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삼계탕’ 한정임 사장님을 만나다 - AMORE STORIES
#한강대로100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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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삼계탕’ 한정임 사장님을 만나다

1990년 처음 그 맛을 대대로 이어가다

1990년부터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삼계탕 한 길만 걸어온 김덕찬, 한정임 부부. 불볕이 내리쬐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말복 준비에 한창인 ‘풍년삼계탕’ 한정임 사장님을 아모레 스토리가 만났다.

 

‘풍년삼계탕’ 앞에서 김덕찬, 한정임 사장님 부부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삼계탕집 사장님이 되기까지


1990년 풍년삼계탕을 개업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풍년삼계탕을 열게 된 과정이 궁금해요.

저는 원래 평범한 가정주부였어요. 남편은 공기업에 다니다가 개인적인 사유로 퇴사하고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었고요. 어느 날, 부산에서 삼계탕집을 하던 저희 사촌오빠가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저희 부부에게 삼계탕집 한 번 해보라고 권하시더라고요. 저는 손사래를 쳤죠. 남편은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고 당구장도 꽤 잘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솔깃했나 봐요. 당시엔 실내 흡연이 가능하던 때라 당구장 근무 환경이 열악했거든요. 늘 담배 연기로 자욱했죠. 또, 사촌오빠가 하는 삼계탕집이 부산에서 굉장히 유명한 집이라서 더 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계속 저를 설득하는 통에 결국 해보기로 했죠. 남편과 함께 삼계탕을 배우러 부산에 내려갔어요. 식당은 음식을 해야 하니까 제가 전면에 나서야 했죠. 잘 배울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제가 요리를 좋아하고 눈썰미가 있는 편이라 의외로 빨리 습득할 수 있었어요. 음식을 하는 사람은 나니까 속속들이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왔어요. 그후 개업까지 3개월 정도 걸렸어요. 속전속결로 진행됐죠.

 

장소는 왜 용산으로 정하셨나요?

아는 곳이 용산밖에 없었거든요. 남편은 어릴 때부터 용산에 살았고, 저도 75년도에 결혼하고부터는 쭉 여기에만 살았어요. 남편은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으로 가서 규모 있게 시작해보자고 했는데 저는 조금 겁이 나더라고요. 그런 지역은 세도 비싸고 인건비도 많이 들 텐데, 아무리 검증된 레시피라고 해도 잘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유동인구가 없어도 일단 내가 제일 잘 아는 곳에서 시작해보고 싶었어요. 마침 이 동네에 삼계탕집이 없었어요. 연세가 많은 분들이 많아서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용산에서 딱 3년만 해보고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했네요.

 

당시 용산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요.

당시엔 지금의 전자상가 자리에 큰 청과물 시장이 있었어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교통이 좋다 보니 물류가 왕성했죠. 하지만 동네 자체는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낙후하고 허름했어요. 낡은 판자집들이 즐비한, 그야말로 ‘도심 속 시골’ 같았죠. 시골처럼 동네 사람들끼리 친해서, 가을이 되면 고사떡을 해서 나눠먹고 이웃사촌처럼 지냈어요. 서울에서 용산만큼 정감 있고 인심 좋은 곳도 없었을 거예요. 저는 그래서 용산을 참 좋아해요. 동네가 개발되면서 주택이 있던 자리에 가게가 들어오고, 주민들도 하나둘 떠나면서 그때 살던 분들은 이제 몇 안 남아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참 그립기도 하고 아쉽죠.

 

개업 전의 목표가 있었나요?

그전에는 밖에서 밥을 사 먹는, 그러니까 ‘외식’을 자주 하지 않았어요. 늘 집에서 밥을 해먹었죠. 그래서 가게 열기 전에 2개월 정도 시장조사를 했어요. 아이를 등에 업고 주변에 있는 식당은 모두 찾아가서 음식은 어떤지, 손님은 얼마나 오는지, 인테리어는 어떻게 했는지 살펴봤죠. 그러면서 세운 목표가 ‘하루 30그릇’이었어요. 당시 백반이 1500원 정도 했는데, 삼계탕은 4000원이었어요. 그때도 비싼 음식이었죠. ‘30그릇 팔면 우리 가족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겠다, 하루에 딱 30그릇만 팔자’고 목표를 세웠죠.

