장미와 수선화같이 향의 재료가 되는 식물들이었다. 집 안에 피어난 자연. 그 자연에서 얻어낸 향료를 물감으로 조향사가 그려낼 어느 꿈 같은 향은 떠올리기만 해도 아름답다.
두 번째 공간인 ‘조향사의 연구실’은 주제를 가진 중간 향을 담당한다. 첫 공간은 분명 환상적이었지만 그것이 조향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조향이 아름다운 예술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 첫인상이 다는 아니다. 예술적인 향을 창조해 내는 행위는 즉흥적으로 영감을 따라감과 동시에 철저한 연구와 계획 아래에서 탄생한다. 연구실 공간에서는 신비주의를 걷어낸 실제 조향사의 작업실을 엿볼 수 있었다. 기존 아모레퍼시픽 연구실에서 가져왔다는 가구들에는 세월의 흔적이 충분했다. 더불어 곳곳에 붙어있는 휘갈긴 메모와 실험자재들까지 더해져 정말 과거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원료 식물들의 씨앗과 책상 위의 천연원료 지도였다. 아모레퍼시픽은 국내의 여러 지역에서 식물원료들을 추출하고 이를 다시 제품에 적용해 왔다고 한다. 이에 인삼과 유자 같은 한국적인 향들이 주를 이룬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식물과 향을 이용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제품으로 개발해 왔음에는 많은 의미가 느껴졌다. 앞서 말했듯, 천연향의 수익성은 매우 낮다. 추출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 비용도 상당하다. 그러나 여전히 합성향료의 조합은 천연향을 큰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천연향 연구를 통해 발전되어 간다. 아직 연구되지 못한 미지의 향도 너무나 많기에 발전된 미래의 향료를 원한다면 천연향 연구는 필수적이다. 자연원료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계속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조향’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향을 만든다는 의미이지만, 그 중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사실 한국에서 향이 주목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향’ 자체는 과거부터 즐겨왔을지언정, 원료를 추출하고 합성하는 연구에 있어서 한국은 향의 불모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일례로 아모레퍼시픽의 조향팀이 자체 향료 개발을 시작하고 유학을 다녀오던 6-70년대의 경우 대다수는 개발은커녕 ‘조향’이라는 개념 자체에 익숙지 않았다. 지금에야 향이 관심을 받고 있지만 무려 50여년 전부터 향료의 적극적인 연구, 그것도 해외만 좇는 것이 아닌 한국적인 식물과 향료를 찾고 고민해 오며 이를 아카이빙 한 것은 상당히 놀라웠다. 사람들은 가치 있다 여기는 것에 시간과 자본을 쏟는다. 단순한 소비재로써 향의 환상만을 추구했다면, 향의 연구에 공을 들일 수 없었으리라. 이처럼 향 자체의 지속과 발전 가능한 미래를 좇는 것이 진짜 조향의 핵심이지 않을까.
첫 향과 중간 향을 지나 올라온 마지막 공간 ‘센트 아카이브’에서는 잔향이 느껴졌다. 화려함으로 눈길을 끌지 않고 잔잔히 존재하는 잔향은 때로 사람들에게 잊혀지곤 한다. 그러나 땅을 단단히 다지고 지탱하는 뿌리의 역할이 없다면 앞선 향들은 모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센트 아카이브에서는 한국 향 문화와 산업의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아모레퍼시픽의 빈티지 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 모았는지 모를 만큼 쌓인 수백 개의 포뮬러 샘플들, 여전히 작동되는 과거의 충진기, 그리고 디자인에서부터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수십 개의 향수병들이 보였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한국의 향은 멀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함께 상영되던 조향사분들의 인터뷰를 보면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흐름 속에서도 끝없이 향을 탐구하고 모아오던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장품 향으로는 익숙하지 않던 한방 약재의 향기를 위해 직접 약재들을 연구하거나, 막 개화한 장미 향을 표현하기 위해 성분을 분석하여 기호성을 높이는 등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친 제품들의 향조차 이런 세심한 연구 끝에 탄생한다. 그 시작점에 놓인, 약 50년 전 한국에서 출시된 향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수십 년 전부터 쌓아온 고민과 연구가 모여 지금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향이 남긴 이야기
좋은 조향사는 향을 매개로 소통하며 좋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조향사의 집>의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의 주인은 향으로 세심하게 문장을 쌓아나가는 진득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후각적 언어의 시각적 변조를 통해 조향사의 세계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과연 앞으로의 그가 들려줄 향은 어떠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기대해 본다.
epilogue
김유라. 향기 브랜드 오브뮤트(ovmute)의 조향사 겸 작가로서 예술과 자연을 기반으로 직접 조향하고 블랜딩한다. 순간의 느낌으로 존재하는 무형의 아름다움을 믿으며, 부유하는 감각들을 향기에 담아낸다.
글 김유라
사진 아모레퍼시픽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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