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유튜브 만드는 마음 #4
글
한다혜 메이크업프로팀
#INTRO
작년, 아모레홀에서 열린 Adobe의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인 Firefly 세션을 들었습니다.
AI 기술을 활용해 간단한 프롬프트만으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깔끔하게 누끼를 따고, 잡음이 섞여 있던 오디오를 보정하고, 텍스트 기반으로 타이밍을 맞춰 편집하는 기술들이 시연될 때마다 객석에서 탄성이 나왔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디자인 전공자 동료는 탄식을 하더군요. “내가 대학교 다닐 때는 누끼를 얼마나 깨끗하게 따는지에 따라 학점을 받곤 했는데...”라고요. 우리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치열하게 익혔던 기술들이 점점 더 가볍고 쉬워지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Adobe Firefly의 생성형 AI 기능들
1 저는 이런 흐름을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AI 시대에 살아남는 건 결국 ‘기술자’가 아니라 ‘기획자’, 즉 발상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작 프로그램은 점점 더 직관적이고 쉬워질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겪었던 어려움들은 대부분 해결책이 마련되는 중이죠. 단순히 디렉터의 지시에 따라 오퍼레이팅만 담당했던 테크니션들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 겁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의외로 “편집도 직접 하세요?”입니다. 제작 기간이 촉박하거나 원하는 그림이 분명한데 설명하기 애매할 때는 직접 프리미어(Adobe Premiere Pro)를 다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 담당하는 콘텐츠의 수를 최대로 늘렸기 때문에 시간 소모가 큰 작업은 최대한 적절히 위임하려고 합니다.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시간 사용이 중요하죠. 대신 가편, 종편, 믹싱, 디자인 등 프로젝트의 각 단계에서 직접 마스터링을 담당하도록 프로세스를 설계해 두었고, 저의 컨펌 이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러 바퀴가 동시에 굴러가면서도 효과적인 결과물을 내는 데 집중하는 거죠.
하이엔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든, 미장센과 디테일로 유명한 영화 감독이든, 톱 아이돌 그룹의 프로듀서든, 그들의 성공은 기술자들의 능력을 빌리고 배치하며 정확하게 NG와 OK를 선언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그들의 힘은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이 아니라 최고의 기술자를 알아보고, 협업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있는 거죠.
디렉터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으고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관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Dior and
2 기획자라면 ‘잘 부탁하고 정확히 감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기술 감독에게 원하는 시안을 넘기면서도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의욕을 꺾지 않도록 창작의 영역을 남겨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들에게 자주 질문하고, 모르는 걸 솔직히 고백하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일이 성공적일 때는 함께한 모두에게 공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멘토링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가 가장 많이 전하는 메시지는 ‘기술자가 아닌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10년이 넘도록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끌어 오면서 ‘판 짜기의 기술’을 연마해 왔습니다.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면서도 반복적으로 아웃풋을 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기획의 핵심이고요. 전문성을 키워 오면서 깨달은 중요한 포인트를 후배들을 위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개인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각자의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되고 노출되기 때문에, 더 이상 보편적인 트렌드를 정의하기가 어렵죠. 게다가 저는 트렌드가 가장 빨리 확산되는 숏폼 콘텐츠를 거의 소비하지 않습니다. 피로해서 잘 못 봅니다. 아직도 종이신문을 재미있게 읽고, 비디오 대신에 활자를 사랑하고요. 가장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시와 비평을 늘 곁에 두고 지냅니다. 커리어 내내 잘 팔리는 것, 더 많이 알리는 것을 목표로 일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꿈 꾸는 것은 한없이 무용하고 아름답기만 한 창작이에요. 최신의 것과는 취향이 멀리 떨어져 있죠.
저는 후배들에게 자주 말하곤 합니다. 콘텐츠를 제작한다고 해서 틱톡이나 릴스만 부지런히 들여다보는 것은 잘못된 학습 방식이라고요. 눈앞의 트렌드에만 매몰되면 시야가 좁아지고 기획의 깊이가 얕아지기 마련입니다. 요즘의 것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넓고 깊은 안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죠.
제가 좋아하는 책에서 밑줄 친 구절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작품들에 잠겨 있어야 한다.