 

이름은 왜 ‘풍년삼계탕’이라고 지으셨는지요?

당시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돗자리 펼쳐놓고 점을 보는 분이 있었어요. 제가 지나가다가 재미 삼아서 곧 식당을 차리는데 좋은 이름 있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풍’이라는 글자가 저랑 잘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풍’이 들어간 이름 중에 괜찮은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풍년이 들면 좋잖아요. 찹쌀이 들어가는 삼계탕과도 잘 어울리고요. 그래서 ‘풍년삼계탕’이라고 지었죠.

 

 

장사는 시간을 견디는 일


개업 첫날, 반응은 어땠나요?

첫날 손님이 굉장히 많았어요. 남편이 주변 사무실마다 돌아다니면서 개업 기념품으로 제작한 재떨이를 돌렸거든요. 동네 주민들과 당구장 단골들도 많이 와주셨고요. 손님이 구름처럼 몰렸죠. 장사는 생전 처음인 데다가 손님이 이렇게 많이 올 줄 몰랐으니 너무 당황했어요. 도와주시러 온 사촌오빠, 총출동한 가족들 덕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어요.
초반에는 소위 ‘오픈발’이라고 하잖아요. 손님들이 많이 찾아주셨지만 개업 효과가 얼마 안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찾아주신 손님이 한 사람만 더 데리고 오게 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죠.

 

계속 주부 생활을 하다가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평생 살림만 하던 사람이 장사를 하려니 너무 힘들었어요. 주 7일을 매일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쉬지 않고 일했는데, 딱 한 달 됐을 때 ‘아, 못하겠다’ 싶었어요. 체력도, 정신력도 완전히 바닥 나버린 거죠. 돈이고 뭐고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당시 막내 아이가 두 돌 때였는데,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기다가 나중엔 아예 합가를 했어요.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 보내고 3개월 정도 지나니까 요령이 좀 붙었는지, 전보다는 일하는 게 훨씬 수월해지더라고요.

 

남편과의 분업은 어떻게 하셨나요?

새벽에 닭이 배송되면 남편이 닭기름을 제거하고 전체적으로 손질을 해놔요, 그리고 찹쌀을 담가놓죠. 그러면 제가 닭 속을 넣고 삶아요. 처음에는 합이 잘 안 맞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손이 척척 잘 맞아요.

 

장사는 꾸준히 잘됐나요?

음식의 특성상 늘 여름 한철은 장사가 잘됐어요. 그런데 여름을 보내고 나면 비수기가 너무 긴 거예요. 비수기 때는 직원도 못 쓰고 남편과 둘이서만 일할 때가 많았어요. 어떻게든 유지는 해야 하니까요. 삼계탕 전문점이 많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비수기를 견디기가 힘들어서예요. 어떻게든 비수기를 버텨내며 장사하다 보니 단골이 많이 생기면서 비수기에도 매출이 많이 좋아졌어요. 뭐든 쉽게 얻어지는 건 없는 것 같아요.

 

가게 외형은 개업 초기와 많이 달라졌나요?

개업할 때는 지붕에 기와를 깔아서 한옥 느낌을 냈어요. 나름대로 운치 있고 멋스러웠죠. 간판도 예쁜 네온사인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기와가 하나씩 떨어지더라고요. 간판도 비만 오면 정전이 됐고요. 기와도 걷어내고, 간판도 새로 바꾼 게 지금의 모습이에요. 당시 가게도 참 예뻤는데, 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두지 못해서 너무 아쉬워요.

 

 

풍년삼계탕 현재 모습

 

 

고물가 시대, 삼계탕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유


풍년삼계탕의 베스트셀러 세 가지를 소개해주세요.

1위는 단연 삼계탕, 2위는 들깨삼계탕, 3위는 닭볶음탕이에요.

