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 담긴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요약해 소개합니다.
제9화. 세계를 향한 우보천리(牛步千里)
1976년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중국에 이념 대 이념의 대결이 사라지고 실용의 시대가 막을 열자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갔습니다. 생산 공장으로도 소비 시장으로도 중국이 매력적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유수의 화장품 기업들도 1980년대부터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도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는 중국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곧 개방될 거야. 그러니 철저히 준비해 놓게."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이었지만, 서성환 님은 임원들에게 수시로 당부하곤 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기 위해 홍콩과 대만에 직원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성환 님의 예상대로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를 맺었고, 우리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회색빛이었습니다. 특히 화장품은 다른 품목보다 규제 장벽도 많았고 관세도 높았습니다. 방법은 현지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고 시장에 진출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세계 각지의 화장품 회사들이 중국 경제와 선진 문화의 중심이었던 상하이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생산공장을 건립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도 조사팀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상하이에 합작 법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성환 님의 생각은 달랐다. "상하이 말고 봉천으로 진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봉천은 선양의 옛 지명이었습니다. 서성환 님은 징용 당시 신의주를 거쳐 선양을 통과하며 강행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성환 님이 선양을 지목한 이유는 단지 과거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는 시세이도나 크리스찬 디올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한 상태여서 시장진입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반면 중국 동북 3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선양은 상대적으로 경쟁사들의 관심밖에 있어서 초기 안정적 진입이 가능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또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중국 심장부에서 사업하기 전에 중국 시장을 이해하는 마케팅 학습장으로 선양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먼저 중국 외곽 지역에서 경험을 쌓은 뒤 중국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우회 전략을 수립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처음부터 상하이로 들어간 기업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지만, 태평양은 상대적으로 중국에 대해 훨씬 깊이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태평양은 선양으로의 진출을 결정한 뒤 함께 합작회사를 세울 파트너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1993년 12월, 합작파트너인 '보암실업총공사'와 함께 '태평양보암화장품유한공사'를 설립했습니다.
선양에서의 사업이 안정화되자 태평양은 거점을 하나 둘씩 확대해 1995년에는 다렌에, 1996년에는 창춘과 하얼빈에 각각 분공사를 설립했습니다. 태평양이 국내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던 행보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서서히 느린 걸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탄탄하게 징검다리를 놓듯 확장해 나간 것입니다. 더 빠른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굳이 지름길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우보천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걸음으로 천리 길을 간다는 뜻이기도 하고, 천 리 먼 길을 가려면 소걸음처럼 긴 호흡으로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990년대가 지나갈 때까지 서성환 님과 태평양은 당시의 세태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천천히 뚜벅뚜벅 소걸음처럼 발 앞 한자만을 바라보며 자신 앞에 놓인 험로를 걸었습니다. 언젠가 타오르게 될 꿈의 불씨를 차근차근 피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