최고의 문학 작품을 읽고, 걸작 영화를 보고,
영향력 있는 그림을 가까이에서 감상하고,
유명한 건축물을 찾아가라.
당신의 목표가 패스트푸드를 만드는 것이라 해도,
최고로 신선한 음식에 대한 경험이 있으면
더 맛 좋은 패스트푸드를 만들 수 있다.
내면의 기준을 위대함에 맞추라는 이야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궁극적으로
위대한 작품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더 나은 수많은 선택들을 만들 수 있다.”
—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릭 루빈)
우리가 만들어 내는 콘텐츠의 퀄리티는 결국 내면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안목을 높이고, 미감을 단련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해요.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만든 캠페인,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 걸작 영화,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문학 작품의 깊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최고의 자본과 기술이 투입된 프로젝트에서 어떤 크리에이티브 전략이 사용됐는지, 시인이 쓴 아름다운 문장에서 어떻게 감정이 전달되는지 탐구해 보세요.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안목과 기준을 세워야 비로소 트렌드 그 자체를 창조하는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잘된 것’만 찾아보지 마세요. 성공한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너무 많은 레퍼런스를 모으다 보면 그 안에 갇혀 버리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획자의 축적된 감각으로부터 발현되는 스타일입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연출하고 만들어 가다 보면, 그 결을 좋아해 줄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전에 데이비드 호크니 스타일의 SSG 캠페인이나 빙그레 인스타그램 같은 콘텐츠가 큰 주목을 받았던 걸 기억하실 거예요. 시기마다 특별히 주목받는 콘텐츠들이 툭툭 튀어나오죠. 그런데 그 시점에서 뒤늦게 “우리도 000스타일로 해보자”라고 하면, 그저 누군가의 아류로 끝날 뿐이죠.
저는 익숙하고 멋있어 보이는 것보다는 낯설고 이상한 것에 끌립니다. 비슷하게 따라가는 콘텐츠는 쉽게 소모되고 잊히지만,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은 기억에 남아 생명력을 갖습니다. 물론, 좋은 레퍼런스를 찾다 보면 어떤 것이 마음을 콕 찌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고, 그것을 내 스타일로 재해석해 보세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저는 일을 하다 머리를 환기하고 싶을 때 매거진을 펼치거나 핀터레스트를 들여다봐요. 편하게 둘러보다가 ‘그냥’ 이유 없이 마음에 걸리는 이미지를 핀으로 찍어 저장해 두곤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장한 것들이 나중에 비주얼 기획, 카피 작성, 씬 구성 등 다양한 창작 과정에서 유용하게 쓰입니다. 이처럼 레퍼런스를 찾을 때 너무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나만의 스타일로 흡수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아 보세요. 그것들이 쌓이면 독창적인 기획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레퍼런스는 분석의 대상이 아닌 영감의 출발점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보다 자신만의 방향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기획자에게 더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늘 말합니다. 힘 빼고 편하게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서 기획해 보라고요.
터지는 콘텐츠의 성공에는 ‘운’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콘텐츠가 담기는 플랫폼의 비밀스러운 알고리즘, 그 시기에 갑자기 주목받는 키워드, 그리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힘들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대박 콘텐츠를 분석해 보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미스터리하게 남죠.
저는 대박 콘텐츠보다 오히려 ‘묘하게 망한 콘텐츠’가 더 궁금해요. 황금시간대에 최고의 예능인들을 모아 론칭했는데 금세 폐지된 지상파 프로그램, 매번 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올리던 유튜브 채널에서 눈에 띄게 반응이 없는 콘텐츠 말이죠. “얘는 왜 잘 안 됐지?”라고 질문을 던져 보면 오히려 더 많은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실패의 원인을 고민하다 보면,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명확해지죠. 이것이 바로 Not-to-do list의 재료가 됩니다.
기획할 때 “나는 이건 절대 하지 않겠어”라는 기준을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헤라 유튜브에서 절대 하지 않겠다고 정한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첫째, 메이크업 씬에서 모델을 마네킹처럼 앉아 있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올드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무섭기까지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모델에게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하도록 하고, 질문도 던져서 인터랙션이 살아나게끔 디렉팅합니다.
