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는 이유 : 서오릉(西五陵) 이야기 - AMORE STORIES
#김재석 님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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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는 이유 : 서오릉(西五陵) 이야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번 화에서는 조선왕릉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조선왕릉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담은 1화를 시작으로 지금의 6화까지, 왕릉의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로 각 주제를 구성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왕릉의 위치와 주변 환경에 대한 이야기만 전하는 것은 마치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곳에 묻힌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덧붙여 소개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크고 작은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 되어 1910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보다는 역동성이 덜하지만, 지난 5화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조선도 역동과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외세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은 고려 시대 때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개방적인 문화가 혼란을 가져온다고 판단했고, 이를 극복하는데 사회적 자원이 집중되는 것에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국가를 운영했고, 점차 외부와의 소통에 빗장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개방에 대한 두려움과 성리학적 질서에 매몰된 집권 세력은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형태를 보이며 조선 후기 때 발전 기회를 잃고 맙니다.

 더불어 관용성이 다소 부족했던 집권 세력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미흡했고, 강력한 실행력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주변국들로부터 ‘문명국’이라는 호평을 받아온 조선은 대변화의 시기엔 결국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왕릉이란 문화재를 보면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했는지 상상해보곤 합니다. 우리도 위기와 기회의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고민해보고, 선택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런 선택의 과정에서 남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관용적 태도도 함께 갖춰야 하겠죠. 그렇지 않다면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옛 인물들이 했던 행동과 결과를 반복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번 화에서는 숙종의 명릉(明陵)이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을 통해 위기의 순간으로 가까워지는 조선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개혁의 시기를 놓치다 : 동궐도(東闕圖)를 보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궁궐 전경을 복제한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궁궐의 전각 위치를 세밀하게 표시한 동궐도입니다. 전문가들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한 폭에 담은 동궐도가 1824년과 1828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원본은 서울 고려대 박물관, 부산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려대가 제249-1호, 동아대가 2호입니다.) 동궐도를 보고 있자면 조선의 멋진 왕궁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동궐도는 조선 순조(純祖) 집권기에 그려졌습니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집권해 정순왕후(貞純王后, 영조의 계비) 수렴청정기를 포함 무려 34년 동안 재위한 왕입니다. 이 시기에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됐고, 서북지역 차별에 반대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순조는 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를 통해서 개혁 활동을 전개했지만, 효명세자는 이른 나이에 운명했습니다. 이후 순조는 개혁을 멈추고,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4년 뒤에 승하합니다. 순조가 묻힌 인릉(仁陵)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데 다른 왕릉에 비해 굉장히 높은 곳에 있습니다. 외부 세력(천주교)의 도발을 막은 공로를 순조에게 돌리면서 당시 집권 세력들이 높은 능선에 순조의 왕릉을 세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래 인릉은 파주에 있는 인조의 장릉(長陵) 주변에 위치했으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하여 태종이 묻힌 헌릉(獻陵) 주변으로 이장됐습니다. 그의 왕비인 순원왕후도 승하하자 합장릉으로 조성됐습니다.

 여담으로 근처에 국가정보원이 위치해 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선왕릉 등재를 위해 실사할 때 “국가정보원이 문화재청 산하 조직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담당자가 잠시 당황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효명세자와 순조의 죽음으로 조선의 개혁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후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가 확산되며 조선은 세계적 대변화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웃한 청나라는 당시 건륭제의 뒤를 이은 가경제가 집권하던 때로, 백련교도의 난을 겪으면서 쇠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서구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산업혁명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서구권의 발전과 동시에 아시아의 힘은 약해지고 있었으니, 이는 아시아가 가졌던 세계 경제의 주도권이 유럽 국가들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서양 중심의 세계사가 진행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순조 시기에 조선은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게 변화하고 있음을 포착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이 죽고 공화정이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사대부들 사이에선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영조와 정조 시대의 경제 발전으로 인하여 신분제가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순조의 개혁 활동은 이를 실제로 추진하던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결국은 기득권의 보수화와 조선 밖 세상에 대한 관용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집권 세력의 상황 인식의 부족은 그들의 무능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숙종(肅宗)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당쟁의 영향이 컸습니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다 : 서오릉의 주인공 숙종(肅宗)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 왕릉군입니다. 이름 그대로 모두 5기의 왕릉이 있습니다. 서오릉은 4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묻히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예종과 안순왕후의 창릉(昌陵), 의경세자와 소혜왕후의 경릉(敬陵)이 있습니다. 이 경릉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보통 왕과 왕비가 묻히면 왕이 왼쪽에, 왕비는 오른쪽에 배치가 되는데 이곳은 소혜왕후가 왼쪽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것은 의경세자는 세자의 신분으로 돌아가시고, 소혜왕후는 대비의 신분으로 승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인지 의경세자에 비해서 소혜왕후의 능이 더 크고 많은 석물이 있기도 합니다.

