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자존감 수업’ - AMORE STORIES
#이재은 님
201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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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림책으로 시작하는 '자존감 수업'

칼럼니스트이재은 님
아모레퍼시픽 조직문화개발팀


 사우 여러분,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요즘은 명절마다 '친척 오지랖 막는 방법'이 화제입니다. 이 오지랖은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어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 무서운데요. 학생 시절의 '요즘 몇 등 하니?'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취업은?' '결혼은?' '아이는?'의 3종 관문을 모두 거치고 나서도 도무지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사회가 암묵적으로 대한민국의 멀쩡한(?) 시민이라면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답을 정해두고, 그 정답이라는 옷에 5,000만 국민을 모두 맞추어보며 '너는 너무 작구나' '너는 너무 크구나' 하고 평가하는 듯합니다.

 그럼 명절만 피하면 우리는 이 같은 모든 굴레에서 자유로워질까요?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내가 진짜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보다 '남들은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혹은 '내가 이런 선택을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가 먼저 생각나지는 않으시던가요? 우리는 타인의 눈으로, 어쩌면 타인보다도 더 혹독하게 자신을 검열함으로써 미래에 자신이 경험할지도 모르는 실패나 입을지 모르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수많은 걱정의 대부분은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일이었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으며, 저지른 후회보다는 하지 못한 후회가 깊고 길게 남습니다.

 오늘은 두려움의 껍질을 깨고, 세상이 씌우려는 굴레에 맞서 나만의 길을 개척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왜 꼭 왕자가 공주를 구해야 하지?" 세상의 편견에 강펀치를 날리다
– 로버트 먼치 글/마이클 마르첸코 그림, <종이봉지 공주>

 미국의 첫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자서전 <마담 세크리터리>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내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 다들 남성 중심의 외교 무대에서 여자가 이슬람 국가나 가부장적인 국가들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며 수군거렸지요. 하지만 이제는 어떤가요? 존 케리*가 국무장관이 되었을 때 손녀가 묻더군요. '할머니, 남자도 국무장관이 될 수 있는 거예요?'라고요"
* 오바마 정부 2대 국무장관으로, 콘돌리자 라이스(2005~2009), 힐러리 클린턴(2009~2013) 등 여성 국무장관 시기를 거쳐 9년 만에 남성으로 국무장관이 되었다

 여기 "여자가 국무장관이 될 수 있을까?"와 같이, 지금의 시각으로는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그 첫 걸음을 떼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 책이 있습니다. 바로 <백설 공주>부터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심지어 우리의 친구 슈퍼 마리오에 이르기까지 숱한 동화에서 반복되어온 '왕자(혹은 용사)가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에 대한 의문과 반기입니다. '왜 꼭 왕자가 공주를 구해야 하는 거지? 용사가 모험하고 성장하러 다니는 동안 공주는 갇혀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낯설지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질문에서 시작된 이 책의 이름은 <종이 봉지 공주>, 캐나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동문학가인 로버트 먼치와 마이클 마르첸코 콤비의 대표작입니다.
 <종이 봉지 공주>에는 우리가 흔히 보던 동화들처럼 왕자와 공주, 그리고 불을 뿜는 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용에게 끌려간 것은 공주가 아니라 왕자이며, 주인공 공주는 왕자가 용에 잡혀가자 그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동화 속 공주의 상징이던 예쁜(하지만 도통 활발하게 움직이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는 용이 다 불태웠기 때문에 길에서 주운 종이 봉지 한 장만이 공주가 걸친 전부입니다.

 용을 만난 공주는 힘 대신 재치로 용을 제압합니다. 한번 불을 내뿜으면 50개의 마을을 태울 수 있고, 10초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용이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힘을 자랑하게 만들었을 뿐인데 용은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써버립니다. 용을 쓰러뜨린 공주는 드디어 왕자를 구출해냅니다. 그럼 이제 백설 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그랬듯 왕자는 자신을 구해준 공주의 용기에 감탄과 감사를 표하고, 그들은 이제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여기에 <종이 봉지 공주>의 두 번째 반전이 있습니다. 공주 덕에 용에게서 풀려난 왕자는 고마워하기는커녕 공주의 옷을 타박합니다. "진짜 공주처럼 입고 다시 와!" 종이 봉지 공주는 그제야 자신 앞에서 '공주다움'을 운운하는 허울뿐인 '왕자'의 본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련 없이 왕자를 버리고 떠나는 공주 앞에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며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동시에 밀려왔던 아쉬움과 고마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내가 어릴 때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이제는 '성에 갇혀서 꽃처럼 기다리기'나 '예쁜 드레스 입고 공주답게 행동하기' 같은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해줄 그림책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는 고마움 말이죠.

