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연구로 기술을 개발해 신제품을 출시하는 젊은 회사, 한계를 모르는 창조적 기업'은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이 지켜온 일관된 정책이었습니다. 1950년대의 ABC 시리즈 이후, 1960년대에도 새 브랜드와 신제품 출시는 계속되었는데요. 1961년 탄생한 리도 브랜드의 '리도 아이샤도우'와 1962년 선보인 '오스카 네일락카'는 우리나라 첫 아이섀도와 네일래커였습니다. 그 밖에 바디 파우더, 마스카라, 오데코롱, 핸드크림, 베이비로션 등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국내 최초로 발매해 '아모레퍼시픽의 제품 개발사가 곧 우리나라 화장품의 발전사'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모레퍼시픽의 한발 앞선 제품 개발은 수많은 아류를 낳는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신제품을 출시하면 우리의 노력과 투자에 무임승차하는 유사품이 쏟아져 나오는 일이 되풀이되었는데요. 상표와 제품, 용기 디자인은 물론 광고와 판촉까지 모방하는 '미투(Me too)' 전략 때문에 지적 재산권을 두고 법정 공방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민크, 아크네, 미용소 크림의 상표 분쟁이었습니다.
1965년 민크 크림의 상표 등록을 마친 후 샘플을 제조할 즈음 타사에서 '민끄'라는 유사품을 내놓기도 했고, 1969년에 상표 등록한 '아모레 하이톤 아크네로숀'을 따라 한 아크네 로션이 시장에 등장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했습니다. 1965년에 출시돼 당대 최고의 판매 실적을 기록한 '아모레 미용소 크림' 또한 나중에 출시한 '쥬단학 미용소 크림'과 상표 분쟁을 겪어야 했지요.
'창조와 모방은 산업계의 필요악'이라는 말이 있지만, 모방이 공공연한 관행처럼 되면 산업계 전체가 공멸할 수도 있습니다. 1960~70년대에 일어난 상표 분쟁은 최고의 화장품 브랜드인 아모레퍼시픽이 치러야 했던 일종의 신고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 신문 인쇄 사상 최초의 전면 컬러 광고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색조 화장 시장은 매우 미미했습니다. 소득 수준이나 메이크업 제품의 제조 기술 수준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짙은 화장을 천시하고 기피하는 전통적인 의식구조 또한 하나의 이유였지요. 이에 반해 당시 서구와 일본에서는 메이크업 시장이 성황을 이루었고, 수요도 증가하는 추세였습니다. 선진 시장의 동향이 국내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 예견된 이때, 변화를 모색하던 아모레퍼시픽은 메이크업 시장을 개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메이크업 제품의 개발과 생산, 그리고 판매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시간당 2,000개의 립스틱을 생산하는 자동 성형기를 동양 최초로 도입해 갖가지 메이크업 제품의 생산 체계를 갖췄고, '아모레 하이톤 샤도우 크림' 발매 후 립스틱, 네일 에나멜, 아이라이너 등의 메이크업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메이크업 제품 개발과 출시에 그치지 않고, 색조 화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는데요. 제품 확산에 앞서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어울리는 화장 패턴과 화장 문화를 개발해 보급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가능성을 확인한 아모레퍼시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때마침 컬러 인쇄를 도입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다채로운 광고물을 실은 것인데요. 1970년 3월 5일, 아모레퍼시픽은 컬러 인쇄가 시작되자마자 발 빠르게 전면 컬러 광고로 일곱 가지 아모레 메이크업 제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광고는 우리나라 화장품 광고 사상 처음이자 한국 신문 인쇄 사상 최초의 전면 컬러 광고였습니다. 신문이 8면으로 발행되던 당시로써는 놀랄 만큼 파격적인 일이었지요.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메이크업 광고를 필두로 시대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은 점차 메이크업 문화를 받아들이며 더 컬러풀하고 개성미가 돋보이는 외모로 가꿔나갔습니다.
오 마이 러브 캠페인 포스터
Top Color 72 메이크업 캠페인 포스터
메이크업 캠페인의 다양한 행사 가운데 백미는 단연 '오 마이 러브 메이크업 발표회'였습니다. 1971년 4월 8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국내 최초의 메이크업 캠페인은 각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크게 보도되어 각계각층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오 마이 러브 캠페인을 통해 여성의 심리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동경을 화장을 통해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연령이나 장소, 또는 개성에 따라 화장법을 달리해야 하며, 메이크업은 의상과 이루는 컬러 조합 또한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지요. 이 과정에서 특히 눈 화장을 강조했는데요. 눈두덩에 음영을 주자 인상이 바뀐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눈 화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그해 여름 눈 주위에 진줏빛 광택을 주는 '아모레 하이톤 펄틴스 아이섀도'와 여름철에도 분을 바를 수 있게 한 '아모레 하이톤 화인케이크' 등의 신제품을 출시해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소비자들의 호응을 끌고 나갔습니다. 가을에도 '코스모스 꿈을 수놓은 가을 화장'이라는 콘셉트 아래 메이크업 캠페인을 벌였고, 1972년에는 반도호텔에서 'Top Color 72 발표회'를 개최해 때와 목적, 장소에 따라 개성이 다른 메이크업을 선보였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의 메이크업 캠페인은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의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이를 통해 전에 없던 메이크업 시장을 창출했고, 이를 확대해 장업계 전체의 공유물로 만들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의 메이크업 캠페인은 장업계의 흐름을 이끌며 우리나라 화장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메이크업 캠페인은 이제까지 무채색에 안주해온 우리나라 여성들의 미의식과 화장 상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겉치레로 여기던 화장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노력'으로 인식하게 했으며, 아름다움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줬습니다. 아모레퍼시픽은 여성들의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동경을 끄집어내어 자신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제품을 탄생시킨 것이 아닌 시대에 색을 입히는 일이자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1970년대 아모레퍼시픽의 메이크업 캠페인은 한마디로 '색상 혁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