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한국인의 아파트 사랑 - AMORE STORIES
#문성민 님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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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한국인의 아파트 사랑


 안녕하세요. 서울 도시의 삶 다섯 번째 이야기 시간입니다.

 어느덧 <서울, 도시의 삶> 칼럼이 5화를 맞이했습니다. 벌써 추석 연휴가 지나 완연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라는 애국가의 가사처럼, 도시를 만끽하기 좋은 날씨인 요즘입니다. 오늘은 한국인의 아파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서울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를 가진 도시이기 때문에, 단독주택보단 아파트라는 집단주택의 주거 형태가 더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유럽의 고풍이 담긴 저층 주택이나 미국의 널찍한 잔디밭을 지닌 단독주택과 비교하면서 ''한국은 성냥갑처럼 생긴 아파트가 너무 많다"라며 자조적인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 집 마련을 위한 청약 신청 사이트 역시 ‘아파트투유’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만큼, 아파트는 단순히 한국인들이 지향하는 주거형태를 넘어 갖고 싶은 ‘소비재’가 되어가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아파트를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1. 도요타아파트부터 세운상가까지

한국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

 한국 최초의 아파트는 현재 충정로역 9번 출구에 있는 충정아파트 (당시 이름 ‘도요타아파트’)입니다. 건축가인 도요타 다네오의 이름을 따서 도요타아파트로 불리었으며, 한자어로는 풍전(豊田)아파트라고 표현합니다. 1937년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이 아파트는 해방 직후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인민재판소로 사용되다가, 서울 수복 이후에는 ‘Traymore Hotel’이라는 이름의 미군 임시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건물주의 용도 변경으로 코리아관광호텔로 운영되다가 1970년대 들어 다시 ‘유림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유림아파트가 바로 한국 최초의 아파트이며, 한 차례 이름을 더 바꿔 지금의 충정아파트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이기도 합니다. 1) 도요타아파트 : 연합뉴스 2010년 01월 26일자
  • 도요타아파트 (출처 : 서울신문)


연예인들이 살던 고급주택, 세운아파트

 서울시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이뤄지고 있는 종로 일대 세운상가는 원래 1960년대에 세워졌던 고급 주상복합 ‘세운아파트’였습니다. 당시 세운아파트와 같은 고층 아파트가 보편적이지 않았던 데다, 또 저층은 상가가 들어선 주상복합이었기 때문에 부호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연예인들도 많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연예인들의 출퇴근을 위해서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종류의 자동차들이 아침저녁으로 즐비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면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나,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구시가지였던 이곳이 40~50년 전에는 고급 주거지역이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2) 서울 역사 아카이브
  • 세운아파트 (출처 : KBS)



2. 시민아파트와 시영아파트 그리고 비극의 와우아파트

좁은 땅덩어리의 해결책, 아파트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가 동시에 급격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중심업무지구의 배후 지역이었던 마포, 동대문, 서대문, 옥수, 한남 일대에 무허가 판자촌들이 즐비하게 되었고, 이는 곧 도시빈민,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이에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과 정부는 아파트를 땅이 좁은 서울, 그리고 한국이 갖춰 나가야할 주거형태의 방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이 아파트를 새로 짓기 위해선 권리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비어있는 땅을 찾아야 했는데요. 주로 산등성이에 자리했던 무허가 판자촌은 사실상 법적으로는 비어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이 일대를 중심으로 아파트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아파트가 바로 금화시민아파트, 와우시민아파트 등이었습니다. 2019년 지금 아파트는 아주 고급스럽고 선망의 대상인 주거 형태지만, 당시에는 저렴한 가격에 맞춰 짓는 주거 형태에 불과했으니, 그리 좋은 환경이 갖춰지긴 어려웠습니다.

