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세종, 효종과 그들의 사람: 여주 영녕릉 이야기 - AMORE STORIES
#김재석 님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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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세종, 효종과 그들의 사람: 여주 영녕릉 이야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 위기 극복에 전력투구한 국왕들

 벌써 세 번째로 조선 왕릉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첫 화의 경우 정보 전달 성격이 강했고, 제2화에서는 이야기를 가미하면서 한결 쓰기가 수월했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국왕인 세종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을 이끈 효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세종이 즉위한 때는 조선이 건국된 지 26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고, 이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었으며 왕자의 난을 통해 집권한 태종이 4년간 이중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한 시기였습니다. 이후 태종 시대 강화된 왕권을 배경으로 세종은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한편 북방 영토를 개척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글을 창제해 조선을 발전시킵니다.

 효종은 병자호란 이후 혼란스러웠던 조선을 수습한 왕입니다. 효종은 아버지 인조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청에 굴복해 대다수의 사대부로부터 공격을 받는 형세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했고, 이는 그 아들인 현종 때에 사대부들 간에 예송 논쟁이라는 정치적 투쟁을 벌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 힘들었던 조선을 북벌이라는 기치와 대동법을 통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국강병을 추구함으로써, 양란 이후 조선을 다시 세우는데 일조한 왕이었습니다.

 이번 화에서 이야기할 두 분은 왕이 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했고, 한 분은 초기 왕권을 안정시켜야 하는 과제가, 다른 한 분은 외적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각각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많은 인재들을 모으고 상황을 극복해나갑니다. 세종과 효종은 인재들을 적절히 등용해 자신의 뜻을 펼치려 했습니다. 인재들이 있었기에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이 두 국왕에게 그런 인재들을 찾아내는 눈이 없었다면 재위 기간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두 분만 있어서도 아니되었고, 그 두 분이 없어서도 아니되는 그런 상황이지 않았을까요. 마치 마블의 스탠 리가 많은 히어로들을 탄생시키고 그 히어로들이 다시 어벤져스들을 결성해 지구를 지키듯이 말이지요.

 이번 시간에는 세종과 효종 시기를 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 했던 점과 두 국왕 간의 공통점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세종의 등장과 조선의 성장

 우리에게 제일 인기가 많은 역사 속 인물은 세종대왕입니다. 조선 시대 왕들은 사후에 대왕의 칭호를 받습니다. 이를 1화에서 시호라고 부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세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업적이 많아서 묘호에 관습적으로 대왕을 더 붙입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이 말은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초에 태종의 세자는 이제, 즉 양녕대군입니다. 야사에 따르면 양녕대군은 아버지 태종에 대한 반발심으로 세자에서 물러납니다. 그는 폐세자가 되며 대군 1호가 되었습니다. 이후 아주 자유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양녕대군은 꽤 오래 살아서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집권의 토대를 마련할 때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양녕대군은 방탕한 생활을 지속해, 아버지 태종은 셋째인 충녕대군 이도, 즉 세종대왕을 세자로 만듭니다. 충녕대군은 세자가 되면서 준비된 왕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어느 정도 왕위에 대한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조선 시대 왕의 가족에 대한 명칭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용어들이 간간이 등장할 예정이기 때문에 한 번쯤 알고 넘어가시면 좋겠습니다. 왕의 가족들은 왕과 왕비, 후궁, 세자, 세자빈, 대군, 부부인, 공주, 군, 군부인, 옹주, 부마 등으로 구성됩니다. 후궁은 왕의 왕비가 아닌 부인을, 세자는 왕의 아들, 세자빈은 세자의 부인, 대군은 왕비 소생의 왕자를, 대군의 부인은 부부인, 공주는 왕비 소생의 왕녀를, 군과 옹주는 후궁 소생의 왕자, 왕녀를, 군의 부인은 군부인, 부마는 왕의 사위를 의미합니다. 기타 명칭이 더 있지만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종은 즉위 후 4년간 태종과 권력을 양분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태종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과 관련된 역모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후 태종은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의 가족을 노비로 삼습니다. 세종은 이런 와중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태종은 이미 자신의 처남들을 그렇게 했기에 세종은 태종에게 어떤 의도가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다룬 드라마로는 유동근이 태종을 연기한 <용의 눈물>과, 김상경이 세종으로 출연한 <대왕세종>, 송중기가 젊은 세종, 한석규가 중년의 세종으로 등장한 <뿌리 깊은 나무> 등이 있습니다.
 태종의 외척에 대한 견제 덕분에 세종은 왕권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장인을 제거한 유정현 같은 사람을 중용함으로써 화합의 정치를 펼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2화에서 말씀드렸듯이 유교적 이상주의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백성을 위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라는 올바른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도전은 사대부들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고, 다만 이 사대부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중심축인 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태조는 이런 정도전의 생각에 적극 동의했고, 사병 혁파, 요동 정벌 같은 활동들을 벌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도전의 활동은 현실 정치에서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서 붕괴하게 됩니다. 고려 말의 권문세족들의 횡포를 새로운 토지제도를 통해서 분쇄하고 고려 왕조를 교체하며 모순을 해결했지만, 고려를 해소하는데 동참한 세력들의 생각이 모두 같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도전이 고려 왕조 시절 자신의 신념과 다른 것에는 타협하지 않는 개인적인 성향과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태종은 이런 정도전과 아버지 태조의 정치적 방향성에 반기를 들고 왕권 중심의 조선을 만들게 됩니다.

