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단종과 세조: 왕좌의 게임 - AMORE STORIES
#김재석 님
2019.07.08
30 LIKE
1,135 VIEW
  • 메일 공유
  • https://stories.amorepacific.com/%ec%a0%9c4%ed%99%94-%eb%8b%a8%ec%a2%85%ea%b3%bc-%ec%84%b8%ec%a1%b0-%ec%99%95%ec%a2%8c%ec%9d%98-%ea%b2%8c%ec%9e%84

제4화. 단종과 세조: 왕좌의 게임



이야기를 시작하며 : 조선판 왕좌의 게임

 웨스테로스의 철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가문의 권력투쟁을 그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얼마 전에 최종 마무리되었습니다. 가문 간, 개인 간, 그리고 가족 간 매회 대결하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화의 주인공들은 <왕좌의 게임> 속 인물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단종의 영월 장릉(莊陵)과 세조의 광릉(光陵)입니다. 단종은 폐위되어 죽음을 맞이했으며, 세조는 비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국가의 안정을 위해 노력한 왕입니다. 다만 세조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집권했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에 집중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단종과 세조는 유학의 나라 조선의 임금이었지만 민간에서는 신으로 모시는 특이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을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과거의 기억을 잊고 저승사자로 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과 그 원혼을 만든 사람은 업보를 해소하기 위해 동급의 신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에 기대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거나 복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조카와 삼촌이면서 군신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단종은 주위에서 그를 도와줄 세력이 없었으며, 세조는 신하로 남기에는 역량과 야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조선이 개국한 지 60년도 되지 않았고, 태종이 정변으로 집권한 것을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새로운 창업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서로 접점을 달리면서 세조는 정변을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월 장릉과 광릉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이지만 그곳에 묻힌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과거에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을 알고 고쳐나갈 수 있을 때 빛을 발합니다. 단종은 자기의 의지를 펼치기에 너무나도 세력이 약했고, 세조는 세력을 구축했으나 참된 정치보다는 본인과 측근들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어갔습니다.

 이제 단종과 세조의 왕릉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실까요?


문종의 짧은 치세와 그의 현릉(顯陵)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은 조선의 5대 왕으로 30년간 왕위 후계자로 있었고, 세종이 승하하자 즉위해 4년 정도 짧게 치세했습니다. 문종은 측우기를 발명하고, 신기전, 거북선, 병서, 고려사 편찬 등 다양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세종 후반기 업적은 문종의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문종의 아버지 세종은 형제들과 경쟁 관계 속에서 성장했고, 태종은 세종에게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고 했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극도로 반대했습니다. 태종은 형제 간의 서열, 즉 군신 관계를 엄격하게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형제인 양녕대군을 최대한 배려했고, 항상 실제적으로 혜택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세종은 여러 자녀들에게 정치나 사업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은 아버지를 도와서 각종 편찬 사업을 추진했고, 그의 딸 정의공주는 한글 편찬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종의 자식 사랑은 세조가 권력을 쟁취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종은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가정 면에서 아버지 세종에 비해 취약했습니다. 문종은 세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첫 번째 아내인 세자빈 김씨는 투기와 자질 부족으로 폐빈되었고, 두 번째인 세자빈 봉씨는 동성애로 폐출되었습니다. 세 번째인 현덕왕후 권씨는 후궁으로 들어와서 경혜공주와 단종을 낳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훗날 단종의 후견인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으며, 단종 폐위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보통 조선에서는 어린 왕이 즉위하면 대비들이 정사에 나서 수렴청정하는데, 당시의 단종에게는 대비들이 아예 없었습니다. 다만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려 했지만, 그녀는 대비가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고 세조에게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문종은 2년 정도 재위하다 병이 악화되어 승하합니다. 문종의 왕릉은 제2화에서 언급한 동구릉에 속한 현릉입니다. 현릉은 건원릉 이후 <국조오례의>(조선 왕실의 의례를 규정한 법전)에 의거해 세워진 첫 번째 왕릉입니다. 세종의 영릉이 그 첫째였으나, 영릉이 예종 시기에 이장되어 문종의 현릉이 그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현릉에는 먼저 승하한 현덕왕후가 같이 묻혀 있었으나[합장 능], 세조에 의해 그 왕릉이 파헤쳐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단종의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사형당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때 합장되어 있던 현덕왕후가 평민의 신분으로 격하되어 다른 곳에 묻힙니다. 이후 세조가 승하하고 그의 손자인 중종대에 종묘에 벼락이 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현릉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이장되면서 따로 묻히는데 이로 인해서 현릉은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릅니다. 동원이강릉은 1화에서 말씀드린 조선 왕릉의 형식 가운데 하나로 왕과 왕비의 능이 각각 다른 언덕에 있어 그렇게 불립니다.


