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차 사업은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문화 사업입니다. 이를 성공시키면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의 이미지가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사업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당분간은 적자가 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사업을 추진할 테니, 여러분은 지켜봐주십시오."
비록 말은 이때 처음 꺼냈지만, 준비 없이 나온 선언은 아니었습니다. 사업상 해외를 자주 오가던 서성환 님은 나라마다 고유한 차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우리만의 차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한 것에 의아심을 품게 되었고, 나아가 커피 문화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와 관련된 문헌과 역사적 자료들을 찾으며 우리의 차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차 사업을 향한 오랜 염원이 비로소 현실화되는 출발점 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녹차 사업에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 자금 등을 고려한다면 쉽사리 동의하기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땅을 개간하는 일부터 시작해 적어도 10년 이상 정성을 들여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서성환 님은 녹차 사업을 '필생의 사업'이라 공표하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추진했습니다.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말처럼 녹차 사업을 위한 일을 서두르지 않고 차례차례, 다부지게 실천해갔습니다.
개간 전 제주 돌송이차밭
스프링클러를 설치한 돌송이차밭
녹차 사업의 첫 번째 과제는 부지 선정이었습니다. 차나무는 연평균 기온 14℃ 이상, 연간 강우량 환경이 1,600㎜ 이상의 고온 다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데, 까다로운 재배 조건을 갖춘 곳이 제주의 돌송이차밭(당시 도순다원) 과 서광차밭(당시 서광다원), 전남 월출산차밭(당시 강진다원)이었습니다. 당시 제주의 다원 부지는 뭘 심어도 안 되는 불모지로 알려져 있었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아모레퍼시픽은 돌송이차밭에서 개간의 첫 삽을 떴습니다. 넓은 황무지의 돌을 걷어내고 땅을 고르는 일이 개간 작업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주도에는 공사 장비가 거의 없어서,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모두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돌송이차밭과 월출산차밭도 조성하기 어려웠지만, 가장 큰 고비는 서광차밭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아무도 손댄 적이 없는 땅, 곶자왈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곳은 돌밭과 잡목뿐인 오지 중의 오지라, 교통편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식수조차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환경이 척박해 개간 공사가 쉬울 리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과 땅 사이의 일이라 힘들면 힘든 대로, 늦으면 늦는 대로 정성과 노력을 들이는 만큼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 뼘 한 뼘 넓어진 땅은 어느덧 수만 평, 수십만 평으로 늘어났습니다.
제주 돌송이차밭에서 채엽하는 풍경
개간 후에도 갈 길은 멀었습니다. 퇴비를 뿌려 토양을 비옥하게 일구고, 서리나 가뭄으로 인한 피해에도 대비해야 했습니다. 땅을 차근히 다지고 묘목 심기와 씨 뿌리기를 거쳐 1983년, 아모레퍼시픽은 손수 개간한 차밭에서 처음으로 찻잎을 수확했습니다. 제주 돌송이차밭에서 수확한 찻잎으로 한라진수, 삼다진수, 백록진수와 현미 티백, 설록 티백, 번차 티백 등 다양한 신제품을 출시해 녹차 사업을 본궤도에 올려놓았습니다.
월간 녹차 교양지 <설록차> 창간호
1980년대 출시한 설록차 제품들
최고의 차를 탄생시켰습니다. 오설록 차는 지난 2014년 한•중 정상회담에서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 내외에게 증정하는 선물로 채택되어 국내 최고급 명차 브랜드임을 입증했고, 오설록 일로향은 세계 최대 규모의 차 품평회 북미 차 챔피언의 덖음차 부문에서 총 4차례나 1위에 올랐습니다. 오설록은 창업자의 신념과 노력을 이어받아 국내 차 문화 계승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의 서광차밭과 맞닿은 곳에 오설록티뮤지엄을 운영하는 것도 그 일환이지요. 오설록티뮤지엄은 연간 100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과 차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한국 차의 성지'로 거듭났습니다.
40여 년 전, 서성환 님이 녹차 사업에 뛰어든 것은 사업성이 아니라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차 문화 계승을 향한 아름다운 집념이 없었다면,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녹차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으로, 긴 세월을 두고 묵묵히 나아가야 하는 사업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에서 푸른빛 다원을 마주하고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차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정을 다한 아모레퍼시픽의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