와우시민아파트의 비극

 2018년 마·용·성 돌풍의 주인공인 광흥창역 주변은 현재 고급 주거지역으로 발돋움하였는데요. 사실 50~60년 전이었던 1960년대, 광흥창역 일대 와우산에 지어진 시민아파트는 매우 안타까운 사연을 지녔습니다. 당시 부족한 자본과 ‘하면 된다’ 정신으로 정부는 매우 낮은 가격에 낙찰하는 방식으로 이 아파트의 건설허가권을 주었는데요. 이렇게 건설업체를 선정해서 입찰을 주고 나면, 낙찰받은 건설사는 다시 무면허 업자에게 하청을 맡기는 형식으로 공사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애초에 낮은 가격으로 설정된 공사비용에서 하청을 주니, 원청업체는 그만큼 이익을 남겨야 했고, 그러니 당연히 낮은 비용의 자재로 공사가 이뤄졌습니다. 와우시민아파트를 지을 당시 설계 기준은 1㎡당 280kg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설정됐는데요. 이는 사실 가재도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도시 빈민의 생활 수준을 염두에 둔 기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이 아파트에 입주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은 당장의 현금이 더 중요한 빈민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권리를 매도했습니다. 이 권리를 매수한 중산층은 이미 넘치는 가재도구(피아노 같은 크고 무거운 것들)를 갖고 입주했기 때문에, 1㎡당 900kg의 하중이 넘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3) 서울 역사 아카이브

 애초에 부실 공사로 지어진 건물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중까지 설계 기준보다 높으니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더 큰 문제는 이 아파트가 단 6개월 만에 지어졌다는 것인데요. 이 기간에 지반공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겨울철 언 땅 위에 바로 건설했기 때문에 이듬해 봄부터 문제가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죠. 봄이 되어 땅이 녹자 아파트의 기둥을 받치고 있던 지반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입주는 1969년 12월부터였는데, 불과 5개월만인 4월경 아파트의 한 동(15동)이 무너지면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 중 33명이 사망, 40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 와우시민아파트 (출처 : 중앙일보)



3. 여의도 시범아파트, 선망받는 아파트단지의 탄생

 많은 사람의 선망을 받는 아파트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대단지, 역세권, 평지, 브랜드 순일 것입니다. 이 ‘단지형 아파트’의 시조새 격이 바로 여의도 시범아파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시범아파트’라고 부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땅이 좁다는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아파트라는 주거형태가 꼭 필요한데, 와우아파트의 붕괴 등으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나빠졌습니다. 이러한 추세라면 더 이상 아파트를 보급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지어서 중산층의 주거 형태로 만드는 선례를 남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의도 시범아파트에는 이전 아파트에서 주로 사용하던 연탄 난방이 아닌 중앙스팀난방을 적용했고,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급장비인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으며, 단지 내 상가를 마련해 입주민이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는 시설을 완비했습니다. 이를 통해 미국의 도시계획가 클래런스 아서 페리(Clarence Arthur Perry)가 주창한 근린주구론이 대한민국에서도 실현되기에 이릅니다. 큰 도로를 건너지 않고 아파트 단지 내에서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바로 이 여의도 시범아파트단지는 한국인이 ‘아파트는 더 이상 위험하고 난립한 주거 형태가 아닌, 깔끔하고 편의시설까지 완비한 첨단 주거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전환점이었던 것이죠.
4) 김진희, 2011, 서울 1960-70년대 도시계획에서 「잠실지구종합개발기본계획」의 의미, 서울시립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여의도 시범아파트 (출처 : 중앙일보)