단종의 등장과 퇴장 : 희극과 비극의 교차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王邦衍), <청구영언> -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의 이름은 홍위입니다. 단종은 왕위 계승 신분인 원손으로 봉해졌고, 이후 세손, 세자가 되었습니다. 세종은 현덕왕후가 승하하자 앞서 말씀드린 자신의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를 세손의 유모로 삼았습니다. 단종은 조선 시대에 숙종과 더불어 후계자로서 완벽 그 자체에 가까운 왕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사람이었고, 승계도 비교적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천수를 누린데 비해 단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고, 그중에서도 주나라에서 확립한 종법제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종법제는 적자 승계를 원칙으로 합니다. 계유정난에 동의하던 세력조차 세조의 즉위를 두고 논란을 벌인 것은 바로 이 종법제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수양대군(훗날 세조, 이후 세조로 통칭)이 살았던 시절에는 왕위 교체에 대해서 사회적 분위기가 용인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태종이나 아버지 세종처럼 왕위를 승계했던 상황이 존재했고, 그 이전 시대인 고려나 심지어 통일신라 때도 그러한 역사적인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의 아들들이나 현종의 아들들이 순차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조카를 대신해 집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조가 후일 비난 받은 것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했다는 점과 당시 성리학적 관점에서 사대부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단종은 즉위 후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과 함께 정치 활동을 폅니다. 세종 시절에 실시된 의정부서사제를 통해 신하들의 권한들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종 때 만들어진 수령고소금지법을 통해 향촌 단위까지 집권 세력의 권익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 법을 제정한 이유는 고려 왕조 후반 각 지역의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고 지방관들이 구석구석 파견되면서 지역 세력의 반발을 약화시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 개국의 주축인 사대부를 중심으로 기존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는 정책이 실시되었지만 초기와 다르게 세종과 문종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사대부들의 귀족화가 급격히 진행됩니다. 이것은 민본주의라는 개국 이념이 퇴색하고 집권 세력의 권한을 높이면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태종의 왕권 집중화에 따른 피로도가 커지고, 이를 세종 시기에 해소하는 과정에서 고려 시대의 문벌 귀족이 등장하게 된 것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일부 역사학자들 중에는 조선을 고려와의 단절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기존 체제를 이어가는 연속적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초기 조선의 기록은 대체로 세조에 우호적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집권층이 세조 때 등용된 인력의 후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세조가 신하들의 문벌화에 반대해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왕권을 튼튼히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조의 정변은 후대에 올수록 명분론이 강화되면서 박해지고 단종에 후해집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지배 체제가 흔들리며 왕권이 약해지면서 과거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사대부들 사이에서 재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한 때문일 것입니다.

 세조는 권람, 한명회 등을 통해 사병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킵니다. 세조는 자신의 동생이었던 안평대군과 대립하며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결합을 경계했습니다. 당시에 이루어진 황표정사(黃標政事)가 정변의 주원인으로 제기되는데, 이것은 어린 왕을 볼모로 신권이 왕권을 억압하는 구조였다고 세조는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것은 하나의 빌미에 불과했을 것이고 비정상적으로 왕권을 차지하려 했던 세조가 이후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유정난으로 세조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원로 세력과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죽입니다.

 정변에 성공한 세조는 영의정과 병조판서 등 다양한 관직을 겸임했고, 정인지와 신숙주 등의 기존 관료 세력과 함께 왕위 찬탈을 위한 절차를 밟습니다. 계유정난 2년 후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이후 세조는 이에 반발하던 사육신을 죽이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했습니다. 또 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자 사사(賜死)합니다. 이 사건으로 노산군은 다시 서민이 되었고 죽음을 강요당하면서 1457년 영월에서 그 마지막을 끝내게 됩니다.

