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호섭 그린 디자이너
냉장고와 자가용 없이 사는 사람, 한때 전기와 수도를 모두 끊고 지낸 사람, 매년 <녹색여름전>을 열어 그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 윤호섭 선생님께 인터뷰를 제안하니 전화가 왔다. “윤호섭입니다.” 중후하지만 어딘가 개구지고, 그러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다. “인터뷰 좋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제 작업실에 방문하려면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해야 해요.” 흔쾌히 “할 수 있어요!” 대답했는데, 책이 생각보다 길고 내용이 방대하다. ‘쓸 수 있어요.’가 ‘너무 긴데….’로 변하는 건 삽시간이었는데, 양손 주무르며 필사를 마치고 나니 투덜거림이 부끄러워진다. 써본 사람은 안다. 왜 《나무를 심은 사람》인지, 선생님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앞으로 우리가 이 지구를 위해 어떤 책임을 다해야 하는지.
<일러두기>
해당 기사는 2023년도에 인터뷰를 마쳤다. 따라서 단어 표기법 기준 ‘올해’로 표기된것은 2023년을 뜻한다.
“제 눈초리 하나만으로 사람들 마음이 잠시라도 편해지면 좋겠어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그린캔바스’에 오게 되어 기뻐요.
여름이 되면 칡이 지붕 위로 잔뜩 자라 무성해지는데, 아직 겨울이라 좀 삭막하지요. 날이 따뜻해지면 훨씬 그린캔바스다워져요. 안녕하세요, 윤호섭입니다. 여기는 그린캔바스라고 이름 붙인 제 작업실이자 전시 공간이에요.
선생님은 ‘그린 디자이너’라고 불리고 있죠. 직접 소개를 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손을 뻗어 잡히는, 재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누군가를 해치거나 경쟁하지 않고, 재미있는 일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하루하루 평화롭게 지내고 있죠.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해나가면서요. 빈둥빈둥 지내는 것 같지만 언제나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을 마음에 품고 있어요.
요즘엔 어떤 재밌는 일을 만나셨어요?
음… 토끼 그린 거요. 올해는 검은 토끼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었거든요. 저는 2002년부터 손으로 직접 쓴 숫자들로 달력을 만들어 왔어요. 제 글씨로 만들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사람에게 글씨를 부탁해서 만들기도 했죠. 유명한 사람도 있고, 이름 없이 활동해 오는 사람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었어요. 2022년이 딱 20년 되는 해여서 이제 그만 만들어야겠다 싶었는데 작년에 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내년이 계묘년이라는데 교수님 댁에 까만 토끼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안 만들 수 없겠더라고요. 검은 토끼를 그려서 달력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은 일찍 먹었는데요. 이 일, 저 일 하다 보니까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어요. 달력은 새해가 오기 전에 만들어야 하니까 서둘러 그려야 했죠. 사실 그림 달력을 쉽게 생각하긴 했어요.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 이틀 만에 될 것 같았거든요. 귀를 크게 그리고 까맣게 색칠하면 어느 정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그려봤더니 모양만 토끼지 이상하게 감동이 없는 거예요. 게다가… (앞에 놓인 검은 파스텔을 가리키며) 이걸로 작업한 건데 파스텔은 가루가 날리거든요. 시간이 얼마 없어 종일 그림만 그리며 지냈는데 그때 기관지에 무리가 갔나 봐요. 어느 날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예?
바로 병원으로 갔죠. 침착하게 진료받을 상황이 아니었어요. 숨이 안 쉬어지니까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어요. 닷새 동안 꼼짝도 못 했죠. 엑스레이도 찍고 피 검사도 했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토끼 그리는 것도, 달력 만드는 것도 가볍게 생각한 걸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무엇이든 섣불리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그런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이 작업으론 얻은 게 더 많아요. 토끼를 계속 관찰하면서 토끼 안에 삶의 단면과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7년 동안 토끼랑 같이 살았는데 이제야 그런 깊이를 알다니, 그동안 제가 주변을 너무 가볍게 보고 지나친 건 아닐까 싶었어요. 작업을 마치고 보니 저한테 의미가 굉장히 큰 달력이 되어 있었죠. 그렇지만 수량은 많이 뽑지 않았어요. 인쇄하는 것도, 종이도 다 자원이니까 낭비하면 안 되잖아요.
