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세계를 향해 새 꿈을 펼치다 - AMORE STORIES
#AP History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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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세계를 향해 새 꿈을 펼치다


  • 용산시대의 막을 연 한강로 사옥

 1956년 8월,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지금의 세계본사가 있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로 본사와 공장을 옮겼습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부산에서 후암동으로 복귀한 지 2년여 만에 공장과 숙소가 비좁아졌기 때문입니다. 새로 옮긴 용산 사업장은 후암동 사업장보다 다섯 배 정도 큰 규모로, 직원 수도 14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현대식 마케팅의 시발점이었던 화성사

 아모레퍼시픽은 사업장 이전과 함께 빠르게 성장한 외형만큼 내실을 다지는 데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생산 설비는 반자동화를 거쳐 빠르게 자동화 단계로 넘어갔고, 동시에 원료의 국산화까지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현대화는 생산 부문을 넘어 유통 경로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1956년 미용 재료상 '화성사'를 설립하며 독자적이고 세분된 유통 경로를 개척했습니다. 당시 미용 재료상의 주 거래처인 미용 학교와 이발소, 미용실은 일종의 '여론 주도층' 이었는데요. 고객들이 직접 화장품이나 미용용품을 사서 바르기도 하지만, 업소에서 새로운 제품을 경험해보거나 미용 업소 운영자의 말에 따라 소비 행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간파한 아모레퍼시픽은 화성사를 통해 미용 업계 고객들에게 재료 구매의 편의를 제공하고, 도매상을 거치지 않는 적정 마진을 보장하면서 제품을 공급했습니다. 그렇게 화성사를 중심으로 아모레퍼시픽 제품의 우수성이 소비자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화성사의 설립은 적극적인 시장 침투 전략 사례로, 이후 장업계에서 전개한 현대식 마케팅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초대 연구원장 구용섭 님(왼쪽)과 에어스푼기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연구실이 된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연구실에서는 쉬지 않고 제품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연구실장이었던 구용섭 님은 직접 유럽으로 건너가 선진 기술과 화장품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습득했습니다. 그곳에서 얻은 정보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아모레퍼시픽은 첨단 설비들을 차근차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요. 화장품 설비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입자가 작고 부드러운 가루를 제조하는 제분기'로 명성이 높았던 에어스푼(Air Spoon)이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무게 4톤, 높이 12m 의 거대한 에어스푼을 용산 공장의 지하실에서 지상 3층에 걸쳐 설치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장품 선진국으로 알려진 일본은 물론 아시아 어느 나라에도 없던 최신 기계를 아모레퍼시픽이 보유하게 된 것입니다.

 에어스푼을 갖춘 아모레퍼시픽은 'ABC분백분', '코티분', '리도분' 등을 차례로 제조했습니다. 분백분은 분말 입자가 얼마나 미세한가에 따라 품질 수준이 결정되었으므로, 이들 제품의 품질은 단연 최고로 통했습니다. 당시 유럽과 우리나라 화장품 제조 기술 사이에는 상당한 수준 차가 있었지만, 아모레퍼시픽은 프랑스 화장품 기업인 코티와의 기술 제휴와 최신 설비 도입으로 우리나라 화장품 기술이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코티와의 기술 제휴로 만든 코티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모조품과 유사품이 등장해 극성을 부리기도 했는데요. 유사품들은 포장, 품질 등 모든 면에서 아모레퍼시픽의 제품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그로 인해 회사가 입은 타격은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제품을 혁신하고 유사품 제조 업체에 강력하게 법적으로 대응하는 등 더욱 꿋꿋하게 사업을 이어나갔습니다.

  • 유럽 장업계 시찰 길에 오른 장원 서성환 님

  • 프랑스 그라스 지방의 향료 공장 방문

 프랑스 코티와의 기술 제휴가 끼친 영향은 실로 컸습니다. 1960년 7월 6일,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은 코티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방문길에 올랐습니다.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만, 그때만 해도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서성환 님은 첫 해외여행이자 장업계 최초의 해외 시찰을 앞두고 설렘과 기쁨도 느꼈지만, 그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와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긴장과 책임감이 더 컸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서성환 님은 사흘 동안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 코티의 공장을 둘러보며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규모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 공정을 자동화한 현대식 시설, 즐비하게 늘어선 수십 개의 원료 저장 탱크 등 세계 일류 화장품 기업의 면면을 보면서 머릿속에 새겼습니다. 그것은 아모레퍼시픽이 앞으로 펼쳐갈 청사진이자 가까운 미래에 현실로 만들 하나의 지침서였습니다.

 서성환 님은 파리에서 정중한 예우를 받으며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코티 공장 시찰뿐만 아니라 시의회 부의장의 초대로 파리 시의회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명예시민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파리의 명물로 알려진 리도쇼를 관람하고, 꽃과 허브가 가득한 세계적인 향료 도시 그라스도 찾았습니다.

 해외 시찰에서 경험한 것과 그곳에서 얻은 다양한 아이디어는 이후 아모레퍼시픽의 역사 속에서 하나하나 현실로 꽃피었습니다. 리도쇼를 보며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브랜드 '리도'의 힌트를 얻었고,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의 꿈을 키웠으며, 그라스 방문은 식물에의 향수를 일깨워 갖가지 식물을 재배하는 농원과 녹차 사업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모레퍼시픽은 프랑스 해외 시찰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세계 무대에서 펼칠 비전을 분명히 다졌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 프랑스 방문 중 파리 명예시민증을 받는 장원 서성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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