 

풍년삼계탕의 삼계탕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다른 것보다도 소금이 가장 큰 차별점이에요. 오랫동안 묵힌 소금을 쓰거든요. 가게 옥상에 가면 항아리들이 있는데, 전부 다 소금이 담겨 있어요. 보통은 5~6년 정도 묵은 소금이고, 제일 오래된 소금은 10년이 넘었어요. 천일염을 항아리에 담아놓으면 간수가 빠지는데, 간수를 잘 빼면 소금의 쓴맛이 없어지고 끝 맛이 달아져요. 그 소금을 볶으면 유해 성분은 사라지고 감칠맛이 살아나죠. 소금 자체도 훨씬 단단해지고요. 삼계탕을 끓일 때 그 소금을 쓰면 맛이 확실히 다르죠.
또 삼계탕 국물을 닭발을 진하게 고아서 만들어요. 그러면 더 깊은 맛이 우러나죠. 닭은 꼭 당일에 받은 생닭만 쓰고요. 특별한 무언가를 가미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삼계탕과 소금을 묵히고 있는 항아리들

 

 

2위 들깨 삼계탕과 3위 닭볶음탕도 소개해주세요.

보통 들깨 삼계탕은 국물을 걸쭉하게 만드느라 다른 재료를 섞는 경우도 있는데, 저희는 100% 들깨를 사용해요. 들깨가 워낙 고소하고 맛있으니까 삼계탕도 맛있죠. 좋은 재료를 쓰고, 원재료에 충실하면 맛이 없을 수 없어요.
닭볶음탕은 삼계탕에 쓰이는 진한 육수로 끓여서 진하고 깊은 맛이 나요. 여러 명이 같이 왔을 때, 많이 찾으시죠.

 

 

들깨 삼계탕과 닭볶음탕

 

 

숨은 보석 같은 메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낙지볶음이에요. 삼계탕을 못 드시는 분들도 종종 있거든요. 삼계탕 단일 메뉴였을 땐 단체 손님 중에서 삼계탕 못 드시는 분이 있으면 난감했어요. 다른 가게에서 음식을 사다 드릴 때도 있었죠. 그러다가 삼계탕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한 메뉴를 개발하기로 했어요. 낙지볶음이라면 모두 무난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낙지볶음 잘하는 식당을 이곳저곳 찾아가서 먹어봤는데, 제 입맛에는 대부분 너무 맵더라고요. 매운맛을 줄여 적당히 맵게 만들었어요. ‘너무 내 입맛을 기준으로 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손님들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삼계탕 못 드시는 손님들뿐 아니라 술 드실 때 안주로도 많이 찾으세요.

 

 

숨은 보석같은 메뉴, 낙지볶음

 

 

김치가 맛있다는 후기도 많아요.

김치 맛있다는 말들을 많이 해주세요. 닭을 삶고 나면 생기는 찹쌀 풀을 김치에 버무려서 구수한 맛과 감칠맛이 좋아요. 기호에 맞게 골라 드실 수 있게 깍두기는 익혀서, 배추김치는 겉절이로 내고 있어요. 깍두기는 2~3일에 한 번씩, 겉절이는 매일 담가요. 저녁에 배추를 절여두고 아침에 버무리는 작업을 매일 하고 있죠. 저희는 여태까지 한 번도 김치를 산 적이 없어요. 배추 값이 폭등해서 한 망에 2만 원씩 할 때도 직접 담갔어요. 삼계탕에 나오는 반찬은 김치뿐인데 그게 맛없으면 안 되죠. 김치는 꼭 직접 담가서 맛있게 내드리려고 해요.

 

 

매일 직접 담그는 김치

 

 

기사를 보니, 가격이 제일 많이 오른 음식 1위가 삼계탕이라고 해요.
전국 삼계탕 평균 가격이 17,000원 정도인데, 합리적인 가격을 유지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저희 삼계탕이 15,000원인데, 최대한 이 가격에서 더 올리지 않으려고 해요. 다들 어려운 시기잖아요. 저희는 여태까지 이렇게 장사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서 더 올려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익이 좀 줄어도 손님들이 한 번 더 찾아주시면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복날은 많이 바쁘실 텐데, 어떻게 준비하세요?

복날엔 평소의 3~4배 많은 손님이 찾아주시기 때문에 일단 양을 많이 준비해야 해요. 새벽부터 정신없이 바빠요. 여름 중에서도 한여름, 가장 더운 날 불 앞에서 일해야 하니, 복날이 다가올 때는 무섭기도 해요. 그런데 그 시기를 무사히 보내고 나면 또 괜찮아져요. 매해 그렇게 잘 넘겨 왔으니 이제는 익숙해졌죠.