 태종은 약 4년간 세종과 권력을 양분한 시기에 병권과 외교권을 태종 자신이 가지고 움직입니다. 이처럼 권력이 이중화된 이유는 본인 입장에서 강력한 군주로 보기에는 아직 약한 세종을 보좌하고자 하는 태종의 의지도 있었습니다. 왕조 국가에서는 왕이 승하하지 않는 한 권력을 이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면 역모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태종이 세종에게 권력을 일부 이양한 것은 현재 시점에서 볼 때 태종이 세종에게는 내치 등 소소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을 맡김으로써 태종 스스로 한가하게 지내고 싶었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기간 동안 태종의 강무나 나들이 활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태종은 왕이 되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생활이 본인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태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자 이름이 아닌 이방원이란 본명을 그대로 쓴 왕이기도 합니다.

 태종은 1422년에 먼저 승하한 원경왕후가 묻힌 현재 서울시 내곡동 대모산에 있는 헌릉에 묻혔습니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외척 견제로 원경왕후의 동생들이 귀양을 가거나 자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원경왕후는 죽을 때까지 태종과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태종은 자신이 죽은 뒤에 원경왕후 옆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에는 난간석이 둘러처져 있습니다. 죽어서라도 함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헌릉은 세종의 효심이 반영된 왕릉입니다. 조선 왕릉은 단아한 멋이 있는데, 헌릉은 다른 능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석물들을 배치해 화려한 모습을 뽐냅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승하한 후 반대 세력을 포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인재들을 육성합니다. 북방 개척에 공이 많은 무인 출신의 최윤덕을 정승에 임명하기도 하고,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비 출신의 장영실 같은 인재를 등용해 과학기술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황희와 맹사성 등을 정승으로 임명해 군주제의 함정에서도 벗어나는 모습도 보였으며, 또한 흠결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반대한 박연 같은 이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사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게 했습니다. 세종의 업적은 그의 하반기에 이르러 한글 창제로 정점에 이릅니다.

 그런 세종이 자신의 장지를 선정하게 되는데, 바로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가 묻힌 헌릉 주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왕릉 부지를 선정하면서 논란이 발생합니다. 선정한 부지가 길지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곳에 묻히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세종은 길지나 흉지를 떠나서 부모님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세종의 영릉(英陵) 조성과 이장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 서쪽에 묻힙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영릉입니다. 5년 전에 먼저 승하한 소헌왕후와 같은 능 안에 묻히는데, 조선 최초의 합장 능입니다. 합장 능은 능 안에 쌍실을 만들어 재궁(왕의 관)을 넣을 수 있습니다. 동쪽 방은 소헌왕후가, 서쪽에는 세종이 위치해 있습니다.

