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천의 얼굴, 만두 - AMORE STORIES
#서동현 님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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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천의 얼굴, 만두

칼럼니스트서동현 님
이니스프리 TM팀


1. 만둣국, 만두국밥

 햇살이 조금 창백해졌습니다. 아마도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먼발치를 서성이던 겨울이 벌써 모퉁이를 돌았는지, 작은 바람에도 제법 날이 섰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추위가 낯설어 어색하기만 합니다. 가을이 아쉬운 만큼, 봄날이 그리운 만큼, 겨울이 오는 길이 게을렀으면 좋겠습니다.

 토요일 오전, 길을 달려 청천동에 왔습니다. 동네 이름 덕분인지 하늘이 맑고 밝습니다. 간판도 없이 달랑 깃발 하나인데, 옅푸른 하늘에 붉은빛이 희끗희끗합니다. 바람이 흔들면, 다섯 글자가 무심히 손짓하는 것만 같습니다. 대문도 없는 집 안으로는 작은 방 안에 오래된 방석들이 널브러졌습니다. 낡고 못생긴 창틀 사이로 빛이 희미했습니다. 잠시 기다리자, 제멋대로 생긴 탁자들 위로 시커먼 뚝배기가 올라왔습니다.

 사실, 만둣국을 하는 곳들은 많이 있어도 만두국밥을 하는 곳은 흔치 않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만두와 밥이 한 그릇에 담긴 곳은 처음입니다. 뚝배기 안을 보니 밥 위로 만두가 세 개쯤 담겼습니다. 거기에 사골 육수를 붓고, 꾸미를 올리고 파를 얹었습니다. 국물이 제법 슴슴했는데, 제육을 헤집으니 벌겋게 간이 맞아집니다. 제육 고명은 삶은 돼지고기를 고춧가루와 참기름에 무쳐 매콤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북한의 만두국밥, 그중에서도 황해도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숟가락으로 만두를 으깨서 밥과 함께 휘저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가운데 국물이 맛있게 탁해졌습니다. 번듯한 간판도 없이 활짝 열린 대문처럼, 국밥도 푸짐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이렇게 묵직하고 힘이 넘치는 음식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싶었습니다.
  • 인천 청천동 '이북식 손만두국밥'

 우리가 만두를 먹게 된 이유와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초의 기록인 <고려실록>을 보면, 충혜왕 4년(1343년)에 어떤 도둑이 궁궐에서 만두를 훔치다가 잡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무려 600여 년 전부터 먹던 음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오랫동안 수많은 모습과 이름들을 얻고 버리며 이어져온 것이죠. 그중에는 현대에 와서야 만들어진 형식도 있고, 먼 옛날과 비슷한 부분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만두에 육수를 부어 먹는 만둣국은, 비교적 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 특히 즐겨 먹게 된 형태입니다. 중국에도 '수이자오쯔(水餃子, 물만두)'가 있기는 하지만, 그 국물은 잘 마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아마도 우리가 육수로 낸 국물 음식을 워낙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렁탕, 해장국, 순대국밥 등의 '탕반 음식'들을 보면 그런 기질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만둣국은 우리가 만두를 즐기는 가장 친숙한 방식 중의 하나인 것이죠.
  • 좌측부터 장충동 '평양면옥' / 성북동 '하단' / 신길동 '남궁만두'

 최근에도 몇 군데의 만둣국집들을 다녀왔는데, 무척 인상 깊은 곳들이 있었습니다.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비슷했지만, 다양한 맛과 모습들이 서로 다른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먼저 장충동 '평양면옥'의 만둣국은 매우 세련되고 깔끔합니다. 큼직한 만두가 정갈하고 차분하게 펼쳐진 모습이 "만두 꽃"이라 부를 만합니다. 만두의 크기와 양에서도 다른 곳들을 압도합니다. 냉면처럼 맑은 육수는 순하고 부드러워서 그 품격이 남다릅니다. 이곳에서는 만두소를 만들 때 물기를 철저하게 꽉 짜는 것을 유난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만두를 잘라도 국물에 잘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그 고고한 간결함이 참으로 점잖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북동 '하단'의 만둣국은 조금 다릅니다. 그 양이 푸짐하지 않고, 자작한 육수에 만두도 자잘한 편입니다. 다른 평양만두들과 달리 크지 않아 조곤하고 질박한 모습입니다. 그 맛도 담담하고 조용합니다. 잘게 다진 파는 양념이 적은 고기 고명과 잘 어울립니다. 아마도 '평양시'가 아닌 '평안남도 하단리'의 모습이라서 이리 소박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잘 익은 열무김치와 톡 쏘는 깍두기를 곁들이다 보면, 식당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또 신길동 뒷골목에 있는 '남궁만두'는 좀 독특합니다. 길게 빚은 만두 귀를 서로 이어 붙여서 도넛처럼 가운데가 비어 있습니다. 국물은 이틀 끓인 사골 국물을 사용하는데, 국물이 진하고 담백한 것이 어지간한 곰탕보다 낫습니다. 국물에 간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라서 소금을 쳐서 먹는데, 손수 빚은 만두피가 적당히 숙성되어 폭신합니다. 고명도 없고, 파도 거의 없지만 허전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고 무던한 맛이 정답고 따뜻할 뿐입니다. 그 털털한 여유가 소탈한 웃음처럼 정겹습니다.

