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더 오래 더 아름답게 일하는 법 #1
글
한다혜 메이크업프로팀
#INTRO
올해 마흔이 되었습니다. 콘텐츠 기획자라는 한 가지 업을 꽤 오래 해 오면서, 이제야 커리어를 천천히 헤아릴 여유가 생겼습니다. 길게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앞으로도 계속, 나답게 일하고 싶은 마흔의 시선으로 한 분야에서 꾸준히 쌓아 온 시간을 돌아봅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깊고 새로운 아름다움(NEW BEAUTY)을 다섯 번의 칼럼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결국 오래 하면 잘하게 돼.” 듣는 순간 마음이 놓였지만 온전히 믿지는 못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잘하고 싶은 욕심과 잘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사이에서 매일 흔들렸습니다. 새벽까지 잠을 설친 날이 많았죠..
촬영장에 처음 갔을 때 저는 하루 종일 삼각대처럼 서 있었습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나설 자신이 없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소품처럼 구석에서 눈치만 봤습니다. 그저 서 있는 것도 부끄러워서 투명해지고 싶던 순간이었죠. 선배들이 능숙하게 지시하고 스태프들이 역할대로 움직일 때 저는 점점 작아졌습니다. 현장에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물을 삼키곤 했습니다.
24시간 이어진 촬영, 그저 관찰자였던 그 시절의 시점에서
한 번은 늦은 밤까지 이어진 촬영에서 조연출로 따라갔을 때였어요. 심부름으로 스태프들의 간식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왔는데, 간식을 펼쳐 놓는 순간 선배가 제게 말했습니다. “박카스는 왜 안 사왔어? 이런 야간 촬영 때는 박카스가 필수잖아!”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고,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소한 실수가 너무나 크게 느껴져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 벽에 기대어 숨죽여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마음을 다독이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제 마음을 알아챘는지 옆에서 조용히 과자를 내미는 선배가 있었어요. 아무 말 없이 주고받은 그 작은 위로 덕분에 저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그 순간 제가 왜 그토록 부끄럽고 초라했는지,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이 문득 떠올라 마음이 시큰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오랜 시간이 주는 힘은, 무조건 잘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천천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해준다는 걸 알게 되었죠. 촬영장에 흐르는 사소한 공기 하나하나에도 진심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선배가 동료들과 나누는 농담 한마디, 긴장감을 푸는 작은 미소, 서로를 다독이는 눈빛 같은 것들이 사실은 이 일의 가장 큰 힘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어느 순간 저는 제 안의 작은 변화를 발견했어요. 결정하는 게 너무 어렵고 작은 일에도 고민이 많았던 제가, 어느새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고 용기 있게 의견을 내고 있더라고요. 계획이 흔들려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상황을 풀어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아주 작은 선택들이었죠. 더 이상 장식적인 옷을 입지 않고 무거운 짐이 보이면 먼저 손을 뻗었어요. 그 작은 순간들이 저도 모르게 제 안의 가능성을 깨우고 있었던 거죠.
촬영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결정하는 날들
촬영 현장에서는 늘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부 장비를 못 챙겼거나 지연이 생기거나 원하는 앵글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당황하게 되는 것은 일상이죠.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고, 녹화가 시작되려는 스튜디오 주변에서 큰 소음이 나는 공사를 시작한 적도 있습니다. 모두가 당황하는 순간, 저는 침착하고 빠르게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을 결정합니다. 그러면 스태프들이 제 결정을 듣고 곧바로 움직이고, 그날의 촬영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죠. 어느새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구나, 생각하곤 합니다.
디렉터는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해요. 때로는 완벽한 선택을 하려다 오히려 일을 망친 경험도 많아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오래 일한 사람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고 꼭 필요한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요.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알아보는 눈은, 결국 시간이 저에게 남긴 흔적입니다.
긴장감이 팽팽한 촬영장보다 웃음 가득한 촬영장이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고 믿는다
제가 오래 일하면서 얻은 가장 큰 무기는 결국 ‘취향’이었습니다. 남들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 탐색하고 쌓으면서 제 안에 중심이 생기기 시작했죠. 포토그래퍼 실장님이 추천해준 사진가들, 팀 워커(Tim Walker)의 판타지 넘치는 세계부터 아라키 노부요시(Nobuyoshi Araki)의 생동감 넘치는 사진까지, 감각을 자극하는 최신 브랜드 캠페인 필름, 정성일 평론가가 해석해 준 알랭 기로디(Alain Guiraudie), 왕 빙(Wang Bing)의 영화까지—이 모든 것들이 제 시야와 감각을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될 때는 혼자 끙끙대지 마세요. 외롭고 막막한 순간마다 저는 직업인들의 에세이나 인터뷰집을 챙겨 읽었습니다. 김지수 작가의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과 『자존가들』, 박찬욱 감독의 『몽타주』 같은 책들. 그리고 최근엔 일본 만화가 야나세 다카시의 『나는 마흔에도 우왕좌왕했다』를 읽고 있어요. 야나세 다카시는 쉰 살에 처음 『호빵맨』을 그렸지만, 당시엔 혹평을 받아 빛을 보지 못했고, 결국 일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애니메이션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좌절했을까요.
오래 한다는 건 빠르게 성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우왕좌왕하더라도 끝내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래 하면 정말 잘하게 되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답게 일하는 방법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제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흔들림 속에서도 나답게, 아름답게 일하겠다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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