 

 

30년 넘게 처음 그 맛을 유지하는 비결


장사하시며 가장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1996년 조류독감 때죠. 코로나 때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코로나 때는 단골들이 많이 찾아주셔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거든요. 삼계탕이 보양식이다 보니 포장도 많이 해가셨고요.
조류독감 때는 말도 못 했어요. 첫해가 제일 힘들었죠. 다들 처음 겪는 일이라서, 닭 먹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인식이 차츰 달라졌지만, 첫해엔 정말 심각했어요. ‘이제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죠. 고육지책으로 삼계탕 말고 다른 음식을 개발해 보기로 했어요. 15년 동안 삼계탕 단일 메뉴를 고집했는데, 처음으로 다른 메뉴를 넣은 거죠. 추어탕이랑 메기 매운탕이었는데 정말 다행인 건 반응이 좋았어요. 삼계탕처럼 닭발을 우려서 국물을 냈는데, 손님들이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덕분에 힘든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어요. 상황이 괜찮아지고부터는 추어탕과 매운탕은 더 이상 안 하기로 결정했어요. 충분히 잘 팔리고 있었지만, 우리의 본질인 삼계탕에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힘들 때도 포기하지 않았던 신념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맛이요. 처음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죠. 지금은 아들이 가업을 잇고 있는데, 아들도 그 신념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위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30년 넘게 사업을 해오신 걸 보면
사장님에게 사업가 기질이 숨어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저는 여기서 하루를 보내는 게 너무 재밌어요. 저만의 놀이터라고 할까요?(웃음) 전업주부였을 때는 개인적인 스트레스가 많았거든요. 항상 인상을 쓰고 있었고, 위장 약을 달고 살았죠. 그런데 장사하면서 3년 만에 위장 약을 다 끊었어요. 주변에서는 ‘일하는 게 지겹지도 않냐’고 하는데,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일을 하는 것도, 손님들과 대화하는 것도 재미있기만 해요. 주변을 보면 일 안 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여기저기 아프더라고요. 일이 제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것 같아요.

 

개업은 남편과, 지금은 아드님까지 2대가 함께 일하고 있는데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일단은 부부가 같이 일하면 인건비가 줄어서 좋아요. 함께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부딪힐 때도 많아요. 대개는 ‘단체 손님을 이 방에 모실까, 저 방에 모실까’ 같은 사소한 일들 때문이죠. 그렇게 부딪혀도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대화를 해야 하니까 금방 풀어져요. 부부가 같이 일하는 것의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아들과 함께 일하면서부터는 서로 편의를 봐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주방 일을 저 혼자 할 때는 제가 일을 못하면 가게 문을 닫아야 했거든요. 이제는 아들이 혼자 가게를 운영할 수 있으니 저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겼죠. 제가 취미 활동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데, 원래는 브레이크 타임에 잠깐 문화센터에 다녀오는 정도였거든요. 이제는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조금 더 여유 있게 배울 수 있게 됐어요.

 

어떤 걸 배우세요?

스포츠댄스를 배운 지는 17년 정도 됐고요. 서예랑 캘리그래피도 배웠어요. 저 메뉴판도 제가 쓴 거예요. 페이스페인팅을 배워서 손녀 손에 그림도 그려주고, 누구 생일이면 떡 케이크도 만들어 주고요. 식당 아줌마로만 늙을 순 없으니 이것저것 배우고 있죠.

 

 

한정임 사장님이 직접 쓴 메뉴판

 

 

30년 동안 가게를 오랫동안 운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원동력은 아무래도 단골손님들이죠. 단골들이 꾸준히 찾아주신 덕에 비수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고, 코로나 때도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으니까요. 성격 탓도 큰 것 같아요. 아무리 힘든 날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거든요. 우리 딸이 ‘엄마 힘들다면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냐’고 해요. 근데 자고 나면 말짱하니 어떡해요.(웃음)

 

단골이 많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의식하고 관리하는 건 없는데, 마음속에 항상 ‘감사함’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내 집에 찾아오셔서 맛있게 드시고 가시는 게 너무 감사한 거죠. 그 감사함이 전달되는 게 아닐까 해요. 또 맛이 변하지 않으니 자주 찾아주시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와도 옛날에 먹었던 맛 그대로라서 너무 좋다고 하세요.

