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주인 없는 왕릉: 선정릉(宣靖陵) 이야기 - AMORE STORIES
#김재석 님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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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주인 없는 왕릉: 선정릉(宣靖陵) 이야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강남구에는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의 지하철역이 많습니다. 우선 2호선에는 선릉역이, 9호선·분당선에는 선정릉역이 있습니다. 노원구를 지나는 6·7호선에도 태릉입구역이 있고, 우이신설선에는 정릉역이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역 이름은 대체로 인근 지역이나 시설의 이름에서 따오는데요.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의 공통점은 바로 ‘조선왕릉’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화에서는 단종과 세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이번 화의 주제는 그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묻힌 곳이자 지하철 역명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강남의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입니다. 선정릉은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쇠락의 시기도 함께 맞이했던,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 그리고 그의 아들 중종(中宗)이 계신 곳이죠.

 그럼 선정릉으로 가보실까요?


강남에 숲이 있다? : 강남구의 허파 선정릉(宣靖陵)

 강남은 고층 빌딩과 화려한 불빛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런 강남 한복판에 뜬금없이 녹지가 있습니다. 바로 5만 평에 이르는 선정릉입니다. 푯말 없이는 이곳이 왕릉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선정릉 입구에서 좌측이 국가의 기반을 세운 9대 임금 성종과 그의 세 번째 계비인 정현왕후의 무덤인 선릉이 있습니다. 정현왕후 능에서 우측으로 산책로를 따라가면 그들의 아들인 11대 임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습니다. 선정릉은 울창한 숲으로 조성되어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곳은 임진왜란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도굴되는 비극적인 사연을 품은 곳이기도 합니다.
  대체로 조선 왕릉은 시내와 떨어진 곳에 있는데, 왜 선정릉은 번화한 강남에 자리했을까요? 선정릉이 조성될 시기에 강남은 수도권 외곽, 즉 경기(京畿) 지역에 속했습니다. 당시의 ‘경기’는 지금의 행정 구역과는 달리 수도 주변 넓은 들과 산으로 구성된 지역을 이르며, 주로 일차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현대에 들어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고 서울의 중심지로 개편되면서, 선정릉은 지금과 같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태조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정합니다. 한양은 한강의 북쪽을 의미하는데요, 풍수지리에서 강의 북쪽을 양(陽)이라고 하고, 그 아래의 지역을 음(陰)이라고 합니다. 묘를 조성하는 곳을 음택이라고 하는데, 한강 이남은 왕릉 조성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유력한 후보지였습니다. 3화에서 소개했던 태종의 헌릉도 한강 이남의 대모산에 있습니다. 성종, 중종 이후로 왕릉이 더 조성되지 않다가, 정조 때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隆陵)이 지금의 화성시에 조성되었고, 정조의 능인 건릉(健陵)도 나중에 같은 곳에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이처럼 한강 이남에 왕릉을 조성하는 것에는 왕권 견제와 비용 문제의 이유로 적지 않은 논란을 빚었습니다. 우선 왕릉 조성은 왕권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앞선 왕의 업적을 기리고 그 모습을 내외부적으로 드러낼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난 4화의 주인공인 세조의 왕릉 조성에 대한 언급을 보더라도, 왕릉을 조성할 때 원칙적으로 소박함과 간소함을 지향해야 했으며,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지나친 왕권 중심의 체제는 나라의 건실함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과도한 토목공사로 인해 나라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이유였습니다.

  또한, 왕릉이 궁궐에서 멀수록 능행 비용이 증가했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당시의 강남은 배를 타고 건너가야 했습니다. 왕의 가마가 배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기에 수많은 배를 엮어 그 위에 나무판자를 얹은 배다리를 만들어야 했으며, 왕의 권위를 보장해주기 위한 많은 인원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능행 시에는 연회와 군사 훈련 등 강무(講武) 활동도 함께 진행됐는데요, 조선 초기 대간들은 능행을 빙자한 왕의 강무를 중지해달라는 상소를 많이 올립니다. 큰 비용으로 민생 지표에 어려움을 끼칠 수 있음을 알리면서 왕권 강화에 진행하려는 국왕들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보냅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인 정조는 왕권 강화의 선전도구로 왕릉을 강 이남에 조성했습니다. 수원 화성을 설치하고 한양의 기능을 일부 이전하여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탈피하고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정조반차도(正祖班次圖)를 보면 화성으로 가는 행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문무백관과 궁중 인원, 병사들이 동원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노량진에서 배다리를 통해 강을 건너고 곳곳에 왕의 별궁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능행이 아니고서는 왕은 그렇게 많은 물자와 인원을 동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일반 백성들은 국왕의 행렬 모습을 보며 국왕의 권위에 대해 탄복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한강 이남에는 사대부 선조의 묘가 많았는데, 왕릉이 건설되면 그 구역에 있던 묘를 전부 이장해야 했습니다. 또한 누구도 그 구역에는 묘를 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오직 국왕만이 능역을 조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조가 화성에 능역을 조성할 때, 많은 사대부가 여러 폐해를 거론하며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선정릉 이후 지금의 강남지역에 왕릉을 많이 만들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선릉과 정릉이 있던 곳이 일본의 침략 루트였기 때문입니다.