세상의 모든 위대한 것은 작은 점에서 시작되었다,
- 피터 레이놀즈 글/그림, <점>

 <종이 봉지 공주>가 세상이 씌운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걷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면, 역시 캐나다 작가인 피터 레이놀즈의 <점>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주저앉히는 두려움의 벽을 넘는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첫 시작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신입 사원 때, 혼자서 첫 기획서를 쓴 날을 기억하시나요? 워드나 피피티를 켜두고 제목은 뭐라 할지, 박스가 좋을지 표가 좋을지, 장황하지 않으면서 내용이 빠짐없는 기획서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지, 내일 선배나 팀장님이 그걸 보면 뭐라고 하실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차마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깜박이는 커서만 쳐다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점>의 주인공 베티에게도 시작은 어려웠습니다. 미술 시간, 친구들이 이것저것 신나게 도화지를 채울 때 베티는 깨끗한 도화지 한 장을 앞에 두고 책상과 눈도 마주치지 못합니다. 그때 선생님이 말합니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한번 시작해보렴" 마음처럼 손이 따라주지 않아 짜증이 난 아이는 펜을 들어 책상을 힘껏 내려치며 점 모양의 생채기 하나만 종이에 남깁니다. 이 점을 한참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다시 도화지를 베티 앞에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씀하셨죠.

"자, 이제 네 이름을 쓰렴"

 일주일 뒤 미술 시간, 베티는 선생님 책상 위에 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근사한 금색 액자에 들어 있는 그림은 다름 아닌 자기가 홧김에 찍은 바로 그 '점'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달고 걸려 있는 점을 보고 베티는 무언가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흥! 저것보다는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어!' 그리고는 마침내 화구를 꺼내 그림을, '점'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노란 점, 초록 점, 빨간 점… 한번 마음에 시작점을 찍고 나니 점에서 잉크가 번져 나오듯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칩니다. 이런저런 색깔을 섞어 새로운 색의 점을 만들고, 아주 작은 점들을 조심조심 찍다가 팔을 쭉 뻗어 어마어마하게 큰 점을 그리기도 하고, 마침내는 점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점을 만들기도 하고… 처음에는 그냥 펜이 지나간 자국에 불과하던 베티의 점은 하나둘 모이며 다채로운 하나의 세계를 이룹니다. 학교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에서 큰 벽 하나를 가득 메운 베티의 점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지요.
 전시회에서 한 아이가 베티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말합니다.

"누나는 정말 대단해. 나도 누나처럼 잘 그리고 싶어!"
"너도 잘 그릴 수 있어"
"내가? 아니야, 난 정말 못 그려. 자를 대고도 똑바로 못 그리는걸"

 아이는 마치 흰 도화지를 앞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베티처럼 시무룩하게 대답합니다. 그런 아이를 보고 베티는 빙그레 웃고는 흰 도화지를 내밉니다. "한번 그려봐" 아이는 쭈뼛쭈뼛 종이에 선을 긋습니다. 펜을 쥔 아이의 손이 자신감 없이 떨립니다. 그리고 그 삐뚤삐뚤한 선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 든 베티는 다시 그 종이를 아이에게 돌려주며 말합니다.

"자, 이제 네 이름을 쓰렴"

 '점'과 '이름'은 우리의 초라하지만 또한 찬란한 시작의 순간들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은유입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실패가 두려워 점조차 찍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곤 하지요. 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단 하나씩 점을 찍으면, 그리고 그 점들이 나의 '이름'을 쓸 수 있을 만큼 부끄럽지 않게 나다운 행보를 이어간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점이 아니라 내 이름을 건 하나의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움을 넘어 걸어온 길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이 되고, 새로이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세계가 되지요.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에서는 한 흥미로운 심리학 연구가 등장합니다. 동화에서 독창적인 성과를 강조하면 그다음 세대는 훨씬 혁신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1810년에서 1850년 사이 동화책에서 '독창적 목표 달성'이라는 주제가 등장하는 비율이 66% 증가하자,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이 경제활동인구의 중심축이 된 1850년에서 1890년 사이 특허출원 비율이 7배 급증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책은 발간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새로운 가치를 배울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한 두 책의 작가가 그림책 작가인 동시에 교육자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또한 그림책의 이러한 역할과 떼어 생각할 수 없겠지요.

 어느덧 2018년이 4분의 1 조각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나 개인적으로나 가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오는 한 해를 준비해야 할 때지요. 우리는 이미 어른이(?)가 되었지만, 그림책에서 앞으로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배우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오늘 소개해드린 두 책에서 2018년 여러분을 괴롭혔던 굴레나 두려움을 떨쳐낼 용기를 배워보시길, 그래서 내년을 두 팔 벌려 맞이할 거침없이 새로운 점들을 하나씩 찍어가는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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