2. 서리꽃의 후예들

 만두(饅頭)는 한중일 3국 모두 사용하는 단어이지만, 나라마다 그 뜻과 말의 쓰임새가 많이 다릅니다.

 중국에서는 만두(饅頭)를 "만터우"라고 읽는데, 두꺼운 밀가루 반죽을 길게 만든 다음 돌돌 말아 찐 모양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식당의 '화쥐안(花捲, 꽃빵)'이 비슷하지만 꽃빵 쪽이 훨씬 더 반죽이 얇습니다. 속이 아무것도 없는 이 밀가루 떡은 그 맛이 밋밋하지만, 중국인들은 다른 요리들과 함께 주식으로 즐겨 먹습니다.

 일본에서는 만두(饅頭)를 "만쥬(まんじゅう)"라고 읽습니다. 흔히 반죽을 부풀려서 찐 만두를 뜻하는데, 화과자의 한 형태로 발전해 고구마, 밤, 호두 등의 소를 넣고 굽는 과자까지도 "만쥬"라고 부릅니다. 대부분 식감이 퍽퍽해 녹차와 함께 먹기도 하고, 주로 간식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일본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호두과자나 붕어빵도 일종의 "만쥬"인 셈입니다.
  • 중국의 '만터우'

  • 일본의 '만쥬(まんじゅう)'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음식이 있었는데, 이를 "상화(霜花)"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서리 상(霜), 꽃 화(花)이니, "서리 꽃"이라는 멋진 이름입니다. 이 음식은 고려 때 팔관회에도 등장했고, 조선시대 왕실 잔치에서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고려가요에 등장하는 <쌍화점(雙花店)>은 바로 이 상화를 파는 가게였습니다. 간혹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상화를 만들어 대접했다고도 하니, 당시로서는 꽤나 귀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던 모양입니다.

 1809년에 나온 <규합총서(閨閤叢書)>를 보면, 상화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면, 역사 속 상화는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만두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밀가루를 고운 체에 쳐서 고르게 한 다음 삭임(밀기울 죽에 가루 누룩을 넣어 하룻밤 발효시킨 다음 거른 것)으로 반죽하여 부풀린다. 삭임이 없을 때는 막걸리가 대용된다. 삭임으로 반죽한 것이 부풀면 거피 팥소(껍질을 벗겨낸 팥소)를 넣어 둥근 모양을 만들고, 시루에 쪄낸다. 상화를 만들 때는 반죽한 것이나 속을 싼 것을 바람에 쐬지 않아야 몸이 곱게 된다."
– <규합총서> 중 '상화' 관련 내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부터 이어져오던 상화는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비슷한 것이 제주에 남아 있습니다. 보릿가루나 밀가루에 순다리를 넣어 부풀려 솥에서 쪄낸 것인데, "상애떡"이라는 이름에 상화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의 민족생활어 조사에 따르면, 직사각으로 빚은 것을 서귀포 쪽에서는 "상웨떡", 성읍이나 가시 지역에서는 "빗상웨"라고 불렀습니다. 동부로 가면 "낭웨"라고도 했지요. 또 둥그렇게 만들면 "주먹상웨", "동글락빵떡", "보리빵떡"이라고 이름을 달리했습니다. 이것이 발전해 지금의 제주 보리빵으로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이지요.
  • 좌측부터 재현된 '상화' / 제주 '상애떡' / 제주 '보리빵'

 이런 사실들을 볼 때, 상화는 만두보다는 찐빵에 가까운 음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구한말부터 쓰이기 시작했던 이 찐빵이라는 말은, 사실 좀 이상한 단어입니다. 오븐에 굽지도 않았고, 서양의 빵과 달리 팥소가 들어 있으며, 중국 음식점에서 팔던 음식이니까요. "팥소 만두"라고 부르면 될 것을 이렇게 굳이 "찐빵"이라고 한 데는 당시 사람들의 어떤 바람이 담긴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는 아직 빵이 무척 비쌀 때였으니, 귀하고 좋은 것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1971년에는 한 식품 회사에서 일본의 인스턴트식품인 '앙망(錎饅, あんまん)'을 본떠 '호빵'이라는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당시 호빵은 찐빵보다 4배나 비쌌지만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요. 호빵은 그렇게 만둣집 찐빵을 시장에서 밀어내며 그 상화의 후예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아직은 간혹 오래된 만둣집에서 예전의 찐빵을 맛볼 수 있지만,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상화는 찐빵을 거쳐 호빵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백 년을 함께하고 있는 셈입니다.
  • 좌측부터 일본의 '앙망(錎饅/あんまん)' / 횡성군 '안흥 찐빵' / '호빵'


3. 대만두와 편수

 우리에게 익숙한 만두(饅頭)는, 밀가루로 만든 피 속에 고기와 두부, 각종 채소들을 잘게 다져서 넣은 음식입니다. 물에 삶거나 국을 끓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증기로 쪄서 먹곤 했지요. 특히 의주의 '대만두'와 개성의 '편수'가 유명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밀의 생산과 관련이 깊었습니다. 만두를 해 먹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구하기가 쉬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강수량이 많아 봄밀이 적합하지 않았고, 겨울밀은 보리보다 수확시기가 늦어 벼농사에 지장을 주어 기피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밭이 많으며, 초여름 비가 적은 지역에 어울렸습니다. 그런 환경을 갖춘 곳이 바로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이었죠.

