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거친 땅 위에 열매를 틔운 혁신의 땀방울 - AMORE STORIES
#AP History
2019.04.30
1 LIKE
449 VIEW
  • 메일 공유
  • https://stories.amorepacific.com/3%ed%99%94-%ea%b1%b0%ec%b9%9c-%eb%95%85-%ec%9c%84%ec%97%90-%ec%97%b4%eb%a7%a4%eb%a5%bc-%ed%8b%94%ec%9a%b4-%ed%98%81%ec%8b%a0%ec%9d%98-%eb%95%80

3화. 거친 땅 위에 열매를 틔운 혁신의 땀방울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었던 전쟁의 포화가 잦아들고 1953년 7월, 드디어 유엔군 대표와 북한 인민군 대표가 휴전협정서에 서명했습니다. 이는 전쟁의 끝이 아닌 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기점으로 전쟁의 혼란도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에서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키며 성장의 토대를 다졌던 아모레퍼시픽 (당시 태평양)도 서울로의 귀환을 준비했습니다. 1954년 1월에 돌아온 서울. 다시 둥지를 튼 곳은 전쟁 전에 머물던 회현동이 아닌 후암동의 새 사업장이었습니다. 후암동 사업장은 회현동 사업장보다 열 배가량 규모가 큰 3층 건물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자 직원들이 함께 머무는 기숙사, 그리고 살림집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 1

    1. 서울로 돌아온 뒤 새로 마련한 후암동 사업장(2005년 모습)

  • 2

    2. 후암동 시절 한 가족처럼 지내던 직원들과 함께한 야유회

    3

    3. 후암동 사업장에서 작업하는 직원들

 전후 상황이라 모든 사람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에 파묻혀 살아갔지만, 이때에도 아모레퍼시픽은 주문이 밀려들어와 직원들은 물론 창업자의 가족까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래도 생산량이 부족하자 도매상들은 직원들의 밤참을 준비하면서까지 생산을 독촉하기도 했습니다. 찜통처럼 더운 작업장에서 피로와 싸우며 일해야 했지만, 모두가 의욕이 가득했습니다. 고생스럽긴 해도 그만큼 보람과 자부심도 넘쳤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ABC 포마드, ABC 바니싱 크림 등 아모레퍼시픽 제품은 생산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덕분에 기업 환경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품질 향상. 그것만이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좌우하는 명제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장품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아모레퍼시픽의 위상을 지키고 한 걸음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기술 개발과 품질 향상이 필수 과제였습니다.

 문제는 기술 단계였습니다. 이제까지는 과학보다는 경험으로 터득한 기술로 시장을 지배해왔지만 더는 아니었습니다. 명확한 이론과 계량적인 데이터,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이 필요한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은 기술력 격차를 극복하는 일이야말로 회사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을 깨닫고 오랜 궁리 끝에 연구실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온 지 불과 반년 만인 1954년 여름, 연구실 개설에 착수했습니다.

 연구실을 이끌어갈 인재를 찾아보던 서성환 님은 당시 상공부 화학과장이었던 지인으로부터 구용섭 님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는 일본의 동경공업고등학교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한 재원으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던 시세이도 화장품 회사의 공장장을 거쳐 생산부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당시로선 화장품 제조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기술자였습니다. 구용섭 님의 합류를 시작으로 서울대학교 약대 출신의 인재들을 잇달아 채용해 인력을 보강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연구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의 인식 수준이나 경제 사정, 특히 장업계의 형편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는 당장 눈앞의 이윤과 직결되지 않는 연구실을 개설할 필요성을 느끼는 기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모레퍼시픽의 연구실은 장업계 최초의 전문 화장품 연구 시설이 되었습니다. 이 연구실은 훗날 동양 최대의 화장품 기술 연구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연구실장 구용섭 님과 연구소 직원들


 대한민국 최초의 화장품 연구실. 그 첫걸음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초기의 연구실은 빈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크기는 화장실 한편을 개조해 만든 두 평 남짓한 공간에 지나지 않았고, 변변한 실험 기구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아모레퍼시픽의 적극적인 의지는 척박했던 연구실 환경을 짧은 기간 안에 바꿔놓았습니다. 옆 건물을 빌려 연구실을 넓히고, 최신 장비를 하나둘 늘려가면서 연구실 여건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연구원들은 꿋꿋이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시중에 유통된 수입 화장품을 분석해서 선진 기술을 습득하고, 나아가 아모레퍼시픽 제품의 품질을 더 높이는 데도 매진했으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통합 이미지를 만든 ABC 시리즈

 이처럼 연구실은 아모레퍼시픽 기술 개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고, 동시에 우리나라 화장품 업계를 선도하는 연구 기관으로 도약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새로 개설한 연구실을 중심으로 품질 향상에 주력했고, 그 결과가 제품 생산과 시장의 반응으로 하나하나 나타났습니다. ABC 포마드 후속 제품으로 발매된 ABC 향수 포마드, 그리고 여성 화장품으로 ABC 100번 크림이 출시되었습니다. ABC 시리즈가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아모레퍼시픽의 지명도도 한 단계 더 뛰어올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모레퍼시픽은 1955년 모든 제품의 브랜드를 ABC로 통합했고, ABC는 아모레퍼시픽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통합 브랜드의 사용, 상표 등록, 의장 등록 등 모두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였습니다. 특히 ABC 포마드는 '전국 국산품 인기투표대회'를 시작으로 이후 몇 년간 다양한 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부동의 1위 제품으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 전국 국산품 인기투표대회에서 부통령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찍은 사진

 격동의 시대였던 1950년대에 아모레퍼시픽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신뢰와 신용을 바탕으로 뛰어난 품질과 기술을 보증하고 브랜딩과 마케팅까지 트렌드를 앞서갔습니다. 1950년대는 말 그대로 아모레퍼시픽과 ABC의 시대였습니다.



  • 좋아해

    1
  • 추천해

    0
  • 칭찬해

    0
  • 응원해

    0
  • 후속기사 강추

    0
TOP

Follow us:

FB TW 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