또한, 우리 제품을 무조건 좋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브랜드들이 “이 제품이 최고예요”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던지지만, 이렇게 하면 신뢰감을 잃기 쉬워요. 대신 저는 출연자들이 제품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면서 그들의 실제 반응과 경험을 보여주도록 유도합니다.
셋째, 출연자에게 대본을 외우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출연자들이 잘 놀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것에 집중합니다. 연출된 느낌보다는 자연스럽고 진솔한 흐름이 콘텐츠의 매력을 극대화시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미리 정하고 기획을 시작하면 기획의 방향이 더욱 선명해지고 결과물도 일관성을 갖게 됩니다. 결국 콘텐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선 일관적인 원칙을 세우고 지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죠.
콘텐츠 기획자는 정해진 소재와 예산 안에서 자신의 감각에 소신을 담아 밀고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서 밀고 나가는 방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들이나 ‘누가 너 이렇다고 욕하던데?’ 이런 말 잘 안 들어요. 독불장군처럼 소통이 어려운 기획자는 문제가 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자주 ‘기획자는 좀 깡이 있어야 돼!’라고 말합니다.
기획자는 매 순간 수많은 옵션 사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하게 되잖아요. 그 과정에서 단편을 보고 주변인이 툭 던지는 말들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특히 그 타인의 의견이 ‘본인의 취향’에 기반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죠.
콘텐츠를 기획할 때, 수많은 의견이 오가며 때로는 상처가 될 만한 말들도 들리기 마련입니다.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다 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이 희석되고 콘텐츠가 밍밍해지죠. 의도도 모호해지고요. 대신에 저는 ‘재밌게 보고 있다’는 사람을 마주치면 ‘왜 좋은지, 어디가 어떻게 웃겼는지’ 구체적으로 파고 듭니다. 개선하려는 노력보다는 잘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해서 매력을 더하는 것이 더 큰 성과를 가져옵니다. 강점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더 키워 나가는 것이 기획자의 효율적인 성장 방식인 거죠.
콘텐츠를 만들면서 약간 지치고 동력이 떨어질 때는 응원의 댓글이나 동료들이 보내 준 메시지들을 캡처해 둔 폴더를 열어 보면 다시 힘이 나더라고요. 스스로의 방향성을 되돌아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기획을 하면서 긍정적인 피드백에 집중하고, 그런 말들을 나침반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결국 가장 큰 동력이 됩니다. 그러니 지지하는 말들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 보자고요!
팬덤을 만드는 콘텐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생산의 지속성’입니다. 오랫동안 이어 가려면, 기획자가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세상에 남기고 싶은 가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접근하고, 자신의 철학을 담아 내느냐가 장기적인 성공 여부를 결정짓습니다. 단순히 겉모습만 화려한 콘텐츠는 금방 소비되고 잊히기 마련이죠.
저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이 ‘어른다움’이라는 갑옷을 벗고,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 마음이 순간적으로 열립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고유한 매력이 드러나면서 그 이야기 속에 기획의 단서가 숨어 있다는 걸 발견하죠. 기획자는 본질적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고, 그 고유성을 콘텐츠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헤라 유튜브를 맡아서 진행할 때, 흔히 말하는 ‘1등 뷰티 유튜버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대신에,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콘텐츠에 담아 내고자 했습니다. 제품을 만든 사람들의 경험을 소재로 토크쇼를 찍고, 특별한 직업인들의 뷰티 라이프를 가벼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 시리즈도 론칭했고요.
기획자의 성향과 관심사를 반영해서 진짜 흥미를 기반으로 기획을 하면 제작 과정이 즐거울 뿐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그 에너지가 전달됩니다. 콘텐츠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기술적 완성도나 화려한 비주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창작자의 진심과 고유한 시각이 전달되기 때문이죠. 팬덤은 이런 진정성에서 출발해 점차적으로 형성됩니다. 그 팬덤이 꾸준히 성장하며 콘텐츠와 브랜드를 지탱하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결국 오래가는 콘텐츠의 핵심은 진정성에 있습니다. 기획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담아 내어 스토리를 풀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콘텐츠의 본질을 만들어 냅니다. 그럴 때만이 정말 사랑받는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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