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운 생각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잃지 않는 법에 대하여 #3
글
나용주 R&I 센터 혁신경영센터
#INTRO
안녕하세요. R&I 혁신경영센터 나용주입니다. 평소에 ‘나’를 둘러싼 경험에서 생각을 확장하고 정리하며 글을 써왔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는데요. 이번 기회를 통해 때로는 R&I 연구자의 시선으로, 때로는 평범한 직장 동료의 입장에서, 저만의 사유를 넘어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저의 글이 여러분께도 ‘나다움’과 그것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1 연구자에게도 셀럽이 있다구요?!
‘셀럽’이라고 하면 연예인들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연구자들에게도 셀럽이 있답니다. <알쓸신잡> 같은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미디어에 출연하는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 같은 분들을 셀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출처: tvN 알쓸신잡
연구자의 셀럽은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그보다는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저 같은 연구자에겐 더 의미가 큰 셀럽에 가깝습니다.
나름 ‘핫한’ 연구자들의 유명세는 보통 학술학회(정기적으로 모이는 연구자 모임으로, 보통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에 가면 제대로 확인됩니다. 많은 동료 연구자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거든요. 저도 모르게 그들 앞에선 살짝 주눅이 들기도(aka 쭈글이) 합니다. 뭐랄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우라가 느껴진달까요.
그런 유명한 연구자와 함께 우리 제품의 연구개발에 도움이 되는 일을 도모하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면식도 없지만 용기 내어 그들에게 다가갑니다. 비즈니스 출장의 목적이 그런거죠. 다만 언어 소통이 쉽지는 않잖아요. 예전에 어떤 공식적인 미팅 자리에는 아예 영어로 할 말들을 빼곡하게 써간 적도 있었습니다. 학회에서 얘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캐주얼한 만남이라 자연스럽게 하려고 미리 몇 번을 반복해서 외워 둔 인사말을 되뇝니다. 셀럽 연구자가 잠시 가진 빈틈을 타 ‘나는 어디에서 온 누구인데, 너의 연구에 관심이 많다. 너가 발표한 연구가 무척 흥미로웠다. 우리 기회가 되면 좀 더 얘기를 나눠보자’ 정도의 네트워킹을 시도해 봅니다. 우리 회사 이름을 말했을 때, ‘오, 나 알고 있어’ 정도의 반응이 나오면 금상첨화. 명함을 주고받고 얼굴까지 텄으니 나중에 본격적인 이메일을 보낼 때 그래도 좀 편안한 마음이 들죠. ‘나, 기억하지? 우리 만났었잖아…’ 이렇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휴, 이번 출장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듭니다.
사실 제가 그들보다 못한 것은 영어 실력과 연구력 밖에 없는데(?), 당당한 태도로 다가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상하죠? 나는 왜 살짝 주눅든 모습이었을까요?
출처: Vampire’s Kiss
대체 왜 나는 주눅이 든 걸까?! 왜!
그냥 조심스러웠던 것이겠죠. 그 순간엔 회사의 대표 자격이기도 한건데, 학계의 유명 인사에게 결례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이런 어정쩡한 태도는 나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은 다르게 나오는 때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연구자로서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과 달리 멋쩍은 모습, 어깨를 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셀럽 연구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저만의 편협한 생각이 깔려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2 왜 얼굴이 하얗게 되길 바라죠?
아모레퍼시픽에 들어오고 2년 차가 되었을 때 운 좋게도 해외 학술학회를 다녀올 기회를 얻었습니다. The Pan American Society of Pigment Cell Research(PASPCR)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가진 학회였죠. 그땐 미백 연구를 담당하던 꼬꼬마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화이트닝(Whitening)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20년 전만해도 거부감이 적은 용어였습니다.
혈혈단신 미국 신시내티(Cincinnati)에 도착했습니다. 학회의 본격적인 시작은 다음 날이었지만 전날 갈라 디너 행사가 있더라고요. 친화력이 높지 않은 내향형 인간이었지만 긴 여정에 지치고 배까지 고프니 참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같은 장소에서 다른 모임도 열리고 있었나 봅니다. 그걸 모른 채 이것저것 정신없이 집어먹고 있던 차에, 저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말을 걸어왔어요. 서양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스몰톡을 하니까 그런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그: '너 여기 무슨 일이니?'