귀한 경험을 하게 해준 토끼 소개도 들어봐야겠어요.
이름은 ‘버스킨 라빈스’예요. 토끼 집에 약자로 ‘B.R.’이라는 글자도 적어두었죠. 올해로 같이 산 지 7년 된 토끼인데요. 7년 전에 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토끼를 우연히 보게 된 게 첫 만남이었죠. 누군가 잃어버린 걸까 싶어서 주인을 찾는다는 포스터를 만들어 모퉁이마다 붙이고 다녔는데 주인이 안 나타나더라고요. 토끼를 키우다 몸집이 커지면 공원에 버리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여기가 북한산 아래여서 누군가 버리고 간 건가 싶기도 했죠. 유기된 토끼라고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들더라고요. 제가 거두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함께 살게 됐어요. 토끼 수명이 7-8년 정도라고 하는데, 아직은 건강해 보여요. 생미나리를 좋아하는 토끼죠.
선생님은 그린캔바스에서 환경 관련된 디자인과 전시를 하고 계시지요. 지금은 그린 디자이너로 지내시지만, 이전엔 내로라하는 광고 디자이너셨다고요. 한국의 펩시 로고도 선생님 작품이라고 알고 있어요.
꽤 오랫동안 광고 디자이너로 지냈지요. 광고 디자인은 저한테 여러 가지를 알려 주었어요. 광고는 제 개인 작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업하는 종합 예술이에요. 여러 분야의 사람이 모여 하나의 광고를 만들어내는 거죠. 광고 디자이너로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으로,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거듭 고민하고 훈련했어요. 제가 만든 광고로 제품이 더 잘 팔리고 브랜드가 잘되는 게 좋았죠.
그러다 회의감을 느끼셨죠. 사람들이 광고에 자극을 받아 물건을 사고, 그 수익으로 또 다른 제품을 생산하면서 나오는 쓰레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지금처럼 물건이나 광고가 많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뛰어난 제품이 나와도 좋다는 반응이 쉽게 들려왔죠. 그러면서 좋은, 더 좋은 물건들이 계속 보편화되었는데, 광고 디자이너는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해요. 사람들에게 제품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일을 하니까요. 광고 디자이너로 일할 때는 그 지점에서 굉장한 매력을 느꼈어요. 재미도 있고, 매력도 있고, 돈도 벌고, 이름도 생기고. 광고의 순기능은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는 일일 거예요. 그 과정에서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쓰게 되는데요. 대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거나… 하는 방식이 저한테 잘 맞지 않았어요. 광고에 회의감을 느낄 때는 벌써 직함도 꽤 높아지고, 이름도 알려진 뒤였어요. 그제야 제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뭘 해야 하는지 고민이 생겼죠. 그즈음 저는 국민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었는데요. 학생들이랑 의견을 나누다 보니 교육적으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광고로 제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뒤처진 물건을 쓰레기로 양산하는 것보다 디자인을 통해 좀더 자연 친화적으로 다가가고, 순환하는 생태계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가를 생산하고 디자인하고 잘 소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전쟁 직후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상업 미술이었는데 흘러 흘러 그린 디자인까지 간 거죠.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한국전쟁을 지나오셨겠군요.
그렇죠, 1943년생이니까요. 한국전쟁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저는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때 형제들과 헤어져야 했고, 아버지는 생사를 알 수도 없게 됐어요. 전쟁 직후 모든 게 피폐해졌어요. 저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빨리 돈을 벌어야 했죠.
외람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43년생이라는 사실이 놀라워요. 무척 정정해 보이시거든요. 운동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인지도 모르겠어요.
운동은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만화가도, 디자이너도 아니면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죠. 계속해서 크고 작은 운동을 해온 덕을 이제야 보는 것 같아요. 계속 운동을 해와서 몸이 확실히 단련되었거든요. 요즘도 계속 서울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는데, 아직까지는 문제없어요(웃음).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체력 관리보다도 재미 위주로 운동하고 있어요. 특히 당구를 자주 치죠. 강도로 치면 당구가 실내 마라톤급이거든요. 한껏 집중해서 치면 그만큼의 피로감과 보람이 있어요. 당구를 치다 보면 특히 신경이 예민해져요. 감각이 둔해지지 않게 하는 데 당구가 큰 역할을 했죠.
