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공감의 테크놀로지, VR - AMORE STORIES
#신우철 님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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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공감의 테크놀로지, VR

아모레퍼시픽그룹 사우들이 직접 작성한 칼럼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칼럼니스트아모레퍼시픽 오설록 사업전략팀 신우철 님


"무언가를 직접 경험하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 Jane Lubchenco, Oregon State University -

# 칼럼을 시작하며

 안녕하세요 '디지털 심리학' 칼럼을 연재 중인 신우철입니다. 오늘은 조금 무거운 주제로 칼럼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을 즈음, 세계 어딘가에서 한 학생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샴페인 병으로 얼굴을 가격당해 큰 부상을 입었는데요. 이 사람이 싸움에 휘말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피해 학생은 한국 유학생이고, 사건이 일어난 곳은 영국 브라이튼이었습니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이 사건의 발단은 인종 차별에서 시작했습니다. 영국, 한인 유학생, 폭행 이 3단어로 인종 차별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선입견이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인종 차별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오래된 화두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굳이 먼 나라에서 겪는 인종 차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많은 종류의 차별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그러한 차별을 행하기도 하죠. 인종, 지역, 종교, 성별 등 많은 요인이 더 나은 우리가 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는 합니다.

# 차이의 인식, 그리고 '비인간화(Dehumanization)'

 '차별', 이 오래된 갈등의 촉매제는 기본적으로 '차이를 인식' 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아기들은 태어난 직후, 모국어든 외국어든 언어에 대한 차이 없이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성장함에 따라 모국어와 외국어를 구분해서 듣기 시작하고, 모국어를 말하는 대상을 선호하기 시작합니다. 나와 다른 것이 아닌 나와 비슷하고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 다름을 인식하는 것, 사실 생명체로서 가져야 할 너무나 당연한 인지 능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과도해질수록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죠.

 실제로 인종 간 차이에 대한 인식이 심해지면 다른 인종을 같은 사람이 아닌 일종의 사물이나 동물처럼 보는 '비인간화(Dehumanization)' 현상이 발생합니다. 학자 Kteily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서로 다른 국가와 인종 집단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비인간화 정도를 연구했는데요.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진화된 듯 보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래의 이미지를 보고 각 그룹의 사람들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좌-우 슬라이더로 표시해 보시오. "
  • Dehumanization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진행된 실험 설문지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현생 인류를 100점 만점으로 할 때 미국인, 유럽인, 스위스인, 일본인, 프랑스인, 호주인, 오스트리아인, 아이슬란드인, 중국인, 한국인, 멕시코 이민자, 아랍인, 무슬림 순으로 '인간답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이슬란드인까지는 미국인과 통계적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고 중국인부터 그 아래는 유의미하게 미국인보다 덜 진화된 존재로 여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연구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여러 가지 논란 거리가 있습니다. 이미 질문부터 차별을 전제하에 두고 있어 응답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있을뿐더러, 몇몇 표본의 생각을 전체 사회의 생각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차별적인 인식은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강한 예시로 인종 차별을 들긴 했지만, 사실 우리도 어딘가에서는 성별, 지역 또는 직업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 네가 내가 아닌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

 "네가 내 입장이 되어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하게 하는 말이자,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차별을 해결해 줄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제가 난민촌에서 사는 누군가가 되어본다면 시리아 내전의 아픔을 더욱 깊게 공감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진리가 그렇듯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내가 직접 남이 되어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겪어보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례로 최근에 쪽방촌의 힘든 삶을 이해하고자 진행되었던 체험 프로그램이 실제 그곳 주민들에게는 상처로 남기도 했는데요. 영화나 문학작품,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서 '공감' 할 수는 있겠지만 진짜 내가 그 '상황에 처해보는 것'만큼의 공감은 행하기 어렵습니다.
  • 잘못된 공감 활동의 예, 쪽방 체험


# 조금 뜬금없지만 '소'가 되어보겠습니다.

 잠시 장면을 바꿔, 과학 전문 기자인 Kara Platoni의 시선을 따라가볼 텐데요. 과학 전문 기자로서 그녀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을 취재해 '감각의 미래'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한 부분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가 된 나는 의무적으로 울타리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인 나는 내면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건 너무 잔인해!" 라고 불특정한 대상을 향해 외쳤다. 시뮬레이션은 계속되었다. 목소리는 내게 아바타 소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바타 소가 나를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제 도축장 트럭을 기다립니다"라고 목소리가 말한다. 바닥이 진동하며 트럭이 다가온다. 타이어가 우르릉대는 소리와 트럭이 후진하는 신호음이 들렸다. 주변 세상이 요란하게 흔들리자 나는 진짜 두려움을 느낀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어디에서 트럭이 오는지 살핀다. 트럭이 오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험이 끝났기 때문이다. "오, 이럴 수가… 당신들 정말……" 카루츠가 헬맷을 벗기자 나는 안도감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 Kara Platoni, 감각의 미래 中 -