4. 주상복합의 등장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아파트 형태와는 거리가 있으나, 벌써 20년 전이 되어버린 2000년대 초반을 생각하면 주상복합이라는 주거 형태가 신성처럼 등장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바로 2002년에 짓기 시작해서 2004년에 완공된 타워팰리스입니다. 이 타워팰리스가 세워진 곳은 본래 삼성그룹이 1994년에 매입했던 도곡동 일대의 판자촌이 자리했던 땅입니다. 매입 용도는 그들의 사옥을 짓는 것이었는데요. 주민의 반대와 IMF로 인한 자금난으로 인해 사옥 건설을 포기한 대신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게 된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모든 땅은 법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종 주거지역/ 2종 주거지역/ 3종 주거지역/ 준주거지역/ 상업지역 등으로 나누어지는데요. 아파트는 기본적으로 주거지역에서만 지어질 수 있습니다(2~3종 주거지역). 주상복합의 경우 준주거지역 혹은 상업지역에 건설이 가능하지요. 이 땅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가는 용적률이라는 규제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용적률이 높을수록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면) 건물을 높게, 고밀도로 개발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주거지역의 용적률보다 상업지역 혹은 준주거지역의 용적률이 더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거지역에 지어지는 아파트보다 준주거/상업지역에 지어지는 주상복합 건물이 훨씬 고밀도로 건설될 수 있지요. 마치 홍콩 영화에서 본 그런 건물들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 1기 신도시였던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상업업무지구 일대도 오랜 기간 비어있던 땅으로 원래는 주민들의 주말농장 용도로만 활용되었던 곳입니다. 이후 이곳에 주상복합이 생겨나며 발전하게 되었고, ‘정자동 카페거리’라는 트렌디한 동네를 탄생시키며 분위기를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후 주상복합 주거 형태는 전국적으로 뻗어 나가 부산의 해운대 일대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 타워팰리스 (출처 : 매일경제)



5. 다시 단지형 아파트의 시대로

 이러한 트렌드가 이어지며 용산구에도 시티파크, 파크타운이라는 주상복합이 등장했는데요. 세계 본사 사우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자주 산책하는 주민센터 뒤 이촌동 방향 길이 바로 그곳입니다. 주상복합은 말 그대로 상업시설을 겸비한 주거 형태이기 때문에, 아파트처럼 담을 두르고 정문을 만드는 것을 조례를 통해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방된 주상복합 주변 지역에 조경을 통해 나름의 테두리를 설정함으로써 사람들이 선호하는 단지 형태의 모습을 띠게 했습니다.

 당시 주거 트렌드를 이끈 주상복합 이후 서울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1960년대 이후 개발되어 노후화된 아파트를 대상으로 재건축을 시행하게 되었는데요.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고 있는 주거 형태의 모습이 약 10여 년 전부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상징적인 아파트 단지는 바로 서초구 반포동의 반포자이인데요. 해당 단지는 반포주공3단지를 GS건설이 재건축했으며, 지하 공간을 확보해 모든 차가 지하로 통행하게끔 하고, 조경으로 지상 공간을 꾸며서 아파트 단지를 마치 공원처럼 만든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거기에 수영장, 카페, 독서실, 상가 등 각종 편의시설을 만들었으며, 단지 내 시설은 입주민용 카드를 통해 결제하고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시그니처 아파트 단지의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한민국을 강타한 이 주거 형태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반포자이 (출처 : 조선비즈)

 대한민국에 아파트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에는 남산 부근의 외인아파트 같은 고급 주거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붕괴된 일부 시민아파트처럼 사람이 살기 위험한 성냥갑으로 인식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지나 사람들의 Needs와 Wants를 반영한 재화로 재탄생해오면서 아파트는 차츰 의식주를 채우기 위한 필수재에서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소비재, 또는 그 이상의 사치재로 거듭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사에 위치한 단독주택들이 그 도시의 디자인을 구성하는 요소이고, 홍콩의 스카이라인을 구성하는 고층 주상복합시설들이 그 지역의 상징이라면 아파트는 어느덧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도시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합니다. 개발 시대에 공적 자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공이 만들었어야 했던 녹지와 기반시설을 민간영역의 자본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도시를 구성하면서 경제학 용어로 ‘외부경제의 긍정적 효과’가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사우 여러분도 이 도시를 거닐 때 근처 아파트 단지들도 찬찬히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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