 세종은 영릉(英陵)을 만들면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조선 왕릉의 기본 기준을 세웠습니다. 세종은 왕릉을 조성할 때 봉분 안에 재궁을 놓을 석실을 미리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왕이 승하할 때마다 왕릉을 조성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만 미리 만드는데 추가적인 노력이 많이 들어가 영릉 조성에 동원된 인원이 1만 2,000명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돌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동원된 인력을 돌려보내기도 했지만, 국가의 권위를 세워야 하는 왕릉을 만들어야 한다는 관료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영릉은 합장 능으로 조성되어 외부에는 두 개의 혼유석을 놓고, 내부에 두 개의 석실이 존재합니다. 이 두 석실을 서로 이어주고 고정하기 위한 작업들이 필요했습니다. 태종의 헌릉까지 돌에 홈을 파고 서로 맞물리게 하던 방식에서 무쇠 못을 사용해 이전보다 단단하게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석실 안으로 뱀이나 곤충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구리로 만든 그물망을 바닥에 설치했습니다. 영릉에 도입된 것 중에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석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석체는 물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고 땅의 기운이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석체 위에 재궁을 올려 석실을 완성합니다.
 합장릉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소헌왕후가 돌아가신 이후 세종의 왕릉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두 개의 석실을 만들었기에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인력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세종은 애민 정신으로 백성이 고생을 덜하도록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셈이지요.

 세종이 첫 번째 영릉에 묻힌 다음 문종과 단종, 의경세자, 예종의 맏아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세종이 영릉을 조성할 때 최양선이라는 사람이 임금의 장자가 절손할 것이라고 경고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무덤을 옮기려고 합니다. 세조에 이어 즉위한 예종은 여러 의견을 들은 후 현재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로 세종의 영릉을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릉입니다. 조선 왕릉은 기본적으로 풍수지리에 따라 조성되었기에 모두가 명당이지만,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은 건원릉과 더불어서 최고의 명당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영릉을 방문하시면 해시계, 측우기 등 세종과 관련된 물건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재실을 지나면 정자각이 보이고 능이 나타납니다. 다른 왕릉에 비해 영릉은 영역이 광대합니다. 조선의 황금기를 있게 한 왕이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하들과 협업 체제를 갖춘 세종이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세종은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가족사에 있어서는 여러 비극적인 일들이 많았습니다. 장인을 처형해야 했으며, 두 명의 세자빈을 폐위시켜야 했고, 신하들의 권한을 높여주었으나 신권 견제에 대한 빌미를 주어 수양대군(후일 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적절한 견제와 균형, 그리고 향후 미래에 대한 설계 등이 쉽지는 않지만 세종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세종의 영릉에서 조금 위쪽으로 걸어가면 산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효종의 영릉(寧陵)이 나옵니다. 이 길을 '왕의 숲길'이라고 부르는데, 두 임금의 왕릉을 이어주는 길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 아닌가 합니다. 본래 산책로는 아니었는데, 꽤 잘 정리되어 있으며 삼림욕을 하기에도 좋습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한글날에 이곳을 방문해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왕복하는 시간이 족히 30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마실 물을 가지고 가시면 좋을 듯합니다.


효종의 영릉(寧陵)으로 가는 길 : 의지의 왕, 시간과의 싸움

 왕의 숲을 지나면 효종의 영릉이 나옵니다. 왼쪽은 영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재실로 가는 길입니다. 세종의 영릉에서 가로질러 왔기 때문에 바로 영릉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왕릉을 갈 때 순서대로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효종 영릉 관리소로 갔다가 다시 올라왔습니다. 영릉 관리소를 지나서 올라가면 왼쪽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는데, 원래는 연못으로 조성된 곳이라고 합니다. 새롭게 정비하고 있으니 멋진 연못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곧이어 효종의 재실이 나오는데, 조선 왕릉의 재실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되어서 보물(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효종의 영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서 유명세가 좀 적어서 한적한 편입니다. 그렇지만 효종의 재실에 가면 인상 깊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재실에서 첫 번째로 인상적인 것은 바로 회양목입니다. 보통의 회양목은 공원이나 아파트 조경에 많이 쓰이는 작은 나무입니다. 아래처럼 생겼습니다. 많이들 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실에 있는 회양목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던 것과는 좀 달라 보였습니다. 여주에서 자라난 효종의 회양목은 효종이 꿈꾸던 안정적인 나라, 조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무가 큽니다. 다른 곳에 비해서 크게 자라난 이 회양목은 여주 지역의 기후와 지질, 토양 덕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주 지역의 자연환경이 전형적인 한국의 자연환경이라는 점에서 효종 재실의 회양목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효종이 평생 품었던 의지가 이 회양목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재실의 300년 된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45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회양목의 꽃말은 참고 견딘다는 것인데, 효종의 생애를 잘 보여주는 나무가 아닌가 합니다. 재실 가운데는 느티나무가 엄청 크게 자라고 있고, 우뚝 솟은 향나무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감동을 받으실 겁니다. 역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왕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풍경입니다.