 세종의 손자로서 촉망받는 왕이 될 수 있었던 단종은 자신의 삼촌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는 조선 시대 최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


청령포(淸泠浦) 설화와 영월 장릉 : 흐르는 강물과 눈물

  단종이 유배된 곳은 강원도 영월입니다. 영월은 지금도 서울에서 차로 2시간가량 가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130km가 넘는 거리인데 조선 시대에는 이보다 더 멀지 않았을까 합니다. 영월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이고 래프팅도 많이 가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사람들이 가기 어려운 곳이었을 겁니다. 청령포 가는 길은 아래 주소로 차량을 이용하시는 것이 빠릅니다. 광주원주고속도로나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시면 접근이 가능합니다.

[청령포 주소] : 강원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번지 등
[영월군청 안내] : 영월 10경 중 제2경 청령포
 그 영월에서도 단종이 있었던 곳이 청령포입니다. 청령포는 지금도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청령포 주변으로 서강(西江)이라고 불리는 강물이 흐르는데 유속이 빨라 그냥 건널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단종은 그곳에 갇혀 지내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앞서 소개한 시조에서 왕방연이라는 사람은 금부도사로서 단종의 죽음에 관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조에서도 보듯이 당시에도 그냥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청령포였을 겁니다.
 청령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자갈로 이루어진 백사장이 나옵니다. 백사장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소나무 숲이 나오고 그 왼쪽으로 기와집이 있습니다. 여기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기와집이 있지만 예전에는 그냥 토방 정도였을 겁니다.
 이 청령포 단종 유배지의 특징 중 하나는 단종의 거소 주변으로 모든 소나무가 절을 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단종을 경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지역의 소나무들도 뒤틀림 현상을 보이지만, 이곳의 소나무들은 매우 특이한 모습입니다. 단종을 신으로 모시는 민속신앙이 있는 만큼 오랜 염원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거소에서 오른쪽을 보면 엄청나게 큰 소나무 하나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곳으로 유배 온 단종의 울음소리를 매일 지켜보았다는 설화가 있는 관음송(觀音松)입니다. 단종이 혼자 외로이 신세를 한탄하며 어린 나이에 울었던 것을 이 나무가 보듬어주었을까요? 보기 드물게 이 나무는 청령포의 중심에서 커다랗게 서 있고, 600년의 세월을 지나 단종의 이야기를 더욱 애틋하게 전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보면 커다란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데, 한양을 바라보면서 정순왕후 송씨 등 두고 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매일 올라갔다고 하는 노산대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을 담아 쌓아 올린 망향탑 등이 남아 있습니다. 청령포는 명승 제40호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단종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 보니 더욱 애잔한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청령포에 얽힌 설화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단종이 여기에 머문 것은 한시적이었습니다. 단종이 처음 왔을 때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배지 관리 문제가 발생해 단종은 영월군 관사로 거소를 옮겼고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단종에 대한 기록은 세조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단종실록에는 수양대군이 세조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단종실록은 세조가 승하한 이후에 편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종은 세조에 의해 폐위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실록을 남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에 단종 즉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명했고 이후 예종 시기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전 왕이었던 단종의 기록을 남기게 해 노산군 일기라는 이름으로 실록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숙종이 정종과 단종을 추증하면서 그 명칭이 노산군 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단종이 죽은 후 그 시신이 아무렇게나 버려졌는데, 영월의 엄흥도라는 사람이 수습해 몰래 매장했습니다. 이후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중종 때 영월 군수였던 박충원이 묘역을 정비했습니다. 선조 때 석물들을 일부 설치해 노산군묘라고 불리었습니다. 숙종 시기에 이르러서야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이후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노산군묘도 장릉이라는 능호가 붙게 되었습니다. 단종의 능은 다른 왕릉에 비해 소박한데, 이것은 단종이 평민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관리가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릉 입구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이 나무는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의 사릉(思陵)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죽어서도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양주시에서 보내온 것을 영월군에서 심은 것입니다.

 주변에 단종의 죽음과 관련한 다양한 시설들이 있는데, 그를 수습한 사람, 그를 위해 순절한 사람들의 것들입니다. 아울러 왕릉에 사당, 정려비, 기적비, 정자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갖추어진 곳은 오직 장릉뿐이라고 합니다.(출처 : 두산백과) 장릉 입구에는 단종과 관련한 단종 역사관이 있는데 한번 둘러보시고 장릉을 가신다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영월 장릉 주소]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월군청 안내] : 영월 장릉


