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국내외 대표 영화 프로듀서들에 대하여(2) - AMORE STORIES
#강승민 님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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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국내외 대표 영화 프로듀서들에 대하여(2)



 지난번 칼럼에서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 제작자 세 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4회 칼럼 바로가기 →

 이를 통해 제작자, 즉 프로듀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와 할리우드가 지금까지도 영화산업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노련미를 가진 제작자의 공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요.

 이번 칼럼에서는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견인했던 대표적인 제작자와 당대 한국 영화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프로듀서는 누가 있는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사람들 : 이태원, 강우석, 차승재 그리고 정승혜

 지금의 한국 영화가 이 정도로 발전된 산업적 규모를 지니고, 세계적인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영화인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과거 정치적 외생변수에 따라 부침이 컸던 한국 영화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뚝심으로 영화 제작을 이끈 이태원, 강우성, 차승재 그리고 정승혜 이 네 사람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들입니다.
  • 임권택 감독의 역작 <하류인생> (출처 : 태흥영화사, 시네마서비스)

 - 이태원 대표의 태흥영화사가 제작한 작품 : <뽕>, <기쁜 우리 젊은 날>, <장군의 아들>, <경마장 가는 길>, <서편제>, <하류인생> 등

 80년대 초반 3S정책으로 촬영본이 모두 가위질을 당하거나 편집권을 잃던 시기, 이태원 대표 또한 시시껄렁한 국책영화를 만들다가 1984년 이장호 감독을 만나 <무릎과 무릎 사이>를 제작하며 당시 인텔리 영화인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합니다. 그 후 이태원은 당시 청년 영화감독이었던 배장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흥행시키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이태원 대표의 태흥영화사는 90년대 한국 영화계 뉴 웨이브의 허브가 되었습니다. <어른들은 몰라요>의 이규형, <경마장 가는 길>의 장선우, <그후로도 오랫동안>의 곽지균, <개그맨>의 이명세, <장미빛 인생>의 김홍준 등 지금의 봉준호, 박찬욱 감독이 ‘선배’라고 평소 언급하는 감독들이 모두 이태원 대표를 통해 대표작을 만들었고, 충무로에서 그 이름을 떨쳤습니다.

 특히 이태원 대표를 말하면서 임권택 감독을 빼놓기는 어려운 일인데요. 임권택 감독의 출세작인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제작하며, 태흥영화사를 지금으로 치면 빅히트엔터테인먼트로 만든 이태원은 명실상부 방시혁이었으며, 임권택은 BTS와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예술에 대한 관점 또한 같은 곳을 바라봤을 것이 분명한 임권택과 이태원은 그 후 <서편제>, <취화선>, <춘향뎐>, <하류인생>과 같이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백한)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승승장구 해왔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태흥영화사와 함께 작업하며 다음과 같은 평을 받습니다 : “한국의 지정학적 실존을 그대로 형식에 담았던 아티스트”, “그 누구보다도 21세기에 가장 영화를 실험적으로 만드는 감독”, “(뜬금없어 보이지만) 가장 왕가위처럼 영화를 찍는 감독” (*출처 :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정성일 인터뷰 집)) 믿는 것에 대한 확신과 자본에 타협하기 보단 설득하는 이태원의 매니지먼트가 있었기에 임권택은 그 자신의 예술적 '화양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간혹 우리들은 예술가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미학적 성취보다는 경력이 얼마나 오래 됐는지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노년의 나이에 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어른에 대한 예의로만 그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노장의 선견지명”, “연륜이 묻어나는 깊이” 등과 같이 고민 없는 레토릭은 오히려 실제 작품과 예술적 성취를 절하시킵니다. 클린틴 이스트우드 감독과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그랬고, 임권택과 그의 소울 메이트인 이태원이 그렇습니다.

  이태원이 임권택과 함께 이뤄낸 영화적 성취는 매우 혁신적인 형식이었고(<춘향뎐>), 역사와 시대에 대한 예의가 있었으며(<하류 인생>), 예술과 영화 만들기에 대한 한탄(<취화선>)도 녹아 있었습니다. 연륜으로 치부할 것이 아닌 당대 예술가와 견줄만한 노장들의 ‘피, 땀, 눈물’이 지금의 한국 영화 산업을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됩니다.
  • 강우석 표 서사와 캐릭터의 원전 <공공의 적> (출처 : 시네마서비스)

 - 강우석 대표의 (구) 시네마서비스가 제작한 작품 : <마누라 죽이기>, <투캅스>, <공공의 적>, <실미도>, <신라의 달밤>, <사랑니>, <고산도> 등