(기척이 느껴진다.) 어? 선생님, 잠깐만요. 저기 새가 왔어요. 사과를 먹는데요?
놀라지 마세요, 종종 오는 친구예요(웃음). 저 사과는 와서 먹으라고 일부러 둔 거고요. 새들이 자주 오니까 작은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고 그 안에 사과를 넣어 뒀거든요. 사과도 아무 사과나 놓지는 않아요. 맛있는 것들로 골라서 담아 두죠. 같은 녀석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와서 사과를 쪼아 먹고 가요. 재미있는 건, 저 공간에 토끼랑 새가 같이 있잖아요? 그런데 서로 견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나 봐요. 그러니까 토끼도 제 영역에 새가 와도 아무렇지 않고, 새도 주변에 토끼가 있어도 경계하지 않는 거죠. 서로 한 공간에 잘 어우러져 있더라고요.
귀엽고 기특하네요(웃음).
나이를 먹을수록 저들처럼 경쟁과 갈등에서 멀어진 관계를 그리게 돼요. 머리로는 항상 원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는 않죠.
맞아요. 경쟁에서 오는 속도감도 지치고요. 그런 과정에서 환경 문제도 점점 더 크게 대두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환경 감수성이 좀더 예민해졌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지금은 환경 문제에 대책이 없으면 곤란하죠. 저는 모든 환경 인식이 윤리나 정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환경 문제를 기업 이미지를 쇄신할 기회로 삼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라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상황을 직시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인류는 지금 결정적인 상황에 맞닥뜨렸어요. 모든 영역에서 예민함이 요구돼요. 특히 저널의 역할과 책임이 막중해졌죠. 그러니까 이 인터뷰도 대중에게 정보를 전하고 문제를 인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선생님은 1995년 학부에 계열 교양 필수 과목으로 ‘환경과 디자인’을 개설했고, 2003년에는 디자인대학원에 ‘그린 디자인’ 전공을 신설하셨어요. 환경 문제를 교육이랑 결합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저는 환경 문제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논문을 쓰거나 전공한 것도 아니에요. 단순히 책임감과 열정만 가지고 무작정 시작한 건데 사람들이 공감하고 응원해 주니까 하나씩 해나갈 수 있었어요. 그때는 아는 게 얼마 없어서 책을 엄청나게 사들이고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환경을 위하는 책이다 싶으면 무작정 다 사 모아서 읽은 거죠. (옆에 있는 책을 가리키며) 이것도 그런 책 중 하나예요. 《Walking》이라는 책인데, 녹색 공간을 바라보는 자연과 인간에 관한 입장을 알고 싶어서 샀어요. 이런 책이 안채에 수두룩하게 모여 있죠. 건축 쪽에서는 패시브 하우스도 그렇고, 이미 환경적인 개념이 일찍이 들어와 있었거든요. 근데 디자인 쪽에는 그런 선례가 없으니까 맨땅에 헤딩하듯 여러 분야를 오가며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했죠.
그때 마침 국민대학교 단과대학 학장을 맡게 돼서 교과 과정을 관장할 수 있게 됐어요. 1학년 교양 필수 과목으로 그린 디자인 과목을 개설한 게 그때 일이죠. 근데 이걸 누가 가르치겠어요. 디자인과 환경을 연결 지어온 사람이 없는데. 그래서 제가 했어요(웃음). 강의는 10년 넘게 해왔는데, 교과 내용은 굉장히 기본적인 거였어요. 지구 온난화, 오존층 파괴 같은 내용을 짚어주는 거였죠. 저는 디자이너고 배운 게 디자인뿐이어서 이렇다 할 깊이는 없었어요. 그래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강의해 나간 덕분에 매 학기 300여 명의 학생이 그린 디자인을 익히고 이수하게 되었어요. 제가 아는 이야기만 하는 것보다는 권위 있는 학자나 전문가가 함께하면 좋겠다 싶어 학기 중에 초빙하기도 했고요. 한편에선 환경 문제는 당연히 알아야 하고 기본적인 건데 전공까지 개설하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해요. 교수도 없는데 학과를 개설하겠다고 한 거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더 푹 빠져서 하게 됐죠. 그때 환경과 관련된 개인적인 퍼포먼스도 많이 했어요.