효종의 등장과 북벌

 재실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효종의 영릉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옆으로는 세종의 영릉으로 가는 왕의 숲이 나타납니다. 효종은 조선의 제17대 왕으로 북벌로 유명합니다. 효종은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볼모로 가서 8년간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또한 명나라 이자성을 토벌하는 작전에도 같이 참여해 중국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후에 중국에 대한 관점은 소현세자와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자, 인조는 봉림대군(효종의 대군 시절 칭호)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인조와의 불화가 원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있었음에도 인조가 효종에게 왕위를 승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빈이 사약을 받고 역적으로 죽으면서 그 같은 이야기는 더욱 확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양란 이후 조선의 보수성이 강화되던 시점에 일어난 이 사건은 사대부들이 효종의 정통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산림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효종 승하 이후 국장에서 입는 복식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이것이 정치적 투쟁인 '예송 논쟁'으로 표출되게 되었습니다.

 효종은 인조가 승하한 후 북벌에 대한 기치를 내겁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차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북벌을 준비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효종은 청나라가 소수의 군대로 중원을 차지하는 것을 보며 그 의지를 키웠습니다. 그러나 효종이 군대를 양성하고,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산성을 다시 정비하고 제도를 개선해 북벌을 추진한 것이 실제 그 계획을 시행하려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오히려 실제로 효종은 부국강병을 기치로 내세우며 이런 과정에서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명분 확보를 목적으로 북벌을 내세웠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약해진 조선의 국력 또는,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 등을 돌린 사대부를 정치 무대로 끌어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효종은 청나라를 도모해야 한다는 북벌의 기치로 사대부를 상대해야 했을 것입니다.

 인조반정을 통해서 집권한 서인 세력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명 반후금(청)을 중요한 정책 기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이전 정권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과 북인 정권도 엄밀한 기준에서는 친명적 정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북인의 경우 임진왜란 때 전쟁을 직접 치르면서 명나라와 동등하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북인 정권의 주요 인물 중에 정인홍 같은 사람은 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정치 세력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선조 시기에 붕당정치는 명종 조의 훈구파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두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뉩니다.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에 따라 북인과 남인으로 분화되고, 북인은 광해군의 즉위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집니다. 남인의 경우 선조 때 북인의 공격으로 유성룡이 정계에서 물러남으로써 조정에서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인의 경우도 왜란 이후 정계에서 강한 목소리를 내기에는 세력이 너무 적어 인조반정까지는 정권 외 세력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서인은 정치 활동에서 모두 배제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조반정 이전까지의 정치 세력들의 상황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지지 세력을 공고히 하고 강력한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정치 세력을 다양하게 활용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권 강화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견제와 균형을 하지 못한 것은 광해군이 10년을 집권하고도 반정으로 물러났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인조는 서인이 주축이 된 정권이었으나, 남인 이원익을 비롯한 명망가들과 연합 정권을 수립했고, 일부 실무형 북인 세력도 동조했습니다.

