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따의 시간, 공간, 그리고 사람 - AMORE STORIES
#Creative Story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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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의 시간, 공간, 그리고 사람

 

강유선 크리에이티브전략팀

아리따: 시간

아리따 개발이 처음 논의된 시점은 2004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사명은 아모레퍼시픽이 아닌 ‘태평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부터 ‘태평양’ 전용 서체를 만들기 위한 기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태평양 전용 서체가 ‘아리따 돋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2006년 10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이었습니다. 2012년에는 영문 글꼴인 아리따 산스, 2013년에는 아리따 부리, 2017년에는 중문 글꼴인 아리따 흑체까지 개발되었습니다. 17년의 시간 동안 아리따는 작은 씨앗에서 밑둥이 굵은 나무로 자랐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개발해 온 ‘아리따’는 어떤 글꼴일까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본문용 글꼴을 개발하는 과정에 대해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김과 동시에 모니터에 떠오르는 글자를 보면서 그 뒤에 숨겨진 정성과 수고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거든요.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러한 형태의 글꼴을 본문용 글꼴이라 칭하겠습니다.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는 제목용 글꼴과 달리, 아무 거슬림 없이 매끄럽게 읽히는 본문용 글꼴을 만드는 일은 조금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합니다. 아리따 글꼴 가족 전체 디자인을 총괄한 날개 안상수 선생님은 이를 볍씨의 품종을 개발하는 일에 빗대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항상, 당연하게 먹는 쌀은 모두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서 다양한 품종으로 나뉩니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음료는 우리가 음료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화려한 주석잔에 담긴 음료라면, 우리는 음료를 마시기도 전에 그 잔에 집중하느라 시선을 빼앗기겠지요.

 

 

우리는 기업의 특징을 화려하게 부각해서 보여주는 제목용 글꼴보다는, 누구나 군손질없이 쉽게 쓸 수 있는, 맛있는 쌀이자 맑고 투명한 유리잔인 본문용 글꼴을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리따가 무료 배포 글꼴인 만큼 글자의 화려한 형태를 강조하여 범위를 제한하는 것보다는 가장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글꼴을 만드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글꼴만이 줄 수 있는 차별점을 찾아 글자의 ‘표정’을 만드는 것부터 글꼴 디자인은 시작됩니다. 이미 우리 눈에 익숙한 본문용 글꼴들이 있기에 새로운 본문용 글꼴에 표정을 주는 일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아리따 한글 글꼴의 경우, 옛 한글에서부터 그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한글이 아직 훈민정음이었던 시간으로 되돌아가 ‘곧은 기역’을 발견하고 이를 적용했으며, 한글이 아직 붓으로 쓰이던 때 볼 수 있었던 손의 감각을 글자의 표정에 담았습니다. 중심 생각이 결정된 이후 글자의 높이, 사이, 그리고 낱말 사이를 결정했습니다. 그 뒤에 비례 너비 체계까지 정리하고 난 뒤에야 아주 기본이 되는 한글 2,350자를 파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조판해서 써보고 검수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11,172자의 유니코드를 가진 본문용 글꼴을 디자인하는 일이 거의 마무리됩니다. 디자인을 마친 후에는 끊임없이 출력, 인쇄 테스트를 해보며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육안으로 확인한 후에야 우리가 실제 쓸 수 있는 폰트 파일로 제너레이트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본문용 글꼴을, 한글이 아닌 다른 언어 가족까지 확장하고, 무료 공개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국내 기업은 손에 꼽힐 정도입니다.

 

아리따: 공간

아리따의 개발은 한글 타이포그라피의 역사에 있어서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아리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명조체, 바탕체로 부르던 한글 세리프 글꼴을 ‘부리’로, 고딕체라고 부르던 산세리프 글꼴을 ‘돋움, 민부리’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있었고, 이는 곧 한글 타이포그라피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글꼴을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개발한 사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드뭅니다. 기업용 글꼴은 이벤트로 기획되어 개발 이후 잊혀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오랜 기간 글꼴을 개발하며 업데이트하는 과정까지 거친 글꼴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가치 있는 기록을 정리하는 일이 우리에게도, 또 한글 타이포그라피에 있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리따 글꼴 여정’ 책은 2020년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3년 아리따를 주제로 마침내 아모레성수에서 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제안이 있었지만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못해 표류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전시에 어울리는 제목을 지어주는 것부터 프로젝트는 시작되었습니다.