인사동에서 헌 티셔츠에 그림 그리신 것도 그런 일 중 하나겠네요.
맞아요. 처음 환경을 주제로 전시하게 됐을 때, 전시할 만한 걸 생각하다가 집에 있는 옷들이 생각났어요. 옷장을 열어 있는 옷을 다 꺼내봤죠. 근데, 놀랄 만한 양의 옷이 쏟아지더라고요. 사람들한테 과소비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제 옷장엔 어마어마한 양의 옷이 숨어 있던 거예요. 이 옷들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나누어 줄지 고민하면서 퍼포먼스를 계획했어요. 그냥 옷을 나눠 준다고 하면 관심 가질 사람이 얼마 없을 것 같아서 옷에 그림을 그려서 이야깃거리를 만들자 싶었어요. 그 생각으로 인사동에서 친환경 페인트로 헌 옷에 그림 그리는 작업을 한 건데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인사동에 나가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헌 옷에 그림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오랫동안 하면서 지냈어요. 코로나19로 대면 행사가 축소되었을 때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려서 보내주기도 했죠. 여기로 직접 그려달라고 오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이 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녹색 공감을 하게 됐어요. 요즘은 기증받은 물건에 그림을 그려서 나눔 가게로 보내주는 일도 하고 있어요.
선생님, 한때 수도와 전기를 완전히 끊고 지낸 적도 있으시잖아요. 그때 이야기도 궁금해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목격하고 나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일본인들과 대화하면서 그 사고가 얼마나 위중한지, 얼마나 큰일인지 내막을 알게 됐어요. 지금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죠. 그래서 일종의… 문명을 거스르는 퍼포먼스를 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사실 저희 집 수도와 전기를 끊었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 주변만 해도 그대로였거든요. 저는 전기와 수도 없는 집에 살고 있을 뿐 여전히 문명사회의 일원이었던 거죠. 나가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고, 목욕탕도, 이발소도 있고, 큰 건물엔 화장실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3년을 지냈지요.
화장실도 없던 거예요?
네. 몸은 목욕탕에서 씻었고, 볼일은 근처 건물 화장실을 이용했죠. 그 당시 인류가 겪은 건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지만, 그게 우리나라, 내가 사는 동네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지금 큰 사고로 에너지를 공급하는 회로에 문제가 생긴다면요? 언제나 문명사회를 살아갈 거라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어떻게 될지 예상해 본 적 있나요? 제가 수도와 전기 없이 살았던 건 그런 생각에서 출발한 일이었어요. 그때 남긴 건 마당에 있는 수도 하나였죠. 그 당시 작업실은 바로 뒷집이었는데요. 그러다가 이 공간을 구하게 되어서 화장실이 생겼고, 다행히 지금은 볼일을 여기서 보고 있어요(웃음). 그래도 여전히 냉난방 설치는 하지 않았죠. 난방은 천장에 태양광을 두고 에너지를 수급하여 사용하는데, 제가 하도 전기를 안 쓰니까 쓰는 전기보다 모은 에너지가 더 많을 때도 있어요. 여전히 전기는 많이 사용하지 않고요. 여름에는 전기료가 거의 안 나오다시피 해요. 이 뒤가 바로 안채인데, 전기 매트 하나 꽂고 살고 있거든요. 평년 0도 정도 추위인데, 가장 추울 때는 영하 6도까지 내려간 적도 있어요. 좀 힘들었지만 사는 데는 문제 없더라고요.
여전히 자동차랑 냉장고 없이 살고 계신다고요.