왕위와 멀었던 임금, 성종의 즉위와 그의 시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조카인 성종이 태어납니다. 후일 성종이 할아버지(세조)나 삼촌(예종)과 달리 단종에 대한 부채 의식에서 벗어나고, 사림파를 등용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됩니다. 성종은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훗날 덕종으로 추존)와 세조의 공신(계유정난에 참여하고 명나라로부터 세조가 왕으로 인정되도록 설득)이었던 한확의 딸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입니다. 의경세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당시 세자빈이었던 소혜왕후와 두 아들(월산대군, 잘산대군)은 궁중에서 나오며,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지게 됐습니다. 이후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예종은 남이, 강순 등의 신공신 세력을 제거하고 구공신들도 견제하면서 국정을 운영해 나갑니다. 그러나 예종은 즉위 1년 만에 승하합니다. 그가 죽은 후, 성종이 즉위하는데요, 이 과정이 조금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예종이 세자가 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첫 번째 부인이 한명회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맞이한 부인 역시 한명회의 친척인 한백륜의 딸로 안순왕후입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통해 세조를 왕으로 만든 인물이며, 예종과 성종의 장인으로 정권의 의사 결정에 모두 그에게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세조는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에게 혜택을 주면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견제할 만한 권력이 있었던 반면, 한명회 일가의 세력에 힘입어 정권을 얻은 예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종과 한명회로 대표되는 공신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생깁니다. 하지만 예종은 그의 과단성과 세조 이후 강화된 왕권을 통해 공신들의 힘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예종의 계승자는 아들인 제안대군이 되어야 했지만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반대(제안대군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은 잘산대군(성종)으로 넘어갑니다. 잘산대군에게는 월산대군이라는 형이 있었지만 그를 제치고 왕위에 오릅니다. 월산대군이 제외된 이유는 그가 병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월산대군 역시 성종과 비슷한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사실 성종이 왕이 되었던 이유는 그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한명회의 딸이었기에 때문입니다.

 초기의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원상(院相)을 통해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성종이 20살이 되던 해에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뒀고, 비로소 성종의 친정이 시작됩니다. 성종은 사림파를 등용하고 공신 세력을 견제합니다만, 즉위에 도움을 준 공신 세력(훈구파)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합니다.

 성종은 세조부터 시작된 경국대전을 완성했고, 북방 개척지의 방비를 강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데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종의 집권기 동안 정국은 안정되고 문물이 발달했습니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이뤄졌으며, 집권 세력들은 태평성대를 노래했습니다. 성종은 재위 25년이었던 1494년에 창덕궁에서 승하하고 선릉에 묻힙니다.
 이처럼 성종은 많은 업적을 낸 왕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훈구파의 토지 겸병은 해소되지 않았고, 그가 등용한 사림파도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다양한 역량들의 성장을 막았습니다. 중국, 일본, 류큐, 여진과의 사대교린 관계를 통해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없이 문화발전을 이뤘지만, 그만큼 국방력은 지속적으로 약해졌고, 건국 초기부터 진행되던 건설적 논의들은 사라지게 됐습니다. 성종의 시대는 문화 발전의 부분에서는 꽃을 피웠지만, 평안함에서 오는 안락함에 취해 조선 초기의 활력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집권한 연산군은 온갖 패정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조선의 활력을 꺼버립니다.


중종의 등장과 그의 시대 : 드라마 '여인천하'를 생각한다

 2001년에 SBS에서 <여인천하>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꽤 유명세를 치른 이유 중 하나는 중심인물이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천하>의 시작은 성종을 즉위시킨 정희왕후의 이야기부터 입니다. 이야기는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뒷날 인수대비)를 거쳐 명종 때인 문정왕후로 정점을 찍습니다. 드라마 주요 무대가 중종 시대여서 정희왕후나 소혜왕후는 언급만 됩니다. <여인천하>에서는 정현왕후와 경빈, 그리고 문정왕후가 정국을 주도합니다. 당시에는 조선 후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대비들의 활동이 적지 않은 해악을 끼쳤다는 점이 드라마에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성종부터 중종에 이르기까지 여성 정치인들의 역할은 오히려 조선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종은 정희왕후(세조의 비), 소혜왕후(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의 비)를 위해 창경궁(昌慶宮)을 건설합니다.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또한 연산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날 때의 시대적 분위기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이 훈구파와 사림파에 의해 왕권을 제한당한 것에 강한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화를 통해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에 반발해 일어난 사건이 중종반정(中宗反正)입니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성종의 계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중종은 진성대군이라고 불렸는데, 연산군과는 비교적 우애가 깊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모습을 담고 있는 드라마가 있는데, 연산군, 중종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왕후인 단경왕후의 이야기를 픽션화한 <7일의 왕비>입니다.
  연산군을 몰아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중종을 왕위에 올리고 연산군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그들은 활력이 넘치는 조선을 만들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만 강화하려고 합니다. 일례로 연산군에게 협조했던 이들을 기준 없이 공신으로 책봉해 그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공신의 남발을 포함해 퇴색된 적폐 청산 활동은 많은 불만을 야기합니다. 이에 중종은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공신들을 제어하기 위해 조광조를 등용합니다. 조광조는 왕도 정치를 시도했고, 그 방식에 불안을 느끼던 훈구파 대신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결국 남곤 등의 기존 세력들은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뢰가 떨어진 순간을 틈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고 사림파를 숙청합니다.

