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그룹 '혜초'들의 현지 생활기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대문은 닫기만 하면 저절로 잠긴다는 사실을 모르던 정착 초기, 서너 발자국 거리에 있는 곳에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는 것이 발단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일요일 저녁 7시경. 열쇠는 고사하고 핸드폰마저 없었던 그 때, 잠겨 버린 문 앞에서 속옷바람이 아닌 것을 감사해 할 정도였죠. 인사 정도의 스페인어만 겨우 할 줄 알던 그 때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경비실로 내려갔지만 그 어느 열쇠기술자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난감해 하고 있던 제게 먼저 다가와 도움을 준 분은 같은 층에 사는 이웃 “호세 아저씨”. 사실 그 아저씨를 며칠 전에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났었습니다. 반가워하며 상당히 자연스러운 영어로 자신은 중국의 큰 통신회사에서 일했었고 동양에 관심이 많다며 인사했지만 왠지 부담스러워 슬슬 피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저씨는 기꺼이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열쇠기술자를 섭외해 주고, 부인과 딸이 있는 자기 집에서 열쇠기술자가 올 때까지 약 2시간 이상을 머물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그날 3살 된 딸이 심한 감기를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뻘쭘하게 경비실 앞에 서 있던 제가 안쓰러워 보였나 봅니다. 아저씨 부인도 저를 너무 반가워했고, 3년간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다며 한국인을 너무 좋아하고 김치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열쇠를 고치는 동안에도 곁을 지켜주던 아저씨… 무려 한화 10만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고 열쇠를 새것으로 교체하고서야 제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호세 아저씨 가족과 저는 절친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생활하면서 필요한 크고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미리암 아줌마의 생일 잔치에도 불러 주었습니다. 그들이 있어 가슴이 따뜻합니다.
운동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그들의 미용행태도 가까이에서 살펴보자는 심산으로 덜컥 헬스장에 1달 회원등록을 했습니다. 열심히 인사도 하고 운동은 했지만 생각보다 개인주의가 강한 칠레 사람들은 쉽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태보와 요가반에 시간 맞춰 들어가서 운동하면서 또 열심히 아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수업이 시작되는 바람에 먼저 온 회원님과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정말 짧은 스페인어였고, 언니 역시 정말 짧은 영어를 구사했지만 서로 사진을 보여주며 금세 친해졌고 연락처를 주고 받았습니다.
버스로 20시간 거리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와 오빠가 집에 왔다고 저를 초대해 같이 저녁 식사하며 2시간 넘게 대화도 하고 (이 때쯤엔 제가 좀 더 스페인어를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제가 답례로 만들어간 비빔 국수를 얼굴이 빨갛게 되시면서도 연신 맛있다며 드셔주셨죠. 이렇게 또 한명의 절친이 생겼습니다.
매년 9월 18일은 칠레의 독립기념일입니다. 일주일 가까이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을 가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함께 공원에 마련된 임시 공연장에서 로데오 경기를 구경하거나 전통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또한 학교에서는 그 즈음하여 발표회를 갖기도 하구요. 학급마다 전통 춤인 “꾸에까”를 연습해서 학부모들 앞에 보이고 함께 즐기는 것이지요. 저도 현지 분의 자제 분이 다니는 ‘켄트학교’에 초대받아 구경을 갔었는데, 칠레 와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학생들의 풋풋한 전통 춤을 잠시 영상으로 보실까요?
독립기념일 주간에는 공원에 공연장과 먹을 것을 파는 장이 함께 열립니다. 잘 사는 동네가 더 볼 것도 많다는 말에 동료들이 열심히 검색해서 “비따꾸라”의 공원을 찾아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시간마다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거의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그 축제에서 로데오도 보고, 꼬치구이도 사먹었습니다.
눈이 오지는 않지만 난방 시설이 잘 갖춰있지 않아 뼛속까지 시린 겨울이 어느덧 지나고 (칠레는 7, 8월이 겨울이고, 12, 1월이 여름입니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다다랐습니다. 친하게 알고 지내던 몇몇 가족이 “마이포”라는 곳으로 나들이를 가자고 제안을 해왔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양평이나 춘천 정도로 가자는 거였지요. 흔쾌히 그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정말로 맛있는 “아사도(Asado, 바비큐)”를 맛보는 것은 물론 함께 보물찾기도 하고, 산과 강 구경도 실컷 했습니다. (흙탕물이라 물놀이를 할 수 없던 것이 너무 아쉬었습니다.) 칠레의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부족한 저의 사진 실력으로 그 아름다움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칠레는 하루에 4끼를 먹습니다. 보통 아침 7시경에 아침을 먹고, 점심을 2시에 먹습니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 약 6시경 “온세(Once)”라고 해서 빵과 차를 마시는 일종의 티 타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은 밤 10시경 먹지요. 정말 현지인들과 함께 있으니 하루 종일 먹게 되더라구요. 신나게 먹으며 자연을 벗삼아 근심 없이 즐겁게 사는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 보였습니다.
언어를 조금 하게 되면서 그들의 문화를 더 이해해서인지 혼자 오해하는 실수는 좀 줄어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약속도 잘 지키지 않고, 와인만 좋아하고, 경제는 성장했지만 어떻게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줄 모르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이만큼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것이 이방인인 제 눈에서, 제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며 낙천적인 그들의 소박한 모습을 지금은 선입견 없이 대합니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던 제 절친들처럼 말입니다. 제가 그들을 친구로 기억하듯 이들에게도 제가 지구 반대편의 친구로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현업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파견을 허락해 주셨던 현업 팀장님과 팀원들, 어릴 적 꿈틀거리던 꿈이 되살아 났다던 제 말을 믿고 스페인어를 하나도 못하는 저를 파견해 주신 혜초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거대한 미(美)의 바다에 미약한 저희가 일으킨 최초(最初)의 물결은 작지만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파도와 강력한 해류가 되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며, 감히 2014년 혜초 지역전문가를 대표해서 다시 한번 관계자 여러분과 지금까지 혜초의 이야기를 함께 해 주신 여러 사우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좋아해
5추천해
0칭찬해
0응원해
0후속기사 강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