옛날에는 자동차도 있었어요. 포니, 스텔라, 쏘나타…. 근데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린 디자인 과목을 개설하고 공부하면서 승용차는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자전거를 타면서 지냈어요. 대중교통 사용을 전파하려고 캐릭터를 만들어서 활동도 했죠. 사람 크기만 하게 뽑아서 외국에서 전시도 하고, 스티커로 배포도 하고요. 냉장고도 그래요. 그게 꼭 필요할까요? 겨울이면 영하 10도 아래로도 내려가는데 그땐 주변이 다 냉장고 아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채소나 과일이 과연 냉장고에 들어가고 싶어 할까요? 저 어릴 때는 냉장고라는 제품이 아예 없었어요. 냉장고 없이 산다는 얘기가 알려지고 나서는 “냉장고 없이 어떻게 사느냐.”는 소릴 참 많이 들었는데요. 처음엔 그 말이 굉장히 좌절스러웠어요. 없어도 될 것에 의지하고 사는 것 같아서요. 그렇지만 이제 냉장고는 당연한 가전제품이 되었으니까 그 질문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을 찾기로 했죠. 우리는 바깥이 영하로 떨어지면 보일러나 난로를 틀어 집 안을 영상으로 만들잖아요. 그렇게 만든 따듯한 공간 안에 냉장고를 넣고 일부러 영하 온도를 만들어서 음식을 집어넣는 거예요. 인위적이지 않나요? 음식은 냉장고에 들어가면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해요. 사실 영하 10도면 아파트여도 뒤 베란다가 냉장고 기능을 할 수 있어요. 저는 안채가 영하 6도 정도 되니까 음식을 거기다가 두거든요. 그렇게 하면 음식이 부패하지도 않고, 오히려 신선한 상태로 먹을 수 있어요. 냉장고를 열흘만 꺼보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의 10퍼센트만 냉장고 가동을 멈춰도 우리가 사는 환경은 훨씬 나아질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우리가 세상에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느냐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요.
심각하고 어려운 얘기는 아니에요. 우리는 이 넓은 태양계 중 지구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어요. 이 우주엔 화성, 금성, 목성, 명왕성… 수많은 행성이 있는데, 그중에서 하필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신기하지 않나요? 이 광활한 우주 중 하필 여기서, 하필 지금, 하필 우리가 만났다는 것이. 우주의 수십억 역사 속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대화하고 있다는 건 기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살아요.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는 상태를 좀더 인식하고 이해하면서 살자는 의미예요. 우리 삶이 경이롭다는 걸 알게 되면 남을 속이거나 생명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까요? 내가 한 아주 작은 행동으로 하천이 오염되거나 생명이 죽어나간다면요? 우리는 지능이 있는 인간이니까 내가 존재함으로써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살아야 해요. 저는 그걸 자존심自存心이라고 말해요. 스스로 자에 있을 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향한 존중은 물론이고, 환경에 대한 책임도 다해야 한다는 거죠.
오늘날 환경 문제는 많은 사람이 알게 됐지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느냐는 환경 감수성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인사동에서 헌 티셔츠에 그림을 그릴 때 “윤 교수가 티셔츠에 그림 그리면 지구가 살아나?” 같은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어요. 환경 감수성은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랑은 관계없이 사람마다 다른 거라고 봐요. 진정한 인식이 있을 때 환경 감수성을 발휘하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거죠. 자신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아는 사람일수록 더 예민하고 민감해질 거예요.
적극적으로 환경을 위한다고 말하긴 머쓱하지만, 다들 일회용 컵 쓰는데 혼자만 텀블러 쓸 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해요. “너 하나만 실천해서 뭐 하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할 말이 없어지고요.
너무 일차원적인 발상이에요. 아주 곤란한 상태죠. ‘나 혼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야 할 일인데, 왜 안 된다는 생각부터 하는 걸까요. 그건 그저, 불편하니까 안 하고 싶은 거예요. 실천에는 불편이 따르니까, 남들은 불편한 걸 안 하려 하는데 나만 하면 억울하니까 나는 하고 싶지 않다는 논리거든요. 하지 않으려는 행위를 합리화할 뿐이지요. 사실 남이 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죠. 제가 녹색 실천을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냉장고 없이 산다고 해서 지구가 금세 깨끗해질까요? 환경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될까요? 제 목표는 지구를 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거예요. 우리가 이 별에 존재하는 이상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건, 환경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책임인 거죠.
가장 기본적인 책임을 하나만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밥 먹을 때 남기지 않는 것.
명심할게요. 오늘 만남에 숙제를 하나 내주셨죠. 장 지오노Jean Giono의 그림책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해 오라고 하셨어요. 생각보다 분량이 많더라고요. A4용지 양면으로 열 장 남짓 나왔어요.