 중종은 연산군 시기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거듭했지만, 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은 기묘사화로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는 것은 중종의 아들인 명종 말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집니다. 문정왕후 사후 명종은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이황, 이이 같은 사림들이 다시 등용합니다. 그러나 사림들은 기존 세력처럼 붕당을 만들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세력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중종은 왕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소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반정을 일으켰던 신하들이 또 반정으로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정치 권력을 줬으며, 그들을 지속해서 교체했습니다. 중종은 왕의 자리는 지켰으나 관심과 성찰을 통해 나라를 융성하게 만드는 것에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중종은 분명히 노력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묘사화와 삼포왜란을 거치면서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고, 권신들의 횡포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나아가 중종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시대정신을 놓쳤습니다. 교류를 넓히면서 해외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성종이 죽기 직전,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였고, 포르투갈은 바스쿠 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이후 동진해오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선각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 태종 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는 아프리카 등 주요 지역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화의 원정과 해동제국기를 통해 당시 무역 흐름에 대해 조선도 분명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혼란은 발전의 기회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중종은 재위 39년인 1544년 승하합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사본(일본 류코쿠대학 도서관 소장)



주인 없는 왕릉 선정릉 : 임진왜란의 비극

 중종은 승하 후, 두 번째 왕후인 장경왕후의 능역이 있는 고양시 서오릉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왕후인 문정왕후가 그 터가 좋지 않다고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문정왕후는 본인이 죽은 후 중종과 함께 묻히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중종이 묻힌 정릉 아래쪽은 홍수철마다 침수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훗날 문정왕후는 명종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모셔집니다. 문정왕후와 명종의 왕릉은 6호선 태릉입구역 쪽에 있는 태강릉(泰康陵)입니다. 문정왕후 입장에서는 아들이 야속하겠지만, 명종의 입장에서는 당시에 침수가 많이 되는 정릉 구역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모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종이 묻힌 정릉은 조선왕릉 중 태조, 단종과 더불어서 왕 혼자 묻힌 능이 되었습니다.
 중종 사후 50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이후 더 이상 이익을 볼 수 없던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은 조선군을 격파하며 한성을 점령합니다. 선조가 북쪽으로 몽진한 것을 알게 된 왜군은 선정릉의 재궁을 파헤치고 성종과 중종의 시신을 태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선조가 돌아온 후 선왕들의 시신을 찾고자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지금도 선정릉에는 성종과 중종의 시신이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참 분한 일이지요.

 왜란 중 조선은 전시 내각을 구성하여 위기를 극복합니다. 중종 때 이미 삼포왜란을 겪은 조선은 꾸준히 외부 침략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대립으로 대응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더욱이 오랜 기간 동안 누렸던 풍요로움이 가져온 안일함은 민첩한 대응력을 떨어지게 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이순신과 의병 그리고 전시 내각의 수상이었던 유성룡 등의 관료들이 빠른 속도로 대처했기에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훈을 되새기지 못하고 수십 년 뒤 청나라에 침략을 당했고, 이를 이겨내지 못한 조선은 망국의 길로 접어듭니다.


결정의 시대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선정릉은 도심 속에 있는 왕릉으로 우리에게 도시의 번잡함을 잊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동시에 한 국가의 리더인 국왕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모습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종은 사림파를 등용하고 국가 체계를 이룩했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왕입니다. 즉위 과정의 약점으로 훈구대신들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유럽에서는 대항해시대에 나설 때, 조선은 동아시아의 나라들과의 교류했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림파를 육성했으나 왕권과 신권의 애매한 조화를 만들고, 이후 연산군의 폭정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본 역량이 뛰어났던 성종이 더 오래 살고(승하 당시 나이가 38세) 더 과감히 자신의 행동을 실행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중종은 성실한 왕입니다. 그는 아버지인 성종처럼 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을 끝냈고, 반정 공신 책봉의 부당성을 언급한 조광조를 등용해 부패 세력을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기 주도적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즉위하지 못한 중종은 증조할아버지 세조처럼 공신들을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부패한 관리의 증가로 삼포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하게 했으며, 기묘사화 이후 정쟁에 휩싸여 지속적인 혼란을 만들었던 것은 그의 '결정하지 않으려는 성향'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16세기 동아시아 군주들에게 자주 나타났고, 동서양의 발전이 역전되는 결정적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선정릉은 일단 좋습니다. 선릉과 정릉은 조선왕릉 중에서도 접근성이 뛰어나고 곳곳에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역(2호선)에서 선정릉 입구까지 10분 정도 걸어가시면 됩니다. 도심 속에서 여유로움을 즐겨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더불어 그곳에 묻힌 조선 왕들의 '선택'을 생각해보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맞이하는 결정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고민해보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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