세조의 사정 : 왕이 되기 위한 품격

 세조는 단종의 양위를 통해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기도 했습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를 때까지 모든 악업(惡業)의 끝판 왕이라 불릴 만한 일들을 실행했습니다. 권력의 비정함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단종이 죽은 이후 세조는 자신에게 완벽하게 반기를 들지 않는 한 옥사(獄事)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지지한 공신들의 전횡을 눈감아주는 모습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유입니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다가 후에 수양대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세조가 즉위한 후 신권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부활합니다. 이것은 왕권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고 북방 개척을 위한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세조의 북방 개척은 아버지 세종의 업적에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조선이 북방 개척을 꾸준하게 추진한 이유는 지방 세력의 발호를 막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경영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무신 정권부터 조선 건국까지 수많은 지방 세력이 왕조에 도전했고 실제로 중앙 국가의 역량이 분산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방 개척을 추진했을 겁니다. 경제적으로 효용성이 떨어진 과전법을 수정해 직전법을 실시했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한 서적도 간행했습니다. 또한 국방력 강화 활동과 <경국대전>으로 집대성되는 조선의 제도를 완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조는 조선 시대 국왕 중에서도 국가 기반을 마련하는 여러 업적을 세웠습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수령고소금지법을 일시적으로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세조가 국왕이 되기 위해 당시의 유교적 정치 질서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했고, 측근을 비호한 것이 후대의 세조 평가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례로 세조의 공신 중에 홍윤성이라는 고급 관리가 비리를 다수 저질렀음에도 세조가 그를 공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해주는 모습은 과연 세조가 엄격한 기준이 있는 국정 운영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눈감아주는 것은 세조를 좋게 평가할 수 없게 합니다.

 세조의 정치는 공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신들의 힘을 통해 집권했기에 그들과 잘 협조해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태종처럼 공신들을 제거하기 않을 것이라는 의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세조는 자주 자신을 당 태종에 비유했습니다. 도탄에 빠진 왕실을 구하고 공신들과 함께 새로운 조선을 개국한 왕으로 보이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조는 중요 직책에 관리를 배치하는 데 있어 능력보다는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조회가 끝나면 세조는 매번 연회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신하들을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용비어천가>로 유명한 정인지의 경우 술자리에서 세조를 깔보는 발언으로 정승직을 박탈당하기도 했고, 북방 개척과 외교에 뛰어난 업적을 거둔 신숙주의 경우 팔씨름에서 이기자 세조가 그가 술에 취했는지 확인하고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세조 시기의 인물들은 그 능력은 뛰어났지만 새로운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재산 축적에 더 힘을 쏟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조의 즉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집중되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가 출간되면서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세조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었다면 이 소설을 계기로 세조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으로 바뀝니다. 이후 군사정권 시절 세조에 대한 평가를 좀 더 높이는 식으로 구성되었지만 억울한 죽음이라는 부분에서 단종을 애달프게 생각하고 세조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조는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업적을 세웠고, 임진왜란 전까지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는 점에서 분명 왕의 자격이 있는 인물입니다. 다만 측근들의 비리를 눈감아주고 조선 초기의 제도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선하지 않았던 것은 세조가 과연 훌륭한 왕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국립수목원과 광릉 :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경기도에서 사람들이 몰리는 곳 중의 하나가 아마 국립수목원일 겁니다. 국립수목원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수목원이며, 인근에 세조의 광릉이 위치해 있어 광릉수목원으로도 불립니다. 세조의 광릉이 조성되고 600년간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덕분인지 자연경관이 훌륭합니다. 보통 조선 왕릉은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능림을 조성합니다. 왕릉을 방문하면 숲이 많은데 이 점이 조선 왕릉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국립수목원은 예약을 통해서만 방문할 수 있으니 홈페이지 등에서 사전 예약 등의 절차를 거치시면 됩니다.
 세조는 1468년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합니다. 세조는 왕릉 조성에 대해 유언을 남기는데, 이때 조선 왕릉의 능제가 크게 달라집니다. 이전까지는 왕릉 조성 때 석실을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공사 등에 동원되는 인력이나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조는 이것을 회격(灰隔)으로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회격은 남송의 주희가 쓴 <주자가례>에서 처음 이야기되었는데,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왕의 재궁(관) 넣을 곳을 만들고 둘레에 나무 등으로 외재궁을 설치하고 석회와 가는 모래 그리고 황토를 섞어서 삼물(三物)을 만들어 주위를 채웁니다. 회격은 주변이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는 역할을 하고, 관이나 곽이 나무뿌리나 곤충 등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을 방지합니다.(한국일생의례사전) 회격을 사용하면 석실을 조성하는 것과 비교해 보다 쉽게 만들 수 있고, 오랜 기간 동안 단단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도굴이나 훼손에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된 자료에 따르면 현대에서 사용하는 시멘트보다 견고하다고 합니다. 이후로 조선의 왕부터 일반인까지 회격은 널리 사용되기에 이릅니다.