 의주의 대만두(大饅頭)는 청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나온 독특한 만두인데, "보만두(褓饅頭)" 혹은 "보찜만두"라고도 불렸습니다. <홍길동전> 의 저자 허균은 음식 품평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대만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 조선 후기의 실학자 한치윤은 <해동역사(海東繹史)>라는 책에서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대신이 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큰 만두의 껍질을 갈랐다.
그 안에는 작은 만두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크기가 호두만 하여 먹기에 아주 좋았다."


  • 보만두(褓饅頭) / <한식대첩 4> 화면 갈무리

 중국인들은 춘절이면 은화인 원보(元寶), 마제은(馬蹄銀)의 모양을 본떠 만두를 빚어 먹곤 했습니다. 이런 모양의 만두를 먹음으로써 새해 돈을 많이 벌자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죠. 음식의 이름뿐만 아니라 모양에도 인간의 욕구가 투영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바람들이 의주에서 대만두를 만들고, 평안도 일대로 퍼져 큼지막한 평양만두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커서 먹기도 불편하고, 만들기도 어려운데 아직까지도 유지되는 것을 보면, 음식은 재료나 맛으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날에 모여 큰 복(福)을 바라는 마음을 만두에 담고자 했던 것이죠.

 이런 대만두와 여러 가지로 비교되는 만두도 있는데, 바로 개성의 '편수(片水)'가 그것입니다. '물 위의 조각'이라는 뜻의 편수는, 설날이 아니라 여름에 먹는 만두입니다. 겨울밀 수확 시기가 7월 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편수는 개성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려한 음식이었습니다. 19세기 말의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나타난 설명을 보면, 아주 많은 재료를 쓰는 매우 복잡한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감으로는 쇠고기, 꿩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모두 쓴다. 미나리, 숙주, 무는 다 삶고 두부와 배추김치는 다지고, 고기도 다진다. 다진 채소와 두부, 닭고기에 파, 생강, 마늘, 고춧가루, 깨소금, 기름을 넣어 간을 맞추어 양념한다."


 들어가는 고기 종류만 네 가지에, 때로는 생굴과 잣도 함께 넣되 숙주와 두부를 합친 양이 전체의 1/3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까다로운 기준까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둥근 모양이 아니라 네모 반듯하게 자르고 귀를 걸어 싸서 피라미드 형태로 만들어야 했으니 무척 번거로웠을 것입니다.
  • 편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런 규칙들을 무시한 채 간소하게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 형태는 비슷했지만, 고기가 없어서 육수 대신 간장만 붓고 끓인 국물에다가 호박, 부추만 속에 넣어서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국물을 차갑게 식힐 여유도 없었으니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기도 했지요. 그래도 크면 점잖지 못하다 하여 한 입 크기를 유지한 것을 보면 개성 사람들의 고집스러운 품위가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4. 을지로 5-9번지

 만두 이야기로 이 글과 한 해를 마무리하기 위해 을지로를 다시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을지로의 '오구반점(五九飯店)'입니다. 알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늘 1층 카운터에 앉아서 굵은 주판알을 만지는 분이 바로 창업자인 왕수발 사장님입니다. 그는 1948년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온 후, 한양대 토목과를 졸업했지만 화교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6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교통반점'을 이어받게 되었죠. 그런데 당시 정부의 화교 자본 세금 인상 문제가 터지자 6개월이나 문을 닫아걸고 싸웠습니다. 그리고는 가게 이름과 큰아들의 이름을 모두 주소지 5-9번지로 바꿔버렸습니다. 재미 삼아 바꾼 것이 아니라, 절대로 떠나지 않고 끝까지 뿌리내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였던 겁니다.

 저는 오구반점에 갈 때마다 포슬하게 튀긴 만두를 먹으며 사장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마치 바짝 구운 후슈르(Khuushuur)를 챙겨서 전장을 향하는 몽골 전사처럼 상상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두를 직접 만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아들의 이름까지 바꾸며 각오를 다지던 젊은 요리사의 뚝심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 군만두 / '오구반점'

 음식은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답은 있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르기에 수평적인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와 서사는 생겨나지만, 인과관계가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실수로부터 시작되어 업적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겐 불안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설렘이 되기도 합니다.

 저 얇은 밀가루 반죽 속을 알지 못하는 채로 먹는다는 점에서, 만두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바꿔온 수많은 얼굴은 우리의 일상을 닮았고, 단단하고 풍요로운 그 속은 우리의 바람처럼 뜨겁습니다. 내년 한 해도 그렇게 매력적인 나날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의 얼굴, 만두를 빚는 을지로 왕 사장님을 떠올리며, 한강대로 음식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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