 

장사하며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요?

첫째는, 아이들이 무탈하게 건강하게 자라준 거요. 아이들이 잘 자라서 저희가 하던 일을 물려받는다는 게 굉장히 뿌듯해요. 둘째는, 지금까지 손님들이 꾸준히 잊지 않고 찾아주실 때예요. 오늘도 아흔 살 가까운 손님들이 지팡이 짚고 찾아오셨는데 너무 감사하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도리어 이렇게 오래 영업해줘서 감사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옛날에 이 부근에서 근무하셨던 분들, 해외에 나갔다가 십수 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는 분들이 우리 집을 기억해주시고 일부러 찾아주실 때 너무 고맙고 행복해요.

 

 

“제 피부관리의 비결은...”


아모레퍼시픽 직원들도 많이 찾아오나요?

옛날에는 태평양에 미용 사원들이 많았는데 그 분들이 많이 오셨죠. 태평양 제약에 근무하던 분들도 많이 오셨고요. 지금도 아모레 직원들이 많이 오시긴 하는데, 누군지는 잘 몰라요. 사원증 보면 ‘아모레에서 오셨구나’ 하고 아는 거죠. 아모레 직원분들은 하나같이 매너가 좋고 점잖으세요. 늘 깔끔하시고요.

 

사장님에게 아모레퍼시픽은 어떤 의미인가요?

내 피부를 지켜주는 비결?(웃음) 제가 태평양 시절부터 화장품은 아모레밖에 안 써요. 옛날에는 마몽드를 즐겨 썼고, 요즘은 아이오페와 설화수를 써요. 선물할 일이 있으면 꼭 아모레로 하고요. 우리 피부엔 아모레가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저는 태어나서 피부 마사지 같은 건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여름에 불 앞에서 일하면 모공도 커지고 좋지 않은데, 그래도 화장품을 잘 써서 피부 좋다는 소리도 듣는 것 같아요.
아모레퍼시픽은 우리 가게에도 너무 고마운 회사예요. 아모레퍼시픽이 신사옥으로 돌아오면서 용리단길이 형성됐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었죠. 비수기나 주말에도 삼계탕을 많이 찾아주세요. 원래 이 거리는 주말에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다른 지역 상권은 많이 어렵다고 하는데, 이곳은 용리단길 덕에 상대적으로 경기가 괜찮은 편이에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죠.

 

 

풍년삼계탕에서 바라본 아모레퍼시픽

 

 

용산 토박이로서, 아모레퍼시픽 직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신용산의 숨은 명소가 있나요?

제가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찾는 곳이 있어요. 정말 숨은 명소인데요. 국군중앙교회로 쭉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계단이 나와요. 그 계단을 올라가면 정자가 있는 언덕이 있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라 한적하죠. 벤치에 앉아서 바람도 쐬고 새소리도 듣고 가끔은 명상도 해요. 그러면 복잡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요.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을 때, 고민이 있을 때 한 번씩 가보시는 걸 추천해요.

 

 

한정임 사장님이 자주 찾는 용산의 숨은 명소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가족들이 무탈히 건강한 게 가장 큰 행복이죠. 그보다 행복한 게 어디 있겠어요. 두 번째는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일에서 건강한 자극을 받으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제 행복이에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삼계탕집 하실 건가요?

네, 할 거예요. 내가 가장 잘 알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오래 하다 보니 ‘이건 나의 전문 분야’라는 자부심도 생겼고요. 지금 과거로 돌아가면 시행착오도 줄이고 지름길로 올 수 있지 않을까요?

 

1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일을 하고 싶어요. 10년 후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실컷 하고 있으면 좋겠네요.

 

 

풍년삼계탕에서 인터뷰 중인 한정임 사장님

 

 

epilogue
‘가게는 놀이터, 일하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이라는 한정임 사장님에게서 긍정의 에너지가 가득 전해졌다. 1990년 처음 그 맛을 대대로 이어가고 있는 풍년삼계탕이 오래도록 용산을 지키고 있기를 바란다.

 

 

한강대로 100은 아모레퍼시픽 주변 사장님들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위기를 타개한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에디터 신혜원(책식주의)

사진 디자인몽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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