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엄청나게 큰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 카프카 '변신' –
오늘은 소설 속 이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제 삶의 일화를 이야기해 드리려고 합니다.
# 만남, 때로는 조우
보통의 상식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게 되면, 약간의 시선 교환과 악수처럼 가벼운 스킨십으로 상대와 교감을 합니다. 적어도 상대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거나, 휴지를 뽑아 들고 달려들진 않는 것 같습니다. 상대가 다리 여섯인 경우는 제외로 하고 말이죠.
이런 만남이 이루어지면, 여지없이 저희 집 여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살고 있는 집이 천장 높은 복층 구조라서 소리가 2층에서 나는 건지, 1층에서 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좀 있습니다만, 집안의 유일한 남자라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이리저리 열심히 달려갑니다. 대충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으로 가보면, 제 언니보다 목청이 큰 둘째가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죠.
벌레가 나왔다며, 다른 곳으로 도망 가기 전에 어서 잡으라며 난리입니다. 이런 반응은, 나이를 좀 더 먹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 같진 않습니다. 오히려 요구가 구체적일 때가 많은데요. '부피가 좀 큰 거 같으니 휴지를 제법 많이 가져오라'거나, '이건 그냥 휴지로 안될 거 같으니 물 티슈를 뽑아오라'거나, '날개가 있는 거 같은데 전기 모기 채를 들고 오라'거나 말이죠.
그나마 정보를 주고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해주면 좋은데, 밑도 끝도 없이 일단 빨리 와보라고 하면 대략 난감합니다. 하던 일을 어디까지 마치고 달려가야 할 지… 좀 명쾌했음 하는 바람 때문인데요. 이를테면, 현재의 긴박성을 5점만점 기준으로 '매우 긴박, 약간 긴박, 긴박, 덜 긴박, 보통'으로 분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일격필살'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 난이도순(고←저)
뿐만 아니라, '일격필살'을 고려해, 상대의 움직임을 계산한답시고 시간을 지체하거나 하면, 가차 없이 불벼락이 떨어집니다.
"빨리 죽여~~" 뭐 대략 이런 식입니다. 생명 자체의 고결함이나 그에 대한 존중이나 경외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지요. 대체 이 분이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 기르고 있는, 가끔이지만 그래도 제법 자애로운 엄마가 맞는지 낯설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일격필살'에 실패해 벌레가 도주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남자가...'로 시작되는 다채로운 타박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난 왜 남자인가, 엄마는 왜 날 남자로 낳았나'… 뭐 이런 식의 자기 성찰에 빠지기도 합니다.
대체 무엇이 그녀들을 이리도 격정적으로 만들었을까요? 벌레 보고 소리를 지르는 건 생존을 위한 선천적 자기 방어인지, 아님 언제인지 모를 경험에 의한 후천적 학습의 결과인지… 모를 일입니다만,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일일이 응해야 될 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은 명백해졌습니다. 남보다 예민한 첫째는 문지방에 거뭇하게 파진 홈을 보고도 벌레인 줄 알고 격렬한 비명을 지르니, 횟수는 좀더 늘 수 있겠죠. 생각만으로도 무척 피곤해집니다.
#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벌레에 대한 여자들의 저항은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더욱 극렬해 졌습니다. 방충망은 물론이고 외부로 통하는 모든 구멍이란 구멍은 차단하는 등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심지어 창문 모서리에 난 빗물 빠짐 구멍까지 휴지나 솜으로 메우게 되었죠. 소나기가 한창이던 지난 여름에는, 창틀마다 고인 빗물들로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문득, '언제까지 이 벌레들과 적대적 대립의 관계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작고 소박하지만 나름의 생태적 환경을 염원했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기 원했던 '우리가 대체 왜 약간의 소름 돋음과 꺼림직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들을 자꾸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일까'라고 말이죠. 더하여, 이들과의 공생이 불가하다면, 더 이상의 주택적 삶도 지속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무언가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찾아온 것이죠.
해법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의인화를 시작한 것인데요. 대략 서너 종류의 목소리 타입으로 제가 벌레가 되어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양치질 싫어하던 아이가 입안 속 세균들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양치질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거든요. 맥락을 제법 잘 이해하는 큰딸과는 대화의 속도나 내용이 별 문제 없었습니다. 이름이 대충 뭐고, 어디서 왔고, 뭘 하고 있는지만 설명해주면 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 어린 둘째였습니다. 문장을 연결하는 데 능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집중도가 다소 떨어지기 때문인데요. 이름을 묻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런데 넌 왜 여기 있냐고 묻기도 하고, 한 문장에서 다음문장으로 넘어가는데, 수십 분이(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흐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만 외치면서 말이죠. 그걸 다 듣지 않고 무례하게 자리를 뜨거나, 벌레들끼리의 다자간 대화에서 목소리가 바뀌거나 하면 역시나 불같이 화를 냅니다. 방구벌레는 좀더 부드럽고 상냥한 하이 톤이었다며 말이죠.
이런저런 애로사항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제는 아이들과 벌레, 양자간의 공존 분위기가 생겨났고, 무분별한 살생 역시 줄었습니다. 단지 힘 조절이 안 되는 둘째가 가끔 창 밖으로 살려주겠다며, 손가락으로 벌레를 짓이기는 끔찍한 일을 제외하고 말이죠.
# 생태적 감수성이라는 게..
아파트에선 고작 모기나 파리 정도가 취침을 방해하는 약간의 고민거리였지만, 시골의 주택에서 그것은 더 이상 고민의 영역이 아닙니다. 아무리 약을 뿌려도 언제든 또다시 나타나는 벌레들을 바라보며, 혹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는 잡초들의 생육을 경험하게 되면서, 어쩌면 인간은 이것들을 관리할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이 들게 된 것이죠.
언젠가 무더운 여름날, 부질없는 잡초제거의 노동 가운데 신께서 어떤 깨달음을 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벌레들을 통해서 말이죠.
아이를 키우면서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육아(育兒)'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인가 생각하면서 말이죠. 왜냐면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인데요. 내 맘대로 다른 존재를 관리 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게 육아(育兒)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육아(育我)라 부르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요.
눈을 떠야 할 때를 알려주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준비 해주고, 세상과 소통하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리고 우연히 벌레를 만났을 때는 당황하지 말고, 이름을 묻고, 그와 친구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아이와 제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생태적 감수성의 시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부질없는 노동의 종말이겠죠.
# 2화를 마치며..
전자 오락에 빠지기 전까지, 벌레는 어린 시절 저에게도 삶의 화두였습니다. 안에 뭔가 제대로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일정하게 생육 활동을 하고 있는 벌레들은 그야말로 매력적이었죠.
초등학교 때는 사마귀를 키우며, 생물학 꿈나무로서 post파브르를 갈망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적당한 크기의 마당과 사람 둘이 경작하기엔 약간은 넓은 것 같은 텃밭이 있는 집에서 삽니다. 벌레는 무궁무진 하구요.. 요즘은 지렁이가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벌레를 만나면 이름은 묻지 않고 비명을 지릅니다. 생태적 감수성이란 게 사람마다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퇴근길에 혹시 벌레를 만나게 된다면, 말 한번 걸어보심이 어떠실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