한글의 첫 이름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리따 역시 한글과 마찬가지로 공익을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목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 금방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말하는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입니다.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는 듣기 좋을 뿐 아니라, 말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신뢰감과 상대방에 대한 편안한 인상까지 줍니다. 말에 표정을 주는 것이 목소리라면, 글의 표정은 목소리가 됩니다. 훈민정음의 정신과 아모레퍼시픽의 목소리인 아리따, 그리고 여기에 우리 기업의 비전을 더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목소리: 아리따’라는 이름을 전시명으로 붙였습니다.

 

 

전시 제목이 결정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리따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형상의 그래픽 모티프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홍보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전시장 레이아웃과 가구가 결정되고, 굿즈를 제작하고, 인터뷰 영상 촬영이 진행되었습니다. 일정이 촉박한 만큼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 전시에 참여한 모두가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책에 전부 담지 못한 아리따의 시청각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아리따 글꼴 구조도를 크게 걸어두고, 입체적인 아크릴 블럭으로 아리따를 만들어, 작게 보았을 때는 알 수 없는 아리따의 특징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또 실제 아리따로 다양한 단어를 쓰고 이를 읽는 남녀노소의 목소리를 담아 영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리따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알아보는 인터뷰 영상으로 전시에 대한 방문객의 이해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전시 공간인 아모레성수에 외국인 고객 비율이 높은 많은 만큼, 한글에 대해 알아가는 공간도 함께 구성했습니다. 한재준 작가의 한글 씨알 블록으로 한글의 구조와 제작 의도를 알 수 있게 하고, 한글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책과 한글 학습 책도 함께 두었습니다. 창문 앞 공간을 윈도우시트로 바꾸어 편안하게 책을 읽으면서 아리따 글꼴을 손으로 따라 써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리따에 대해 소개하는 공간을 지나면 참여 작가들의 작업물이 전시된 공간이 있습니다. 작가들은 모두 아리따 글꼴 개발에 직접 참여한 분들로, 글꼴을 개발한 기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아리따를 좋은 프로젝트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리따의 향기를 자수로 표현한 노은유 작가의 작품부터, 윈도우 데칼로 작업한 구모아 작가, 그리고 인터랙션이 가능한 모션을 넣어 만든 양효정+박유선 작가의 작품, 멀리 영국 캠브리지에서부터 전시를 적극 도와준 류양희 작가님, 그리고 전시장 한가운데서 화려한 분홍색 작품으로 중심을 잡아준 날개 안상수 선생님 작품까지. 모두가 애정을 갖고 작업에 임해 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전시가 오픈되고, 많은 고객분이 전시장을 찾아 주셨습니다. 외국인 고객의 참여 비율이 높았고, 한글 타이포그라피에 관심 있는 학생, 디자이너의 방문도 많았습니다. 아이를 동행한 고객분도 계셨습니다. 문학자판기로 아리따가 적용된 문학 작품을 뽑아 보고, 아리따가 적용된 글꼴 봉투를 받아 보며 즐거워하는 여러 고객분을 보면서 전시가 가진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리따 전시가 오랜만에 만난 ‘쫀쫀한 전시’였다는 참여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우리가 공간 구석구석 들인 정성을 알아봐 준 것 같아 기뻤습니다.

 

아리따: 사람

아리따 안팎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아리따 글꼴 가족의 원형이 되는 아리따 돋움은 딱딱할 수 있는 민부리 글꼴에 손글씨에서 따온 부드러운 손맛을 채워 넣어 만든 글꼴입니다. 온기가 느껴지는 손의 감각은 이후로 개발한 모든 글꼴 가족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용 글꼴이 기업의 이름을 앞세우느라, 또는 다른 많은 이유로 기획자와 디자이너의 이름을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물에는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아리따는 디자인한 사람을 잊지 않고 호명해 왔습니다. 하나의 글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정리해 왔습니다. 이 아카이빙이 있었기에 ‘아리따 글꼴 여정’과 이번 전시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번 아리따 전시에도 호명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시를 지원하고 방향을 잡아 주신 정원님, 오경님. 아직 제목도 없던 기획 단계부터 도움을 주었던 은민님, 지예님, 채린님. 공간을 멋지게 꾸며 준 아라님, 경주님. 최고의 아리따 영상을 만들어 준 영주님, 양양님. 디자인과 전시 운영을 도와준 시아님, 나리님, 상우님, 윤진님, 영훈님. 곁에서 엄마들을 도와준 앙꼬와 우니, 수빈이, 은찬이. 전시에 귀여운 목소리를 보태준 설아, 소안이와 윤한이까지. 이번 전시에 온기를 더해 준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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