 광릉은 세조의 간소화 요청에 따라 대부분의 왕릉에서 보이는 신도 등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왕릉과 모습이사뭇 다릅니다. 그리고 광릉은 조성할 때 조선 최초로 동원이강릉의 양식을 취하게 됩니다. 앞서 세조의 형인 문종의 능도 동원이강릉이나 후대에 조성되었기에 광릉이 최초입니다. 광릉은 브이(V) 자 형태의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승리한 자의 왕릉이라서 그럴까요? 또한 배치된 모양이 하트와 비슷합니다. 광릉에는 두 기의 왕릉이 있습니다. 왼쪽이 세조가 묻힌 곳이며, 오른쪽은 정희왕후 윤씨입니다. 정희왕후 윤씨는 결단력이 있는 여성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세조는 정희왕후에게 꼼짝 못하는 애처가였다고 합니다. 정희왕후는 세조가 거사를 망설일 때 손수 갑옷을 입혀주었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는 예종과 성종을 왕위에 올렸고, 그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 무엇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나

 이번 화는 조선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과 관련된 국왕들의 왕릉을 다루었습니다. 왕릉을 살펴보기에 앞서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왕릉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야 그 왕릉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을 도입한 조선에서는 유교적 질서를 굳건히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2화에서 태종 이방원이 태조에게 반발하면서 부자와 군신 관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태종은 문제의 발단을 정도전과 그 일파로 몰았고, 공신 세력과 외척을 제거하게 됩니다. 결국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나가는 것은 어려워졌을 겁니다. 세종은 이와 같은 환경에서 즉위하고 신권과의 조화를 꾀하게 됩니다. 이런 경향들은 갈수록 가속화되고 관료들의 귀족화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문종의 즉위와 짧은 재위 기간은 이 같은 환경에 대한 불만을 키웠을 것입니다. 세조는 이런 불만을 포섭하면서 새로운 개국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을 겁니다. 삼국통일 후 신라나 고려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로 볼 때, 세조의 등장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조선을 건국할 때 삼았던 기본 중심 이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세조의 정변은 지향하던 가치인 종법제에 타격을 주고 당시 조선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었을 겁니다.

 단종은 재위 기간이 짧았고, 세조에 의해 물러난 왕이었기에 조선 후기까지 관심이 낮았습니다. 조선 후기 산림들의 문제 제기로 인해 숙종 때 묘호가 부여되긴 했지만 역사적인 관심도에서 멀어져 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만약 단종이 세조의 도움으로 왕위를 이어갔다면 훌륭한 왕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왕이 정사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는 세조 측의 의견은 사실 이후에 집권하는 국왕들의 면모를 볼 때 맞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조는 귀족화 또는 문벌화가 가져오는 폐단에 대해 고민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다양한 정책을 수립해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세조는 공신전 등을 남발하고 토지 겸병을 가능하게 한 것과 전문가를 양성하지 않고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권력의 정점에 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에는 신하들의 보신주의만 팽배했고 200년 동안 그들만이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날 환경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조의 실책이며, 그 당시에는 평화로웠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역사적 발전을 퇴행시켰을 뿐입니다.

 그리고 세조는 자신이 초반에 내세운 정변의 명분을 보다 강하게 다지며 공신들의 문벌화를 막아야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왕권이 강했지만 그 힘을 권력 유지에만 쓰는 것은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할아버지 태종과 같은 행보를 걸으며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면서 공신을 억제하고 민본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세조도 공신의 폐해를 알고 있었고, 더 오래 살았다면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청령포, 영월 장릉, 국립수목원, 남양주 광릉은 그 안에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누구보다도 처절했지만 죽음 이후의 자취는 더욱 아름답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방문하시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거기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보신다면 더욱 뜻깊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조 이후에 집권한 왕들인 성종과 중종에 대한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왕릉 중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선정릉의 주인공들입니다. 조선에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 바로 앞 시기이기도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 좋아해

    30
  • 추천해

    0
  • 칭찬해

    0
  • 응원해

    0
  • 후속기사 강추

    0
TOP

Follow us:

FB TW 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