빼곡하네요. 꼭 인쇄한 것 같아요.
첫 장은 정갈하지만 뒤로 갈수록 손에 힘이 빠져서 괴발개발이에요(웃음).
제가 가르친 학생들도 그렇고, 다른 학교로 강연을 나갈 때도 그렇고, 필사는 언제나 제안하고 있어요.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저 역시 이 책은 참 오랫동안 필사해 오고 있어요. 언제부터, 왜 시작했느냐 물으면 저도 생각이 잘 안 나는데… 대략 20년? 아니 30년은 된 것 같아요.
《나무를 심은 사람》은 주인공 시점에서 ‘부피에’ 할아버지를 관찰하는 이야기죠. 할아버지는 미움과 싸움으로 사람들이 떠난 황폐한 고원에 도토리 100개를 심어요. 너도밤나무와 떡갈나무, 자작나무도 심고요. 주인공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데요. 황폐했던 땅은 나무로 가득 차 있고 부피에 할아버지는 거기서 양봉을 하고 있어요. 어느덧 그 땅은 울창한 숲과 개울로 아름다워져 있죠.
필사하면서 어떠셨어요? 부피에 할아버지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묵묵하게 해나가요. 그게 나무를 심는 일이고요. 처음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었을 땐 주인공이 정말 위대해 보였어요. 자신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고, 지키고,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요. 저는 매년 이 책을 수 개씩 필사하고 있어요. 기독교인이 신앙심으로 성경을 베껴 쓰듯, 저도 확고한 믿음으로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하는 거죠. 한 자씩 베껴 쓰다 보면 제가 생각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확실해지고 다음 세대를 생각하게 돼요. 산만해졌던 마음이 모이기도 하고요. 사실 짧은 글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몇 번을 베껴 써도 지루하다거나 진부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히려 계속 놀라게 돼요. 장 지오노가 왜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이렇게 엮었는지 매번 새롭게 알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걸 또 느끼게 되고요.
최근엔 어떤 걸 느꼈어요?
부피에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는 땅에 생명을 피어나게 했어요. 그 덕분에 떠난 사람들도 마을로 돌아오고 갈등과 다툼 없이 다시 평화로운 곳이 되죠. 이번에 눈에 띈 부분은 땅에 피어난 새로운 생명이었어요. 꽃이었죠. 부피에 할아버지가 어떤 꽃을 심었고, 어떻게 가꾸었는지를 읽으면서 할아버지가 심은 꽃 이름도 되새기게 됐어요. 그동안 이 묘사를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죠. 수십 년을 베껴 썼지만 앞으로도 새로운 게 보이겠구나 싶었어요. 부피에 할아버지야말로 자신이 여기서 존재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에요. 도토리를 심는다고 해서 당장 울창한 숲이 되는 건 아니지만, 도토리와 나무들을 심었기 때문에 10년 뒤에 황폐한 고원이 울창한 숲이 되고 풍족한 수자원이 생겨났잖아요. 저는 사람들이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으면서 뭔가를 느끼기를 바라요. 필사하면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생각하길 바라고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베껴 쓴 필사는 어디에, 어떻게 썼든 하나의 작품이 되겠죠. 저에게 보내준 그 필사들은 전부 간직하고, 매년 전시하고 있어요. 에디터님이 써주신 것도 올해 9월에 전시하게 되겠죠.
영광이에요. 저는 A4용지에 양면으로 빽빽하게 써 왔는데 여기 있는 필사 작품들은 형태가 다채롭네요. 표지가 있기도 하고, 겹쳐 적은 것도 있고, 그림을 곁들인 것도 있고요.
언제 봐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필사 작품들이에요. 그린캔바스의 한쪽 벽면에는 그동안 제가 받아온 《나무를 심은 사람》 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울린 작품들을 걸어뒀어요. 전시 때마다 공간을 다르게 구성하지만 저 벽만큼은 고정으로 두고 있죠. 이거 한번 보실래요? 이화여대 대학원에 다니는 중국 학생이 필사한 건데요. (돌돌 말린 것을 펼친다.)
젓가락이네요?