 그후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가 각각 묻힌 명릉, 영조의 첫 번째 왕비인 정성왕후의 홍릉(弘陵) 순으로 왕릉이 조성되었습니다. 홍릉은 원래 영조가 같이 묻히기를 원했던 곳이어서 다른 조선왕릉과 달리 옆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조의 원릉(元陵)은 그의 손자인 정조에 의해서 동구릉에 조성되고, 그는 두 번째 왕비인 정순왕후와 같이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와 공회빈이 묻힌 순창원(順昌園)과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의 수경원(綏慶園), 숙종의 왕비였지만 후궁으로 격하되고 사사(賜死)된 장희빈의 대빈묘(大嬪墓)가 추가로 조성되었습니다.

 서오릉은 조선왕릉의 특성상 넓은 숲과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 군사보호구역이었기에 보존이 매우 잘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양시 주민은 50%의 가격으로 입장이 가능합니다. 조선왕릉은 국가 정책에 따라서 무료로 관람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주차장이 큰 편이 아니라서 차량 이용 시에 조금 일찍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매년 10월 중순경에 서오릉을 주제로 하여 ‘서오릉 가을애’라는 행사를 진행합니다(올해는 이미 실시되었습니다. 내년에 기회가 되시면 방문하면 좋겠습니다.).
 서오릉에 들어가면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것이 숙종과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의 쌍릉입니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경왕후)는 사도세자의 어머니의 수경원을 지나면 나오는 익릉에 모셔져 있습니다. 인경왕후가 젊은 나이에 승하하면서 인현왕후가 두 번째 왕비로 들어오게 됩니다.

 현종의 세자인 숙종은 그가 승하한 후 즉위하게 됩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조선의 임금 중에서 최초로 해외(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조선은 혈연관계에 기반한 왕위 계승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숙종은 그 현종의 맏아들이자 효종의 장손으로 조선에서 보기 드물게 적장자 출신에 원자, 세자 등의 단계를 밟은 왕이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올라온 왕은 4화의 단종과 연산군과 5화의 중종의 아들인 인종,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순종뿐이었습니다. 문종과 현종도 적장자였지만 태어났을 때는 왕이나 세자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숙종은 13세의 나이에 현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는 대비의 수렴청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친정을 진행한 왕이었습니다. 그것은 숙종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숙종 집권기에 중요하게 언급되는 사건은 환국(換局)입니다. 환국은 갑작스럽게 정치적 주도권을 지닌 세력이 교체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숙종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활용하여 집권층을 순식간에 바꾸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오릉에 묻힌 인현왕후, 장희빈, 인원왕후 등의 왕비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계됩니다.

 숙종 시기의 집권 세력은 현종 때의 예송 논쟁을 통해서 대립해 온 서인과 남인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숙종이 초반기에 남인의 권력이 커지자 경신환국(1680년)을 통해서 서인을 발탁하였습니다. 이후 서인 중심으로 정치활동이 이루어졌고, 숙종은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서인세력에서 지지한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와 국혼(왕과 왕비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에 남인 계통의 장희빈이 왕자(뒷날 경종)를 출산하자 숙종은 왕자를 원자로 삼았는데, 서인 세력이 송시열을 비롯하여 숙종에게 강력하게 반대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숙종은 이에 대하여 서인 세력을 바로 축출하고 남인 중심으로 집권 세력을 교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희빈은 왕비가 되고 인현왕후는 서인(왕비에서 일반 백성으로 전환)이 됩니다. 이 사건을 기사환국(1689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집권 남인 세력의 적극적이지 못한 국정 운영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숙종으로부터 총애받던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그 총애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중전(장희빈)을 고발하고, 이를 빌미로 숙종이 중전을 폐서인하고 서인 세력을 등용하면서 남인을 축출하는 갑술환국(1694년)을 일으킵니다. 서인 세력이 남인에 대한 처벌에 관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되나, 사실상 서인 세력이 정권의 핵심을 유지하면서 조선 후기 정치 환경을 주도하게 됩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서 집권 세력을 자유롭게 교체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많은 업적을 세웁니다. 숙종은 인조 이후로 지속되어 온 군약신강의 흐름을 깨는 왕이었습니다. 숙종은 광해군 시기에 시작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였고, 단종을 신원(다시 작위를 올림)하여 과거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국방 체제를 완비하는 활동도 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움으로써 조선의 북쪽 경계를 확실히 하고 동쪽으로 울릉도, 독도의 귀속문제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최대의 난제였던 당쟁을 이용하여 집권세력 간의 다툼을 유도하였고, 그 분열을 이용함으로써 건전한 비판 세력조차 사라지게 만들어 향후 세도정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숙종이 시작한 환국 정치로 후대의 경종과 영조 시기에 집권 세력간에 서로 죽이고 죽이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나타납니다.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한 이유들 중에는 일당의 독재 혹은 정파간의 극한 대립만이 유지되는 정치 환경으로는 국가 운영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영조는 군역을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 개혁 정치를 이끌어 갑니다. 그의 손자인 정조 시기에도 다양한 정치 세력을 등용하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정조 때 노론, 소론, 남인 등 다양한 당파가 국정에 참여하였고, 숙종 이후로 발전해온 경제는 신해통공으로 화려하게 꽃피웁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승하로 이전처럼 정치 세력간의 다툼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영조와 정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개혁 조치들도 함께 끝나게 되었습니다.

