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y Road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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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일상, 차를 향유하며 느낀 것

김세미 맥파이앤타이거 대표

20대 후반, 극심한 위장장애를 동반한 번아웃 덕분에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더 잘 하고 싶고,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커져갔던 주니어 시절. 일을 사랑했던 20대의 나에게 성장보다 먼저 찾아왔던 건 몸과 마음의 병이었다. 무기력한 나날들이 이어지던 시기에 차를 마셔보라는 권유와 함께 차 도구를 선물 받았다. 퇴근하고 어둠이 내린 방에서 물을 끓이고 차를 내리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나의 차 생활이 시작됐다. 하루 중 유일하게 고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차를 마시는 날들이 이어져 오늘까지 닿는다. 숨이 벅차거나 스스로를 챙기지 못한 날들에는 찻자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마음이 복잡할 때에는 몸을 움직이고 감각에 집중하는 편을 선택해왔다. 차의 맛과 향에 집중해 보며 잔잔하고 진득한 고요함을 찾아보는 일.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찻잔을 따라 이어지는 정신

 

차를 즐기는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대에 따라서 차를 제다하는 방식도, 우리는 방식도 다채롭다. 찻잎을 푹푹 끓여 마시는 전다법, 말차 가루를 격불하는 점다법, 따뜻한 물에 찻잎을 우려 마시는 포다법까지. 시대와 문화, 외부와의 교류와 국가정책으로 차를 향유하는 계층과 방법은 계속 달라져 왔다. 하지만 차를 바라보는 태도는 한결같았다. 여기에서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차’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전국을 유랑하며 심신을 단련하던 화랑들의 찻잔에, 외국 사절단에게 예를 갖춰 내었던 찻잔에, 다산 정약용과 친구들이 나눠 마시던 찻잔에 무언가 담긴 것이 분명하다. 때로는 외면 받거나 의미가 변색되었다 해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찻잔에 이어지는 정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적인 차’일까. 우리다운 것을 솎아내고 이어갈 것과 덜어낼 것을 찾는 일, 철학은 언제나 선을 긋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한 잔의 차가 되기까지 가장 중요한 건 차의 재배다. 와인의 떼루아*처럼 차나무도 지역의 특성과 자연환경에 따라 함유하는 성분의 비율이 달라진다. 여기에 품종이나 제다 방식, 차를 우리는 물과 온도, 그리고 차 도구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 이 세상에는 수백 수천가지의 차가 존재하게 된다. 차의 재배에 따라 차의 품질이 결정되기에, 우리나라는 기후와 적합한 차와 재배지역을 계속해서 물색하고 또 우리만의 차나무 품종을 개발하며 한국적인 차를 연구하고 있다.

 

 

 

 

그중 제주의 흙, 빛, 물, 바람, 안개는 제주만의 떼루아를 만드는 요소이다. 화산섬 제주는 유난히 돌이 많아 차밭으로 개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컸지만, 화산회토 덕분에 풍부한 유기물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차나무는 많은 강수량이 필요하면서도 배수가 잘되어야 하는 까다로운 식물이다. 자갈이 많은 제주의 땅은 밟으면 푹푹 꺼지는 ‘든땅’이라 작물 재배는 어렵지만 차나무에게는 최고의 환경이었던 것이다. 연평균 14~16도의 온화한 온도와, 바다와 한라산을 곁에 두고 연 평균 1,800mm 이상의 고르면서도 풍부한 강수량을 지닌 곳. 바다와 산에서 물어오는 풍부한 바람과 3~5월의 해무(바다 안개)는 찻잎의 아미노산 함량을 높여 감칠맛과 달콤함을 더한다.

 

 

녹차밭에서 묘목을 살펴보는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선대회장

 

 

제주가 차를 재배할 수 있는 지역이 된 데에는 오설록의 영향이 컸다. 지리산 근처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왕성하던 차밭 대신, 제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차밭을 일구는 일은 요즘의 속도와는 맞지 않는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다. 아무도 차밭을 일구지 않았던 무의 상태인 제주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맹지를 개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자. 돌덩이가 가득한 드넓은 부지를 기술이나 장비 없이 막연하게 바라보는 그 순간. 누군가는 새록새록 올라오는 연둣빛 찻잎을 상상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차를 수확하기 전까지 그 험난한 과정이 떠올랐을 것이다. 꿈과 확신,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긍정과 함께하는 많은 사람의 염원이 모여져야만 만들어지는 차밭. 그 한결같은 마음이 지속되는 일을 우리는 종종 기적이라고 말한다.

 

 

차 한잔이 가진 의미

 

길가의 들풀도 애정을 담아 바라보고 이름 붙여주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면, 오설록이 걸어온 길의 의미도 결국 누군가의 찻자리에 찻잎이 올려지는 순간에 있지 않을까. 우리의 차문화를 고민하고, 개간을 하고, 차나무를 심고 가꾸는 모든 일은 결국 향유의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일상에 차를 더하는 것을 넘어 더 많은 사람에게 차의 여유와 휴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 근래의 차문화는 건강음료를 넘어서 삶에 대한 태도까지 담아내고 있다.

 

 

 

 

“차란 물을 끓이고, 적당히 식히고,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쉼과 사색을 얻고 여유 있게 마시면 된다.”


- 아름다운 집념. 214쪽-

 

 

나는 이 문장에 담긴 오설록의 철학을 사랑한다. 차를 사랑하고, 일상에 차를 더해왔던 사람들에게 사실 다른 무엇보다 공감 가는 한 문장일 것이다. 우리나라 차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면 시대마다 차를 즐기는 계층과 방식, 의미가 조금씩 달라져 왔다. 전통이라는 건 고정되고 불변하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화해 왔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에는 특정 계층 사이에서 누리는 문화였다면, 지금 이 시대의 찻자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깐의 휴식이 담겨있는 시간의 의미로 다가온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형태는 계속 바뀌어 왔지만 끊이지 않고 누군가는 차를 향유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차에는 잔을 넘어 삶에 무언가를 더하는 힘이 있기에 지금까지 사랑받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나를 돌보는 마음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걸 체감하는 요즘이다. 아니, 어쩌면 차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짧고 자극적인 숏폼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던 것만 같다. 일상에 차를 더해보고자 했던 마음으로 오픈한 맥파이앤타이거의 성수티룸은 꽤나 많은 발걸음이 찾아온다.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는 순간에 차를 곁들이는 게 조금도 이질적이지 않은 공간이 된 셈이다.

 

 

ⓒ맥파이앤타이거

 

 

티룸을 찾는 손님들에게 차를 추천하곤 한다. 평소 즐겨마시는 커피나 차의 취향을 묻고, 오늘 같은 날씨에 잘 어울리는 차를 제안하며 대화를 나눈다. “카페인을 줄여보려고요. 요즘엔 오후에 차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라는 말이 더 반갑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내가 꿈꾸던 건강한 삶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떼루아: 포도나무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와인 용어

 

 

 

‘Beauty Road’는 뷰티 문화를 창조해 온 아모레퍼시픽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매 월 하나의 주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칼럼을 통해 아모레퍼시픽의 가치를 색다른 관점으로 만나봅니다

김세미

사진 아모레퍼시픽 / 맥파이앤타이거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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