맞아요. 자장면 시키면 흔히 같이 오는 일반 나무젓가락이에요. 중국에서는 옛날에 종이가 없을 때 대나무를 엮어서 ‘죽간’이라는 곳에 글씨를 적곤 했어요. 이 친구는 젓가락 수십 개를 끈으로 엮어 이 위에 필사했어요. 전부 중국어로요. 저는 이런 게 진정한 보물이라고 생각해요. 평범한 볼펜으로 젓가락에 글자를 적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지금 봐도 경이롭죠. 이 공간은 이런 물건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가난하고 빈곤해 보여도 여기 있는 게 모두 저한테는 보물이고 자산이에요.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작업실 안에 있는 붓글씨 작품을 가리키며 파는 것인지를 묻는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신가 봐요.
많이들 문을 두드리세요. 재활용 센터나 상점인 줄 아는 사람도 많죠. 이 작품을 파는 거냐고 물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제가 굉장히 아끼는 작품이거든요. 제 제자가 이 근처에 사는데요. 그 친구 아버지가 붓글씨를 굉장히 멋있게 쓰셔서 봄이면 ‘입춘대길’ 같은 글자를 곧잘 써주시곤 했어요. 여기 적힌 글은 중국 속담이에요. 제가 워크숍이나 강연 때 자주 사용하는 글귀죠. ‘마음에 푸른 나무를 가꾸면 새가 울며 날아온다.’는 의미인데, 참 좋지 않나요? 그 친구 아버지께 이 글을 원문으로 받고 싶더라고요. 어느 날 그린캔바스에 놀러 온 제자한테 부탁했더니 그 친구가 말하길, 아버지가 루게릭병이라는 근육 감소증에 걸리셔서 붓글씨 작업이 힘드시대요. 받기는 어렵겠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 이 글씨를 가지고 찾아왔더라고요.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께 이야기를 꺼낸 모양인데 “한번 해보자.” 하고 써주셨대요. 참 감사한 일이죠. 아, 이것도 같이 보여 드려야겠네요. (필사 벽면에서 작품을 하나 떼어낸다.) 그 제자가 아버지 작품과 함께 가지고 온 《나무를 심은 사람》 필사예요. 이렇게 책 형태로, 종이를 하나하나 연결해서 병풍처럼 만들었어요. 글은 본인이 쓰고 그림은 딸이 그렸대요. 이 연결된 종이가 뭔지 아세요? (책을 뒤집는다.)
어? 약 봉투네요.
아버지가 드신 약 봉투를 하나하나 펼쳐서 재활용한 거예요. 수많은 약 봉투를 연결해서 하나의 병풍처럼, 길게 펼쳐지는 책자를 만든 거죠.
와…. 부피에 할아버지가 나무를 심어 다음 세대를 풍요롭게 했듯, 이 또한 그다음 세대와 연결되는 작품이네요.
이걸 보고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에 이렇게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겠죠. 옛날에는 그린캔바스에 누가 온다고 하면 흔쾌히 문을 열어줬어요. “윤 교수가 뭘 한다는데 한번 가볼까?” 하고 오시는 분이 많았죠. 근데 애들 장난 같은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을 이해하는 사람들만 들이게 됐어요.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처음에는 궁금해하는 사람들과 대화도 곧잘 했는데, 제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아지니까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하자는 연락이 오면 필사를 제안하기 시작했어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필사하면 어느 정도는 제가 하는 일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해하고 찾아오실 것 같아서요. 필사 얘기를 듣고 인터뷰 안 하겠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선생님이 필사하신 것도 보고 싶어요.
나는 뭐,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담아 작품처럼 만들려고 하진 않지만 계속 쓰고 있긴 해요. 얼마 전에는 영문판을 베껴 썼는데요. 영문판 중에서도 특별 기념판을 필사했는데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어요. 특별판이다 보니 서문이 세 개나 들어가 있거든요. 근데 서문 하나가 본문보다 길어요. 그것까지 다 쓰려니까 엄청나게 양이 많더라고요. (돌돌 말린 종이를 펼치며) 양면으로 써도 이렇게나 길어요. 이 종이는 저 앞 빵집에서 빵 사 먹고 모아둔 빵 봉투들이에요. 일부러 여기에 쓰려고 한 건 아닌데, 다시 쓰려고 하나둘 모으다 보니 많아져서 여기에 필사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한 장 한 장 연결해서 앞뒤로 빽빽하게 적었죠.