 인조 때는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였습니다. 북방에서는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고, 남방에서는 서양 세력들이 동진하고 있었습니다. 인조는 이런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고 조선이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과의 사대 관계 속에서 청과 실리 관계를 취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특히 고려 현종 때와 비교해보면 왜란 이후 조선이 세력 균형자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청은 고려가 상대했던 금나라보다도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건륭제의 서역 정벌로 볼 때 조선이 고려와 같은 역할을 하기는 어려웠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호란 이후 즉위한 효종은 북벌로 기억되지만 인조 시기와는 다르게 조선이 혼란을 극복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아버지 인조의 실책을 효종은 되풀이하지 않았고, 조정에 대해 부정적인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을 중앙 정계로 나오게도 했습니다. 산림은 효종에 대해서 오랑캐에 굴복한 사대부일 뿐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해소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효종은 북벌이란 너무나 강한 어젠다로 인해 양란 이후 혼란했던 조선이 다시금 일어서게 한 공이 묻혀버린 임금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완이라는 무장을 등용해 내부적으로 문치에 치우쳤던 조선이 무(武)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조 때 조선에 표류한 벨테브레이와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하멜 등을 활용해 국방력을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이후 나선정벌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김육이라는 걸출한 재상을 등용해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효종이 지지한 숭명배청(崇明排淸), 복수설치(復讎雪恥)의 신념은 시대정신을 착오하게 만들고 조선 후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효종은 1659년에 머리에 난 종기를 치료하던 중에 출혈로 인해 즉위 10년 만에 승하합니다. 최초에 효종은 건원릉 서쪽에 묻히게 되는데, 효종의 왕릉은 석물이 주저앉고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훼손될 수도 있다고 해 그 아들인 현종 때 세종이 묻힌 영릉 동쪽으로 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세종의 영릉과 더불어서 효종의 영릉은 봉분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왕릉이기도 합니다. 효종의 영릉은 왕릉의 분류 방식으로 보면, 위아래로 능이 위치한 동원상하릉입니다. 위쪽에 위치한 것이 효종의 능침이고 아래쪽에 있는 것이 인선왕후의 것입니다. 참고로 능 구조가 이와 같은 곳은 서울 성북구에 있는 영조의 형인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이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 국왕의 강한 의지와 인재 등용 그리고 조화

 3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3화의 주인공이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세종과 양란 이후 혼란을 수습한 효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언급이 많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만큼 업적이 많은 분이기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효종의 경우도 그 삶이 매우 드라마틱한 분이어서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세종과 효종은 공통점이 많은 왕입니다. 대군으로 있다가 중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무를 중시한 임금이기도 합니다. 또한 혼자 가지 않고 함께 갔으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상과 의지가 높았습니다. 많은 인물들을 등용해 그들과 더불어서 조선의 조세제도를 개편하고 어떻게 하면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고민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마블의 기획자였던 스탠 리는 공상을 통해서 히어로들을 탄생시키고 그들을 활용해 지금의 마블 유니버스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두 분이 계신다면 더 뛰어난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두 분은 왕릉의 위치가 원래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왕들이기도 합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확립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황희, 맹사성, 최윤덕, 장영실, 박연 등을 비롯한 다양한 인재를 고루 등용해서 조선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조선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당시에 만들어진 제도들이 조선 후기까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세종의 업적은 엄청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효종은 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을 정상 국가로 복귀시켰다는 점을 높이 사야 합니다. 청나라에 굴복한 왕권이라는 취약점을 북벌이라는 기치를 통해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 외부에 포진한 산림을 포섭했고, 무장 이완을 등용하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와 하멜 등을 활용해 국방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김육이라는 현실감 있는 정치인을 통해서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만들어 화폐경제의 시초를 열어 조선 후기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도 효종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지만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서 조선 후기의 계급이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점은 세종대왕에 비해 낮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열정과 결단으로 500년 왕조의 기틀을 세웠다는 점에서, 효종은 양란 이후 민심이 이반되고 국가의 역량마저 떨어진 위기의 순간을 반전시켰다는 것에서 높이 살 만합니다. 효종 이후 대동법과 화폐경제의 기반을 세웠기에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이 증가했고, 이를 통해 조선은 조선 전기 수준까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효종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지 못했고 사대부와 경쟁 관계 혹은 수세적 입장에 처해 세종처럼 눈에 띌 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영녕릉은 여주군에 위치합니다. 방문하신다면 내비게이션에서 '영릉'을 입력하시거나, 대중교통으로는 버스나 지하철 경강선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영녕릉 가시는 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로 가셔서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아울러 시간이 되시면 세종대왕 영릉의 원찰(왕릉을 보호하는 기구, 보통 사찰)인 신륵사나, 명성왕후 생가가 옆에 위치하고 있으니 둘러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느덧 저의 이야기도 후반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이야기를 통해서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제 글도 그 의미가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단종과 세조의 왕릉에 대한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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