 강우석은 힘 있는 서사의 영화들을 직접 연출하며 감독으로 먼저 이름을 날렸는데요. 이후 시네마서비스라는 제작사를 차리며 연출과 함께 제작자로서까지 영향력을 떨치게 됩니다. 그가 기획하고 프로듀싱한 <미스터 맘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당시 도도한 외화의 물결 속에서 유일하게 흥행했던 한국 영화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오랜 연출과 감독 경험을 기반으로 대중의 소구점을 명확히 짚어 낸 제작자로 유명합니다. 섣불리 모든 장면에 관여하거나 감독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보다는 예리한 컨셉과 메시지, 명확한 마케팅 MOT(Moment of truth)을 기반으로 영화 제작의 스튜디오 시스템화를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는데요. 90년대를 대표하는 충무로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강우석은 200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작품을 흥행에 성공시키며 스타 제작자로 이름을 널리 알립니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라는 작품을 계기로 충무로에 거대 자본이 유입된 이후 한국 영화 산업의 상황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는데요. 강우석은 섣불리 대기업에 편승해 인하우스로 영화를 제작, 배급하지 않고 뚝심을 유지하며 자신의 회사를 지켜냈습니다. 그는 2003년 씨네21이 조사한 한국 영화를 움직이는 영화인 1위에 선정되었는데, 2000년대 초반 당시 한국 영화가 큰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음을 고려하면, 이런 결과는 강우석이 지닌 파워를 간접적으로 짐작하게끔 합니다. (심지어 그의 커리어 정점은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강우석은 충무로의 ‘큰 형’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 많은 후배의 데뷔작에 전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스크린 쿼터 등 민감한 사안에는 발 벗고 나서는 등 오랫동안 영화계에 큰 버팀목으로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정신은 아직 미취학 아동인데, 몸만 사춘기를 넘겨버린 10대 청소년과 같았던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계에서 강우석의 뚝심과 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영화계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 좌 : 영화 <싱글즈> , 우 : 영화 <플란다스의 개> (출처 : 싸이더스)

 - 차승재 대표의 (구) 싸이더스FN이 제작한 작품 : <비트>, <8월의 크리스마스>, <플란다스의 개>, <결혼은 미친 짓이다>,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싱글즈> 등

 강우석이 한국 영화가 아직 산업으로서 외형을 막 갖추기 시작한 전후 시기의 1세대 제작자라고 한다면, 차승재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충무로 호황기에 영화를 제작해온 2세대 대표 제작자입니다. 1997년 <쉬리>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충무로에는 물밀듯이 자본이 쏠리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그 몰리는 돈을 다 어디에 써야 할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트리트먼트(시나리오와 시놉시스의 중간 단계)조차 검토하지 않고 대규모 자본만 쏟아부어 흥행에 참패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생겨났습니다. 모두가 돈에 혈안이 된 이 시기에 파수꾼과 같은 역할을 하며 비즈니스와 예술의 경계에서 균형을 조율한 사람은 심재명과 차승재였습니다. (심재명 대표에 대한 소개는 3회 칼럼에서 상세 소개)

 차승재는 소위 ‘코리안 뉴 웨이브’의 중심에 있었던 제작자로 유명한데요. 그가 제작한 영화와 그가 발견한 감독은 모두 당대 한국 영화의 미학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요한 작품과 인물들이었습니다. <비트>의 김성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등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감독들이 모두 그와 첫 장편 데뷔작을 만들었고, 흥행 여부를 떠나 이 영화들로 예술적 인정을 받거나 산업의 총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고다르, 트뤼포, 리베트, 샤브롤, 로메르에 비견될만한 ‘차승재의 감독’들은 그야말로 자본과 영화 교육의 풍족함 속에서 거칠 것 없이 재능을 펼치던 르네상스였습니다.

 영화 제작의 부침과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산업 재편의 분위기 속에서 현재 차승재의 파워는 예전 같진 않지만 그가 기반을 쌓았던 충무로의 르네상스는 지금의 한국 영화의 토대를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영화 <왕의 남자> (출처 : 영화사 아침, CJ E&M)

 - 故 정승혜 대표의 (구) 영화사 아침이 제작한 작품 : <달마야 놀자>, <광복절 특사>,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불신지옥> 등

 2006년 대장암으로 사망한 정승혜 대표는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아낌없이 쏟았던 프로듀서였습니다. 그녀는 1989년 영화사 신씨네에 입사해 카피라이터로 영화 일을 시작했고, 이준익, 강우석, 박찬욱 감독 영화의 마케팅 일도 도맡으며 제작자로서 꿈을 키웁니다. 꼼꼼함과 과단성을 동시에 보여주며 <달마야 놀자> 시리즈를 흥행시킨 저력을 보여준 그녀는 <야수>, <한반도>, <투사부일체> 등의 선 굵은 영화를 제작하는 동시에 <사랑을 놓치다>, <각설탕> 등 섬세한 영화도 세상에 내놓으며 정승혜 특유의 색깔을 충무로에 불어넣습니다.