 순조 초기에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노론의 일당독재가 진행되고, 그 중에서 김조순의 안동 김씨 가문이 홀로 국가를 운영하는 세도 정치에 이르게 됩니다. 몇 번의 정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민본에 가치를 둔 조선의 기본 정신이 퇴색하기 시작했고, 이후 수탈적 측면이 강화되어 삼정의 문란 등은 조선 사회 내부의 갈등의 요인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로 인한 민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등 민중들이 반발하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개혁 조치를 취하면서 이런 부분들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외세의 간섭이 거듭되고 성리학적 질서 유지에 매몰되어 자체적인 개혁 활동의 미흡 등으로 조선왕조는 외세의 지속적 침입을 당하게 됩니다.

 같은 시기에 유럽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민중의 힘을 모았고, 그 동안의 축적된 힘으로 타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동궐도를 통해서 보았던 순조 시기는 바로 그런 역전이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숙종 시기부터 시작한 정치적 대립은 집권 세력의 보신주의를 키우게 되고 주변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한편 앞으로 다가올 국가적 위기에 적극적 대처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보면 아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이미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역사를 안다고 해서 미래를 예측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 비극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현실에서 선택한 것이 향후 무엇이 될 지 다양하게 고민해본다면 과거의 비극이 현재의 선택으로 인해서 미래의 희극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숙종은 1720년 46년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세우긴 했지만, 정치적 안정은 이루지 못한 채 승하합니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당쟁을 격화시켰고, 아들인 경종과 영조가 당파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왕비가 묻힌 서오릉에 능이 모셔지는데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그의 왼쪽 산등성이에 조성되어 있고,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의 왼편에 자신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도 숙종과 인현왕후를 바라보는 위치에 모셔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경기도 광주시에 있던 장희빈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는데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서오릉을 오시는 분들은 이 대빈묘를 꼭 찾아오는데 다른 무덤들에 비해서 매우 소박한 편입니다. 서오릉은 숙종의 왕비들이 모두 모여있는 특이한 왕릉입니다. 보통 왕비가 여러 명일 경우 특정인과 같이 묻히는 경우가 많아서 모든 왕비를 같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희빈의 대빈묘도 원래 다른 곳에 있었지만, 현대에 들어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숙종은 조선 국왕 중에서 유일하게 가족과 함께 잠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화를 마치며 : 문화유산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조선왕릉은 조선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이기 때문에 왕이 살아있던 그때의 궁궐 모습 그대로 왕릉을 조성했습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후계자들이 배례를 지내며 과거를 잊지 말도록 하자는 목적도 갖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왕릉을 보면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했을 것이고 실행에 옮겼을 것입니다. 숙종의 강력한 왕권은 내부적인 역량을 발전시키보다는 대립과 반목에 시동을 걸었고, 영조와 정조의 노력은 그 시기를 늦추는 데만 그쳤습니다. 위기는 갑작스러운 결과가 아닌 수많은 시간 동안 쌓여온 우리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것입니다.

 조선은 19세기 대변화 시기를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각자의 입장 차이도 중요하지만, 대국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정치는 카멜레온 같다’고 말합니다. 국가의 실익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공론화시키고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그에 대해서 누구도 입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약용이 유배 시절 실학을 집대성했던 서적을 간행하지 못하게 한 것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알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제 21세기의 우리는 그를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대해 선제 대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대해 고민하고 타인에 대한 관용성을 갖춰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것, 그리고 항상 변화를 인지하고 그를 터득해 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조선왕릉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의 왕릉에 비해서 조선왕릉은 과도한 치장을 지양했습니다. 그래서 중국 왕릉에 비해서는 다소 간소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서 왕릉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는 조선왕릉이 더 자연친화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1화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백성들의 어려움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한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중국왕릉은 왕이 살아 있을 때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노역의 강도가 조선왕릉에 비해 훨씬 높았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연 그 자체인 조선왕릉을 둘러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왕과 왕비가 살았던 모습도 함께 생각해보신다면 그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왕릉 속의 인물을 통해서 각자 삶의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해보는 것도 추천해 드립니다.

 지금까지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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