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척박한 현실 위로 솟아난 희망의 새싹 - AMORE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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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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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척박한 현실 위로 솟아난 희망의 새싹


 개성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온 장원 서성환 님과 가족들은 남창동의 한 가게에 '태평양화학공업사'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남창동 일대는 크고 작은 도소매상들이 자리 잡은 초라한 곳이었지만, 시장에는 활기가 가득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서성환 님이 어린 시절부터 원료를 사러 오갔던 남대문시장 근처라 친숙한 곳이기도 했지요.

 남창동에서의 출발은 비교적 순조로워서 어렵지 않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년 뒤에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너편인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09번지로 회사를 옮겼습니다. 이는 사업이 확장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으면서 환갑을 바라보는 윤독정 여사가 화장품 사업 일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 서성환 님이 독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사업 기반을 서울로 옮긴 창업 초기 태평양이 가장 힘을 쏟은 일은 품질의 제고였습니다. 믿을 만한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어머니 윤독정 여사가 누누이 강조해온 사업 신조였습니다. 서성환 님은 이익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신뢰는 한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당장의 이익보다 소비자들의 신뢰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품질 제일주의, 그것은 태평양이 창업 초기부터 지켜온 경영 철학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상표를 붙여 판매한 메로디 크림의 라벨

  회현동 시절 태평양이 처음으로 상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한 제품이 메로디 크림입니다. 오랜 노하우와 품질 제일주의의 원칙으로 생산한 제품이라 품질에 자신 있었던 메로디 크림은 출시되자마자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메로디 크림의 성공 요인이 우수한 품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품질과 제품 네이밍, 그리고 용기 디자인의 삼박자가 절묘하게 결합한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품질과 디자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메로디 크림은 인기 상품으로 떠올라 1950년대 초까지 생산되는 장수 상품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걸음씩 성장 기반을 구축해가던 태평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위기를 맞닥뜨렸습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일단 위기를 넘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서성환 님과 가족도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피난 짐 속에는 향료도 소중히 담겨 있었습니다. 비싸기도 했거니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었던 이 향료가 있어야만 화장품 사업을 재개할 수 있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잊지 않고 챙겨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은 말 그대로 난리였습니다. 창업 이래 탄탄한 신용을 쌓아왔던 서성환 님은 부산의 거래처였던 도매상을 찾아갔고, 그의 도움으로 상점 2층에 가족이 임시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초량동에 작은 집을 구해 피난처를 마련한 서성환 님은 사업을 재개했습니다. 향료밖에 가진 것 없던 그때, 부산으로 모여든 도매상, 용기 업체 등 많은 거래처의 도움과 배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많은 것을 뒤바꾸지만, 부산 피난 시절 화장품 업계는 다른 업종보다 유난히 경쟁이 심했습니다. 원료난, 수요 감소, 유통 경로 파괴 등으로 사업 환경이 매우 안 좋았는데, 그런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사업을 접는 업체도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태평양은 거뜬히 재기했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서성환 님의 열정과 부지런함은 혹독한 시절을 이겨낸 가장 큰 성공 요인이었습니다.
  • 전쟁통에 피난 행렬이 이어진
    부산의 기차역

  • 전시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국제시장



 부산 피난 시절에는 남성용 화장품이 여성용 화장품보다 더 많이 소비되었습니다. 전쟁 중이라 여성들의 소비가 줄어든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남성용 정발료인 포마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이 들어오면서 긴 윗머리에 윤기 나는 반고체 상태의 머릿기름, 포마드를 발라 가르마를 타서 좌우로 갈라 붙이는 헤어스타일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태평양에서도 포마드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바로 회현동 시절 발매한 메로디 포마드입니다. 당시 메로디 포마드는 물론 바셀린, 왁스 등 광물성 물질을 주원료로 하던 국산 포마드는 결함이 적지 않았습니다. 포마드를 바르고 나면 머리카락이 뻣뻣해지고 기름이 번들거리는데, 이 기름기는 머리를 감아도 잘 빠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심하던 서성환 님은 마침 일본에서는 식물성 포마드가 유행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성환 님은 포마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없이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사업가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어머니로부터 제조 기술을 물려받은 기술자이자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1951년 말, 태평양은 마침내 국산 화장품 제조 기술 수준으로는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ABC 포마드입니다. 바셀린 대신 피마자유를 사용한, 국내 최초의 순 식물성 포마드였습니다.

 ABC 포마드의 출시로 우리나라 남성용 헤어 제품의 품질은 단숨에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ABC 포마드가 다른 포마드 제품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향료였습니다. 식물성 포마드는 광물성보다 원료 냄새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향료를 첨가해야 했는데, ABC 포마드에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일본과 홍콩에서 수입한 고급 향료를 첨가했습니다.
  •   ABC 포마드 1959년 신문 광고


국내 최초로 래미네이팅과 엠보싱 기법을 사용해 만든 ABC 포마드의 라벨

 ABC 포마드는 디자인도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포장 디자인은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녹색 패턴으로 처리하고, 용기는 시장에서 통용되던 검은색 대신 ABC를 양각으로 새긴 흰색 병을 사용해 세련미를 더했습니다. 당시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용기 혁명'이라고 부를 정도였지요. 라벨은 국내 최초로 필름 래미네이팅과 엠보싱 기법을 사용해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ABC 포마드는 출시되자마자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출시된 지 반년 만인 1952년 7월에는 사업 거점을 확장 이전해 확대 생산에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이는 품질과 기술, 디자인, 그리고 그 안에 배어 있는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의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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