 특히 “사람 냄새 나는 영화를 평생 만들고 싶다”던 정승혜 대표는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주로 제작하며 영화사 아침의 이름을 드높이게 됩니다. <라디오 스타>, <왕의 남자>는 1,000만에 가까운 흥행 기록을 세웠고, <님은 먼곳에>, <즐거운 인생>처럼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의미가 깊은 영화도 함께 만들어 왔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정에 약한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도 친한 영화인들을 다독였다고 하는데요. 영화를 보는 심미안, 감각과는 별도로 정승혜 대표는 따뜻함을 매개로 많은 영화인과의 네트워크를 맺었습니다. 그녀가 제작하는 영화가 아니어도 역할에 어울리는 배우나 감독을 다른 영화에 추천하거나, 적재적소에 적절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등 영화계 내 인력 순환과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작자라도 내 영화사의 작품에만 신경 쓰는 사일로(Silo) 현상이 만연한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정승혜 대표의 마음가짐은 모든 영화인들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충무로를 더욱 온기가 넘치는 영화인들의 공동체로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작자들의 역량이 가장 두드러졌던 때인 2000년대 후반, 우리가 기억하는 스타 프로듀서의 명맥이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2.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그러나 또박또박 : 당대 중요한 제작자들

 2010년에 접어들면서 금융위기와 함께 충무로의 자본들이 썰물처럼 빠져버리고, 대기업은 안정적인 수익을 위해 투자와 배급, 극장 산업을 일원화하며 영화산업을 재편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영화의 위기가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도래한 시기도 이때입니다.

 “투자·배급 쪽에서 잘 나가는 감독들과 직접 거래를 하기 시작하면서 제작자층이 옅어지게 되고, 그 파급 효과가 드러난 것”(*출처 : 연합뉴스, 다시 고개 드는 한국 영화 위기론…"볼만한 영화가 없다", 전찬일 평론가)으로 일갈되던 2010년대는 성숙기를 맛보지 못한 한국 영화의 하락기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낮은 목소리’이지만 또박또박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으며 힘찬 행보를 보여주는 제작자들이 있는데요. 우선 <신과 함께>, <미녀는 괴로워>등을 흥행시킨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현재 가장 타율이 좋은 제작자로 유명합니다. 곽신혜 바른손 E&A 대표는 영화잡지 <키노>의 기자 출신이며, 곽경택 감독의 동생이자 정지우 감독의 아내로, 최근 <기생충>을 제작하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높은 퀄리티로 탄생할 수 있게 끝까지 힘을 쓴 인물입니다.

 특히 요즘 들어 가장 돋보이는 제작자로는 <완벽한 타인>을 제작한 박철수 필름몬스터 대표가 있습니다.
  • 좌 : 기획영화의 모든 장점을 다 갖춘 <완벽한 타인>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우 : <완벽한 타인>을 제작한 박철수 필름몬스터 대표 (출처 : 이코노미 조선)

 그는 CJ E&M 전략기획팀장 출신으로 <댄싱퀸>, <완득이>, <써니>, <늑대소년>, <명량> 등의 영화를 담당했었고, 최근 필름몬스터라는 영화사를 설립하여 <완벽한 타인>을 흥행에 성공시켰습니다.

 박철수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영화를 기획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은 딱 두 가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가?’ 그리고 ‘상업적인 가능성이 있는 영화인가?’이다. 이 영화를 왜 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진 후, 계산을 해 본다. 대본을 받으면 배우는 자신의 배역을 보고, 촬영 감독은 콘티를 짜고, 제작자는 견적을 뽑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대본을 받으면 배우 캐스팅에 얼마를 쓰고 어떤 감독을 섭외하고, 어떤 업체를 쓸지를 고민한다.”(*출처 : '영화 대본 받으면 견적부터…철저한 시장분석 뒷받침' 기사 일부)

 투자배급회사 출신답게 지극히 ‘시장질서주의자’인 박철수는 수익을 거두기 위해선 모든 기준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야한다는 패권주의보다는, 각 기능이 제 자리에서 소명을 다하기 위해 기본적인 본질부터 되짚는 실용주의자인 동시에 온건한 애덤스미스 학파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예술의 자리에서 시작하든, 산업의 자리에서 시작하든 양극에서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본질에 집중하여 각자 소명을 다하는 것’, 이것이 스튜디오의 역할인 동시에 모든 기능을 조율하는 제작자의 본령일 것입니다. 지난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큰 화제를 이끌었던 <완벽한 타인>은 소박하지만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정확히 알고 허튼 과장을 지양하는 정직한 상업 영화였습니다. 앞으로 필름몬스터의 행보가 기대되는 바입니다.
  • 엣나인 필름이 제작한 2019년 올해의 성취 <벌새> (출처 : 엣나인필름)

 2010년 이후부터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내는 스튜디오와 제작사를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데요. 반면 독립영화 시장에서는 나름 고유의 색깔을 지닌 영화 레이블이 속속 등장하며 작은 파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최근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독립영화계에서 잔잔한 파문을 몰고 있는 영화 <벌새>는 엣나인필름에서 제작과 배급을 진행했습니다. 또한, 여성의 신체와 자기 결정권에 대해 다소 파격적으로 다룬 <아워 바디>는 영화사 진진에서 배급했습니다. 메이저 배급사를 통하기 어려운 이러한 다양성 영화들의 소소한 성공은 지금의 천편일률적인 한국 영화 상황에서 의미 있는 인사이트를 주는 것 같습니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러한 인디펜던트-다양성 영화의 레이블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며 이들이 발굴한 영화와 감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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