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우리나라 장업계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시기이자 유통 질서가 혼란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전통적인 유통 구조에서 탈피해 제3의 유통 경로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때 떠오른 것이 방문판매 제도였지요. 미국, 일본 등 방문판매가 성행하는 나라의 사례를 연구해 내부 검토를 거친 후, 주요 유통 경로로 방문판매 제도를 육성하기로 했습니다.
방문판매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많은 요소가 결합되어야 하는데, 그중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제품과 조직, 그리고 인력이었습니다. 특히 방문판매 전용 브랜드와 제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아모레퍼시픽은, 이미 보유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시설과 자체 연구 기술을 뛰어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일본 시세이도와 기술을 제휴해 그 성과를 방문판매 전용 브랜드 개발에 활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신기술까지 습득해 방문판매 전용 브랜드를 새로 개발한 아모레퍼시픽은 전 사원을 대상으로 브랜드 이름을 공모했습니다. 10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연구실 연구원과 출장소 직원이 응모한 작품이 공동 당선되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아모레'였습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라는 가사는 1959년 제작된 이탈리아 영화 <형사>에 삽입된 노래 <시노 메 모로(Sinno Me Moro)>의 첫 구절이었습니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이 노래도 크게 유행했는데, 1960년대 초반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사람들이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 하고 흥얼거릴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지요.
'내 사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모레. 이 단어에는 당대 대중들의 기호와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화장품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는 단어이지요. 아모레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판매 전용 모(母) 브랜드로 격상했고, 나아가 회사의 대표적 이미지로 자리를 굳혀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아모레 방문판매원을 모집하는 광고
방문판매 활동 중인 아모레 방문판매원과 미용사원
방문판매용 브랜드 개발을 마친 아모레퍼시픽은 본격적으로 판매망 구축에 나섰습니다. 우선 전국을 행정구역에 따라 바둑판처럼 세분하고, 구역마다 특약점을 설치해갔습니다. 이렇게 개설된 특약점에는 대개 20~30명의 판매원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판매원 한 사람은 대략 200~300가구를 담당해 영업하도록 했습니다.
점포망 조직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특약점과 영업소는 빠른 속도로 수가 늘어났습니다. 1964년 9월 부평 지역에 1호점이 들어선 특약점은 1965년에 96개, 1966년에 118개로 늘어났습니다. 그 뒤로도 해마다 증가를 거듭해 방문판매 전성기였던 1980년에는 특약점과 영업소를 합친 숫자가 664개, 판매원은 1만 6,571명에 이르렀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방문판매 제도의 정착을 위해 판매 종사자들을 모집해 교육과 훈련에 힘을 쏟았지만, 초기에는 판매원들을 모집하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화장품의 특성 때문에 여성 판매원이 특히 필요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직 보수적 사회의식이 깊게 박혀 있어서 여성이 일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만연했지요.
이러한 가운데 아모레퍼시픽은 전쟁미망인들을 주목했습니다. 여성으로서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전쟁미망인들은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선지원도 해주고 제품 지식과 미용법 등을 교육하며 참여를 유도한 결과, 방문판매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습니다.
당시 방문판매원의 가정 방문을 그리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아모레 방문판매원들이 '저예요. 아모레 왔어요'라고 하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아모레 아줌마'로 불리던 판매원들이 사회적 여론을 바꿔나간 것이지요.
방문판매라는 새로운 유통 혁명을 일으킨 아모레 대리점
1
1. 1980년대 아모레 방문판매원 모습
2
2. 방문판매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 1960년대 미용사원
3
3. 사내보 <아모레 뉴스>
화장품은 매년 유행에 맞춰 제품이 바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방문판매원들도 제품과 화장법을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아모레퍼시픽은 방문판매원을 위한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했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침교실' 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전국의 특약점에서 실시하는 이 교육에서 판매원들에게 화장법, 제품 지식, 판매 요령 등을 전수했습니다. 또한 매년 우수 판매원과 모범 특약점장을 가려서 시상함으로써 이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다른 판매원들에게는 자극이 되도록 했습니다.
당시 아모레퍼시픽 방문판매원들은 전용 제품을 정찰 가격에 정해진 구역에서만 판매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는데요. 이들의 방문판매가 얼마나 치밀하게 운용되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블록도'와 '고객 카드'입니다.
블록도는 한 판매원이 자기 담당 구역 안에 있는 모든 가구를 도면에 표시해 번호를 붙인 일종의 지도였습니다. 고객 카드는 해당 가구의 여성 인구, 거래 여부, 제품 구매 내역을 수집해 기록한 것인데요. 전국의 모든 가구와 그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이 자료는 국가 정보기관에서 간첩 색출에 이용하자고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훗날에는 선거 운동을 하는 사람이 빌려달라고 사정할 정도였지요. 블록도와 고객 카드는 아모레퍼시픽이 방문판매에 쏟은 땀과 열정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방문판매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다양한 지원도 잊지 않았습니다. 1963년 7월에 국내 최초로 미용사원 제도를 방문판매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요. 방문판매원들이 고객의 집에 방문할 때 미용사원과 동행해 화장법과 피부 관리법 등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7명으로 출발한 미용사원은 1970년대 말에 2,500명이 넘을 정도로 수가 늘었습니다.
미용사원 외에 응원단도 있었습니다. 1965년 9월 창간한 사내보 <아모레 뉴스>가 이들을 든든히 지원했는데요. 모범 특약점과 우수 판매원의 활동 사례, 구체적인 판매 요령 등을 게재해 판매 종사자들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신문, 라디오 등의 채널을 통해 아모레 화장품 선전 광고를 활발히 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대중적이면서도 믿을 수 있는 이미지로 점차 다가갔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의 방문판매는 우리나라 장업계에 유통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방문판매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우리나라 여성들의 경제활동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으며, 특히 일자리를 통해 전쟁미망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실현했습니다. 방문판매를 통해 아모레는 우리나라 화장품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방문판매원들과 함께 아모레퍼시픽은 장업계 부동의 1위로 도약해 세계를 항해하는 글로벌 기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