나: '음.. PASPCR이라는 색소 연구 학회에 참석하려고 왔어. 그런데 왜 물어보는 거야?'
그: '미안한데 여긴 그 모임 장소가 아니야. 아마 저쪽 일거야'
나: '(웁스.. 당황) 이런, 내가 처음이라 헷갈렸나 봐. 그럼 가 볼게'
그: '잠깐만. 색소 연구 모임이라고? 재미있네. 너는 무슨 일을 하는거야?’
나: '(가는 사람은 왜 잡아) 어.. 그러니까, 사람의 피부를 하얗게(아마 whitening이라는 표현을 썼을 겁니다) 만드는 연구를 하지'
그: '대체 왜? 왜 그런 일을 해?'
나: '사람들은 말이야, 자기 피부가 밝고 하얗게 보이고 싶어 해. 특히 동양인들은... '
저의 대답을 끊고 이어진 그의 질문에 더 이상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타고난 피부색 자체가 아름다운데 어째서 다른 피부색을 갖고 싶어 하는 거지?”
'......?!’
실은 소통의 문제였을 겁니다. 우리가 연구를 통해 고객에게 주고 싶은 가치와 베네핏은 그의 말처럼 결코 ‘다른 피부색’은 아니죠. 정확한 뉘앙스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해요. 아무리 언어적 소통의 기술이 뛰어났다고 해도 대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에요.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일의 목적과 이유에 대한 큰 고민 없이 그저 주어진 과업 - 피부를 밝게 하는 연구 - 에 대한 답을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거든요. 회사 생활 2년 차라는 제한적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연구 주제와 의미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낯선 사람이 던진 질문에 대해 ‘생각 없이’ 답했던 과거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야말로 저의 이불킥 모먼트.
출처: 현이씨 작가 / 올레 웹툰 「즐거우리 우리네 인생」 발췌
지금도 많이 창피합니다…
3 목적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본질이죠
브라이트닝(당시엔 미백) 과제를 받았을 때 그건 ‘팀’의 일이자, 선배가 시키는 일이었고, 저에겐 ’회사에서 처음 받은 일‘이라 열심히만 하려고 했어요.
회사 일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아 연구 주제는 누군가에게 받을 수 있지만 그 일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몫은 이제부터 저에게 주어진 과업입니다. 이때 필요한 질문이 바로 ’왜’ 입니다.
고객은 ‘왜’ 얼굴이 밝아지길 바랄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고민하다 보면 연구의 접근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저 피부를 밝게 만드는 바이오 타겟 하나를 찾아내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이죠. 고객들이 가진 고충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는 단계가 먼저 필요합니다. 또한 회사의 사업이 어디서 기회를 찾는지도 함께 들여다봐야 하고요. 그런 과정들을 거쳐 연구의 방향을 정하다 보면 때로는 바이오 타겟이 아니라 전혀 다른 솔루션을 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연구하는 사람이니까 하고 싶은 거 하는 거라고 단정 짓거나, 이미 정해진 방향을 고수하다 보면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쉽지 않습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Start with Wh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 보다, ‘왜’ 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People don’t buy what you do. People buy why you do it.)
출처: 핀터레스트
왜 이 일을 하시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이지? 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이 문장이 지닌 무게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셀럽 연구자 앞에서 위축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낯선 질문에 당황했던 저를 돌아보면,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중심이 흔들렸던 건 아닐까 싶어요. ‘왜 저명한 교수와 일을 하려는지’, ‘고객들은 왜 얼굴이 밝아지기를 바라는지’라는 질문은 연구자로서 정말 해결하고 싶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라는 생각이 듭니다.
셀럽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타인의 낯선 질문 앞에서 당당하게 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국,
"이건 왜 하는 일일까?"라는 질문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연구자에게 필요한 가장 본질적인 태도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OUTRO
그동안 ‘나다움’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지키며 일할 수 있을지 3편의 글을 써봤습니다. 다음은 동료들의 행동을 보면서 느낀 ‘우리다움’과, 이걸 통해 깨닫게 된 나다움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다음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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