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감정 사이, 기획자로 오래 남고 싶어서 - AMORE STORIES
#임직원칼럼
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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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감정 사이, 기획자로 오래 남고 싶어서

마흔, 더 오래 더 아름답게 일하는 법 #2 좋아하는 마음 오래 지키기

 

한다혜 메이크업프로팀

 

 

나답게 일하고 싶은 마흔의 시선으로 한 분야에서 꾸준히 쌓아 온 시간 속에서 발견한 깊고 새로운 아름다움(NEW BEAUTY)을 다섯 번의 칼럼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INTRO


“나, 요즘 뭘 좋아하지?”
늘 좋아하는 게 분명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그 대답이 막막해졌습니다. 하루 안에 수많은 탭을 열고 닫고, 아이디어와 데이터를 넘나들다 보면, 내가 뭘 좋아했는지를 잊게 됩니다. 감각은 무뎌지고, 마음은 바빠집니다.
기획자로 일하며 배운 건, 감동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잘 보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감정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걸요. 저는 그 감정을 지키기 위해 몇 가지 훈련을 만들었습니다. 일과 감정 사이에서 나를 닳지 않게 하는 사적인 방식들.
이 글은 그 훈련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제가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아이디어는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되짚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획을 오래 하다 보면 “아이디어는 어떻게 떠올라요?” 하며 묻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저는 그 ‘떠오르는 순간’을 그다지 믿지 않아요”라고요. 물론 어떤 장면이 머리를 스치고, 문장 하나가 머리에 박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진짜 중요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갑자기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레퍼런스를 찾으며 뭔가를 떠올리려는 조바심 속에서 얻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가고, 핀터레스트를 끝없이 스크롤하면서 ‘영감’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행동이 어쩐지 저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오곤 했습니다. 마치 제 안의 공허를 애써 외면하는 방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영감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되짚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나는 무엇에 마음이 끌리는지, 어디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 어떤 이미지 앞에서 스크롤을 멈췄는지. 그런 감정의 방향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에서 아이디어의 실마리가 풀리곤 합니다.


그러한 감정의 방향을 놓치지 않고, 그 미세한 떨림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 저는 의식적으로 움직이곤 합니다. 좋아하는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듣고, 사랑하는 시인의 시를 소리 내어 읽고, 강의실 구석에서 미학 강좌를 들으며, 예술 도서관에서 오래된 아트 디렉터의 에세이와 포토그래퍼 사진집을 봅니다.

 

 

요즘은 ‘영화감독의 눈’과 ‘촬영 미학’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주에 산 책과 최근에 배운 것들.

 

 

사진 속에는 그들의 정서가 너무나 분명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기술이 아니라 시선의 문제였고, 감각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감정을 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자기 방식대로 바라보는 사람. 말보다 시선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 저는 이러한 태도에 오래 머무르고 싶습니다. 또 언젠가는 내가 느끼는 바를 이미지 하나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디어가 필요할 땐 먼저 제 안을 들여다봅니다. 내가 요즘 어디에 오래 머물렀는지, 무엇을 반복해서 되짚고 있는지, 어떤 감정이 내 안에 남아 있는지. 그런 감정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만이 결국 누군가에게도 감정으로 닿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2 좋아하는 감정은 조용히, 그리고 자주 닳아간다

 

일이 많아질수록 감각은 무뎌졌습니다. “전환율을 높여야죠.” “좀 더 잘 팔릴 수 있게요.” 그 말들이 틀린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말들 안에 제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에 대한 단서가 사라져 있었습니다. 기획자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하고 있었지만, 제가 이 일을 좋아했던 마음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일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려 했습니다.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시간을 갖는 것이 절실했습니다.

