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생활 깊숙한 곳까지 아름답게 밝히다 - AMORE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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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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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생활 깊숙한 곳까지 아름답게 밝히다


  • 생활용품 전문 공장으로 1980년에 준공된 대전 공장

  • 대전 공장 안의 리도 프로틴 샴푸 공정 시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가 고도성장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며 생활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었습니다.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쾌적하게 해주는 생활용품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그것을 값싸고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는 슈퍼마켓이나 연쇄점 같은 유통 경로가 늘어났지요. 이러한 변화는 생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시장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은 생활용품 시장을 반드시 진출해야 하는 새로운 영토로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토는 꽃은 아름답지만 가시가 많은 장미로 이뤄진 환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생활용품 시장을 장악한 경쟁 업체가 있었기 때문에, 텃세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승산은 있었습니다. 생활용품 중 일부 품목은 화장품과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오랫동안 화장품으로 쌓아온 기술력과 경험은 아모레퍼시픽의 장점이자 경쟁력이었습니다.

 시장을 예의 주시하던 중, 아모레퍼시픽이 생활용품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1976년 한 경쟁 업체에서 샴푸를 개발해 슈퍼마켓에 내놓은 것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이미 샴푸와 린스로 시장을 선점했는데, 이때만 해도 샴푸, 린스는 생활용품보다 화장품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방문판매를 통해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경쟁사가 슈퍼마켓에서 샴푸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일종의 도전이었고, 아모레퍼시픽은 이에 맞대응하며 1977년 5월, 생활용품 사업에 첫발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1978년 8월, 고급 화장비누인 아모레 삼미 비누를 처음으로 생산했습니다. 이어서 주방용 세제 방글방글, 향수 비누인 스와니 비누 등을 개발해 생활용품 시장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1980년에는 대전에 6만 2,063㎡(약 1만 8,783평)의 공장을 준공해 생활용품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고급화 전략으로 생활용품 시장을 공략했습니다. 품질의 우수성과 안정성을 내세워 '모발은 빨래가 아닙니다', '화장품 회사에서 만든 것이라 역시 다른가 봐요'와 같은 광고 카피로 경쟁사에 강력히 맞섰지요. 그리고 1980년, 생활용품 브랜드를 리도로 통합했습니다. 리도 브랜드는 아모레퍼시픽이 이미 1960년대에 사용한 바 있었고, 이는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이 프랑스 방문 때 본 리도 쇼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해에 발매한 리도 프로틴 샴푸는 짧은 시일 안에 경쟁사의 제품을 누르고 국산 샴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이 제품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슈퍼마켓과 연쇄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치약 시장에서도 아모레퍼시픽은 각축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타사의 제품이 치약으로서는 유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산 치약은 오랫동안 품질이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지요. 이를 돌파하기 위해 아모레퍼시픽은 고품질의 기술 제휴를 통한 자체 개발 제품으로 그 뒤를 잇는 정책을 폈습니다. 1982년 유니레버와 기술을 제휴해 국내 최초의 투명 치약인 리도 클로즈업과 치약에 붉은색 두 줄을 넣은 리도 시그날2를 출시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치약의 출현은 무풍지대였던 치약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 투명 치약 제조 방법 특허등록증

 당시만 해도 국산 치약은 값싼 연마제를 사용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기존 제품의 약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사용성 불량을 집중 공략했습니다. 그리고 비싸기는 하지만 품질이 한 차원 높은 부드러운 젤 형태의 치약을 개발했지요. 또 독일에서 래미네이트 튜브 제조 설비와 자동 포장 라인을 들여왔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치약 용기인 래미네이트 튜브는 바로 이때 처음 국내에 선을 보인 것으로, 오랫동안 알루미늄 튜브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후 아모레퍼시픽은 기술 제휴를 넘어 순수 자체 기술로 리도 하이얀 치약과 리도 메디안 치약을 내놓았습니다. 하이얀과 메디안은 장수 브랜드로 남아 아모레퍼시픽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 리도 브랜드의 다양한 헤어 제품

  • 순수 자체 기술로 만든 리도 메디안 치약



  • 명동 아모레 1번가

  • 첨단 컴퓨터를 이용해 개발한 메이크업 시뮬레이션 시스템

 1970년대에 있었던 두 차례의 오일 쇼크 이후 사람들은 좀 더 경제적이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성향이 강해졌습니다. 개성이 강조되고 자의식이 뚜렷해지는 현상도 두드러졌지요. 이런 사람들은 판매원의 권유에 의존해 결정하기보다 직접 여러 상품과 브랜드를 비교하고 확인한 뒤 선택하고 싶어 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값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찾아 기꺼이 발품을 팔았고,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할인 시장을 선호했습니다. 젊은 층에서 비롯된 할인 구매 성향이 점차 주부 등 다른 연령층으로도 번져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제 화장품 수입이 개방되면서 화장품 시장은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1983년 아이섀도, 아이라이너, 향수 등의 품목을 시작으로 1986년에는 약 78개 화장품 품목의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화장품과 관련된 국내 시장 모든 분야가 개방되었습니다.

 할인 매장, 수입 개방,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동시에 겹치자, 장업계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 사업의 모든 정책과 활동을 고객 만족에 맞췄습니다. 1984년 세안에서 메이크업까지 모든 과정을 시범으로 보여주는 아모레 1번가를 개설하고, 이듬해에는 소비자 상담실을 확대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고객의 피부 특성을 파악해 과학적인 처방을 제시하는 피부 미용 분석 시스템을 개발하고, 1987년에는 업계 최초로 첨단 컴퓨터를 활용해 메이크업 색상과 패턴의 변화를 재현하는 메이크업 시뮬레이션을 선보였지요.

 이처럼 시대를 앞선 고객 만족 마케팅과 기술을 통해 아모레퍼시픽은 위기를 이겨내고 새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품질과 기술, 고객 만족을 향한 꾸준한 관심은 시대가 어려울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아모레퍼시픽의 한결같은 방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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