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 담긴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요약해 소개합니다.
제8화.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1970년대 중반, 국내 화장품 시장의 약 70%를 점하고 있던 태평양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한 우물만 파다가 자칫 쇠퇴의 길을 밟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성장이 어렵다는 우려감에 휩싸이자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은 사업다각화를 추진했습니다.
금융, 서비스 등 3차 산업에 비중을 두고 다각화를 추진한 결과 1990년 초에 태평양은 모두 23개의 계열사를 보유하는 거대기업이 되었습니다.
외형으로만 본다면 놀라운 성장과 확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수하거나 설립한 회사들이 대부분 부진의 늪에서 저조한 실적으로 태평양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1991년 5월 13일 저녁 무렵, 수원공장에서 파업 중이던 노조 조합원들이 본사를 점거했다는 긴급한 보고가 서성환 님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국내 산업계에 만연했던 노동운동, 노사분규의 아픔을 우리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25일 만에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문제 해결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이지 않는 형국이었습니다.
"직원들의 급여는 모두 정상적으로 지급하게."
다른 회사들이 파업기간 동안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을 적용했지만, 서성환 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주동자로 구속된 조합원들의 선처를 바라는 서한을 경찰서에 보내는 등 직원 구명에 최선을 다하자 노조 측도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의 파업보다 더 큰 문제는 회사의 경영상황이 악화되면서 부실 계열사들의 채무보증을 서던 태평양도 자금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서성환 님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화장품과 함께 울고 웃던 지난 세월의 잔상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차례로 스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즐거웠던 일, 힘든 일, 가슴 벅찼던 일 등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태평양은 왜 세상에 존재하며, 세상이 태평양에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끊임없이 본질에 대한 화두를 던지던 중 그는 끝내 버릴 수 없는 존재 이유로의 회귀, 즉 소명으로의 복귀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화장품을 할 것이다. 아니,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이것이 최대의 위기를 돌파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답이었습니다.
밤낮으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던 서성환 님에게도 1991년의 계속된 시련은 견디기 힘든 일들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폐암이라는 무서운 병마도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있었습니다.
서성환 님의 나이 68세. 폐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지 불과 45일 만에 그는 다시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다행히도 사업 구조조정도 원활하게 마무리되고 있었고, 기업 내부혁신도 서경배 님의 주도하에 흔들림 없이 진행 중에 있었습니다.
그 해의 끝자락 즈음, 서성환 님과 서경배 님은 녹차 한잔을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서성환 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회사의 의사 결정은 네가 했으면 싶다."
그렇게 거대한 그룹으로 위용을 떨치던 시대, 극한의 위기와 절망을 겪게 했던 시대를 뒤로하고, 다시금 50년 전의 자세로 새로운 출발점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