몇 년 전, 일이 가장 바쁘던 시기에 주말마다 목공소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전혀 관련 없는 재료와 도구, 반복적인 손의 리듬 속에 몰입하고 있으면, ‘기획자로서의 나’와 잠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1분 스피치’라는 작은 리추얼이 있었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1분 안에 말하는 일. “촬영 끝나고 평일엔 못 가는 맛집에서 덴푸라동을 먹었어요.” “촬영 날 아침, 모델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기 위해 전날 밤까지 리스트를 골랐어요.” 처음엔 별일이 없는 줄 알았던 일상도 입 밖에 꺼내 보면 꼭 반짝이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손으로 나무를 갈기 시작했습니다. 샌딩은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조용한 리듬 안에서 머릿속이 정리되고 막혀 있던 아이디어의 실마리가 다시 풀리곤 했습니다. 머릿속의 기름이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나무결을 따라 손을 움직이다 보면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목공소에서 직접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만든 책상

 

 

그 경험 이후로 일이 아닌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는 시간이 오히려 일의 감각을 회복시켜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쁜 것을 소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는지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 그 시간이 있어야만  다시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었고,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보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인터뷰를 좋아하고, 완성된 시보다 그 시를 담아낸 시인을 좋아하고, 노래를 듣는 것보다 가사를 써보는 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감상보다 해석에 끌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인상보다 그 사람의 구조와 결에 관심이 많습니다. 결과보다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흐름과 이유, 리듬과 온도에 마음이 갑니다. 저는 완성된 감동보다 그 감동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더 오래 머무는 사람입니다.

이런 뾰족하고 조용한 취향들이 결국 기획자로서 필요한 감각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취향은 처음엔 너무 사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쉽게 닿는 말보다, 오래 곱씹히는 문장을 좋아하고, 한눈에 보이는 화려함보다 뒤늦게 생각나는 장면을 더 믿습니다. 그것들이 결국 제가 만들어 가고 싶은 것입니다.

무언가를 오래 좋아하려면 그 좋아하는 감정을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깊고 좁은 감정은 쉽게 닳지 않고, 오래 기억되며, 결국 다시 작업으로 이어지곤 하더라고요. 그것이 제가 일과 ‘나’ 사이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해왔던 훈련이었고, 지금도 그 훈련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3 감동은 오래 남고, 결국 나의 일이 된다

 

한때는 오랫동안 시 낭독 모임에 나갔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모임이었지만, 이상하게 감정이 깊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서로 조용히 좋아하고 수줍어하며 마음을 건네는 저녁들이었어요. 각자 좋아하는 시를 골라 돌아가며 읽고, 유난히 좋았던 문장을 나누고, 아무 말 없이도 감정이 통하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장면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느 날 한 참여자가 조용히 종이를 꺼내 들었습니다. “제가 시를 써 봤어요.” 직접 쓴 시를 낭독하겠다고 말하는 그 순간의 공기는 무척 조심스러웠고, 동시에 다정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문장에는 이상하리만큼 정확한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가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그 자리에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은 제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종류의 감정이었습니다. 진심은 결국 닿는다는 것을 눈으로 본 순간이었어요.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강에서 조용히 시를 나눈 저녁

 

 

그 이후로 저는 새로운 기획을 시작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요즘은 뭐에 감동했지?”

그 질문이 방향이 되어줍니다.

아이디어보다 먼저 감동이 있어야 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는 사람만이 오래 좋아할 수 있고, 결국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작고 조용한 감정들을 수집합니다. 퇴근 후 시간이 남으면 좋아하는 평론가의 강연을 들으러 가고, 책을 사러 일부러 먼 서점에 가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한 작곡가의 음악을 밤에 틀어놓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제 안에서는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정의 결이 바뀌고, 문장이 떠오르고, 어딘가 미처 감당하지 못했던 마음이 말이 됩니다.

그것들이 결국 다음 작업의 뿌리가 됩니다. 지금도 저는 제가 만든 콘텐츠를 여러 번 돌려봅니다. 웃긴 장면도, 어정쩡한 컷도, 감정의 흐름이 정확히 닿았던 순간도. 완성된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제가 좋아하면서 만든 것을 다시 봅니다. 내가 만든 세계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 그 애정이 있어야 다음 작업을 할 힘도 생깁니다.

저는 제가 대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AI보다 무서운 건 감각 좋은 후배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제 것입니다. 그건 흉내 낼 수 없고 단기간에 쌓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감정의 정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감각의 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저는 오늘도 조용히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도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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