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전 혜초를 뵙다 - AMORE STORIES
#2016 혜초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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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혜초를 뵙다

혜초
칼럼

혜초들이 직접 작성한 칼럼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도시 혜초들이 들려주는 현지 이야기

1,300년 전 혜초를 뵙다

김혜진 님
중국 시안

2016년 도시 혜초, 중국 시안(西安)에 김혜진입니다.

아모레퍼시픽의 혜초로서 중국 시안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지역입니다. 우리 회사의 '혜초'라는 이름의 기원인 통일신라시대의 '혜초스님'이 1,300여년 전 수행하시던 곳이 바로 이곳 시안이기 때문입니다. 혜초스님은 16세때 당나라 수도인 장안(현재의 중국 시안)으로 건너갔고, 20세에 광저우를 출발로 인도 유학 길에 올랐는데, 인도뿐 아니라 현재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약 8년간의 답사 후 육로를 이용하여 장안(현재의 중국 시안)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780년 (당시 77세), 한국 오대산으로 돌아와 787년 입적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84년 일생 중 약52년을 바로 여기 시안에서 계셨던 셈입니다.

혜초스님은 인도 유학 시,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히는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는데, 천축은 바로 인도를 가리킵니다.

[세계 4대 여행기란? 왕오천축국전,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이븐바투타여행기']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은 애초 그 내용은 물론 존재조차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1900년 중국 감숙성에서 연기가 벽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계기로 고서들이 보관된 굴을 발견했지만 그 중요성은 인지하지 못했는데요. 몇 년 뒤, 13개국 언어에 능통했던 프랑스인이 이곳에서 히브리어 '면죄부'와 티베트어 '연대기', 위구르어 '현장삼장전' 등 1,500여권의 책과 회화, 직물 등을 추려 프랑스 행 배에 실어 보냈고, 바로 이 속에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어 있어서 현재 세 권의 <왕오천축국전> 중 한 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1908년 고서적과 문서로 뒤 덮인 막고굴 17호굴에서 촛불 하나만 밝힌 채 3주간 분류작업을 한 후 29상자를 프랑스로 보냈다.

현재 중국 시안의 세 곳의 사찰에서 혜초스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 천복사(薦福寺)

혜초스님이 인도 유학 후 장안으로 다시 돌아와 스승과 함께 경전을 연구하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시안의 3대 탑 중 하나이며 유명 관광지인 소안탑(小雁塔)이 함께 있는데, 이 탑의 원래 이름은 '천복사탑'입니다. 1521년에 지진으로 돌이 갈라졌다가 부처님의 기적 "신합"으로 스스로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혜초스님의 스승인 금강지는 인도 출신이지만 그의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는데, 그 밀교를 혜초스님이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중국 밀교의 맥을 금강지-불공-혜초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혜초스님은 직접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기도 했으니 당 황실의 신뢰 속에 밀교의 계보까지 이어받은 대단한 업적입니다.

[밀교란? 불교의 진언과 다라니, 기원과 공양의례, 불상과 만다라 등의 종교적 소재를 다루는 불교의 한 분야]


2. 대흥선사(大興善寺)

스승이 돌아가신 후 혜초스님은 대흥선사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대흥선사는 천복사에서 남쪽으로 약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국 시안 최고의 사찰로서, 혜초스님이 계셨던 당나라 때 특히 크게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주술적, 은폐적 성격 강하다는 이유로 많은 탄압을 받았으며 현재는 종파의 명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대흥선사의 금강당에는 혜초스님 등 신라고승으로 추정되는 불상 2개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여러 고승들의 상을 조성하면서 신라 승려 2명의 불상도 만들었지만, 검증이 끝나지 않아 미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고 합니다.

3. 선유사(仙游寺)

774년 당나라의 황제 대종은 가뭄이 계속되자 혜초스님에게 기우제에 필요한 글을 쓰도록 했습니다. 혜초스님은 시안으로부터 80km정도 떨어져 있는 선유사 옥녀담에 제단을 세우고 향을 피운 뒤 '하옥녀담기우표'를 올렸는데, 하늘에서 바로 비단 같은 보슬비가 흡족하게 내렸다고 합니다.
현재는 부근의 댐 건설로 옥녀담은 물에 잠겼고, 선유사도 조금 위쪽으로 위치를 옮겼습니다. 1998년 이곳을 답사한 한국인 교수의 주도로 2001년 '신라국혜초기념비'가 세워졌지만, 그 후 유지비 지원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붕괴위험까지 갔다 2013년 재 보수되었습니다. 기념비명이 한글로도 쓰여 있어 더욱 감회가 새로웠네요.
한편으로는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 유산을 남기신 자랑스러운 선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영광을 누렸고, 또 한편으로는 아모레퍼시픽의 '혜초'로서 1,300여년 전 분명 열악했을 조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도전, 탐험, 연구했던 혜초스님을 찾아 뵈며 '혜초'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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