와, 색깔도 그렇고 꼭 양피지 같아요. 올해 9월에 하신다는 전시가 매년 하고 있는 <녹색여름전>이죠? 아이들과 어우러져서 환경 메시지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본 적이 있어요. 그땐 그게 <녹색여름전>인지, 선생님인지도 모르고 멋진 풍경이라고만 생각했죠.
지난해가 <녹색여름전> 15주년이라 2022년을 마지막으로 마치려 했는데, 《나무를 심은 사람》 작품이 계속 들어와서 올해도 해보려고 해요. 연령, 성별, 나이, 프로와 아마추어 상관없이 어떤 작품이든 출품할 수 있는 전시예요. 환경에 관한 메시지가 있으면 좋지만 굳이 없어도 상관없죠. 장르에 제한도 없어요. 우리의 의식주,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라면 뭐든지 좋아요. 생명에게 좋은 쪽으로 작용되는 것이라면 뭐든 출품할 수 있는 거지요. 이것 보세요, 이게 뭔지 아세요? (작업실 중앙에 놓인 것들을 가리킨다.)
흙…인가요?
똥이에요. 지렁이 똥과 소똥.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요. 생명을 틔우는 존재죠. 소똥은 하천을 오염시킨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렇게 모아서 퇴비로 사용하면 새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이건 포천에 있는 한 농장에서 출품해 주신 거예요. 자연적인 작품, 그 자체이지 않나요? 이 농장에서는 붉은 지렁이를 농장 흙 속에 뿌려 농사를 지어요. 빼곡하게 채워진 지렁이들이 똥을 싸면 땅이 부글부글 끓죠. 그걸 일일이 모아서 만든 거예요. 나와 환경을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지요.
그 옆에 있는 작품은 ‘테이프 공’이군요! (들어본다.) 굉장히 무거운데요?
맞아요. 그건 외국에도 출품했던 거예요. 2004년 킨텍스에서 <친환경 상품 박람회>가 처음 열렸는데요. 설치와 철거 과정에서 시트지가 대량으로 폐기되는 걸 보고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것들을 모아 붙여나가기 시작했죠. 이 공은 항상 곁에 두고 대량 생산과 대량 폐기의 문제를 상기해요. 특히 코로나19 이후로는 배달, 택배가 많아져서 포장용 테이프가 상당히 많이 나오거든요. 그 테이프들을 모아 똘똘 뭉쳐 공을 만들고 있죠. 계속 택배가 오가는 시대여서 테이프 공은 만들고 또 만들어도 계속 만들어지더라고요. 속까지 꽉 차 있어서 단단하고 무거워요.
어느 인터뷰에서 환경을 위한 실천을 위해서는 “자기만의 기준을 잘 세워보라.”고 이야기하셨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 기준도 들어보고 싶어요.
내가 진정으로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보는 거예요. 이 자연과, 생태계와, 이웃과, 모든 사물을 이롭게 하는게 무엇일지 생각하는 거죠. 제 눈초리 하나만으로라도 사람들 마음이 잠시라도 편해지면 좋겠어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선생님 눈빛을 잊지 않을게요. 올해 <녹색여름전>에서 뵈어요, 놀러 올게요.
올해도 부지런히 준비해 볼게요. 아, 필사 감상문을 하나 보내주세요. <녹색여름전> 전시 리플릿에 작품과 필사 감상을 함께 담고 있거든요. 영문으로도 번역해 주면 좋고요!
“부피에 할아버지에게 도토리를 한 알 빌리기로 합니다. 척박하고 흉흉한 상황에 놓일 때면, 속수무책으로 휩쓸리지 말자고, 도토리 한 알을 꺼내보며 누군가의 정성과 행동을 생각하자고 마음먹어 봅니다. 이내 그 도토리를 심고 매만질 사람이 제가 되리라 믿으면서요.” 필사 감상문의 한 대목을 옮기며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한 말은 지키면서 살아가자고.
‘스낵컬처’는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읽을거리를 소개합니다.
아모레퍼시픽과 어라운드가 함께 큐레이션한 콘텐츠를 통해 재미와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에디터 이주연
사진 Hae Ran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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