 오늘 칼럼에서 저는 우리가 남이 되어 보는 것은 어렵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실, 정확히는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의 한 축을 담당하는 'VR 기술'은 이제 우리가 남이 되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진화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아직은 조금 어색하지만,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를 넘어 해양 오염에 신음하는 산호초가 되어 보는 경험까지도 가능합니다.
  • 소보다 더 뜬금없지만 잠자리도 가능합니다


# VR, 놀이를 넘어 치료를 향해

 사실 'VR 기술'은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왔지만, 그렇게 크게 주목 받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현실처럼 '실감나지 않아서'일 텐데요. 최근 들어 기술의 발달과 디바이스 등이 보급되면서 진짜 현실처럼 느낄 수 있는 VR 기술을 많은 곳에서 체험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테마파크나 VR 카페 같은 곳에서 재미있는 가상 현실 게임을 즐길 수 있죠.
  • 홍대에 위치한 VR 카페

 이렇게 게임이나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 외에, 심리학적 측면에서도 VR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가상 현실 체험을 통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고소공포증 등 여러 공포증 치료에서 이미 많은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과거 베트남 전쟁 참가자, 이라크전 참가자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VR 체험을 통한 치료 기법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파병 예정 인원들을 대상으로 아예 파병 이전에 실제 임무 수행 중 직면할 수 있는 상황들을 미리 겪도록 하여 PTSD를 예방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 0과 1로 만들어내는 공감의 테크놀로지

VR을 이용한 캠페인

 위에 소개한 것처럼 '내가 다른 상황에 처해보는 경험'이 아닌 '다른 내가 되어 보는 경험'도 꾸준히 개발되고 있는데요. 인터렉티브 감독이자 스타트업 창업자인 Milk Chris는 가상 현실의 기술적 특징을 활용하여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쟁이 주는 참혹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난민 캠프의 일상을 가상 현실 영화로 만들어 많은 참여를 유도한 것인데요. 이 때, 가상 현실의 청취자는 난민 소녀가 이야기 할 때 함께 앉아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어 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2015년 다보스에서 열리는 WEF에 출품되었고, 스위스 UN회의에서 다시 상영했습니다. (Milk Chris, 2015)

 단순 공감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공감대가 실제 생활에도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는데요. 2015년 캘리포니아 북부지역의 거주민 대상 실험에서 A그룹에는 이야기를 통해, B그룹은 비디오를 통해 나무 벌목 현장을 알렸고, C그룹에는 가상 현실을 통해 커다란 나무를 벌목하는 경험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C 그룹은 A, B그룹에 비해 이전보다 화장실의 휴지를 25%나 덜 소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Bailenson, 2015). 또, 2016년 뉴욕타임스 편집장은 가상 현실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멕시코 도살장 내부를 관람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후 채식주의자로 변모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상 현실을 통해 평소 식품 공장에 대한 모호한 생각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Emma C, 2016)

 마지막으로, 서두에 언급한 인종 차별을 줄이기 위한 실험도 실제로 진행되었는데요. 바르셀로나 VR 연구팀에서 진행한 실험에 따르면, 가상 현실에서 흑인이 되어 다양한 생활 속 상황들을 겪어본 그룹에서 인종에 대한 편견이 훨씬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 흑인이 되어보는 경험, 바르셀로나 VR 연구실


# 내가 '나'이면서 '너'일 수 있을 때

 가상 현실에서의 경험이 실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두고, 한 연구팀은 이를 '프로테우스 효과(Proteus Effect)'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죠. 바다의 신이 모습을 바꿨다고 그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우리도 가상 현실에서 다른 누군가가 된다고 해서 우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이 온전히 깨어 있는 채로 생생하게 느낀 새로운 관점의 경험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온전히 남게 됩니다. 그리고 살면서 겪은 모든 경험이 그러하듯, 이후의 우리의 생각과 삶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VR에서 겪은 모든 경험들이 실제가 아닌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것을 실제의 경험과 동등한 방식으로 처리한다고 합니다. 인류가 진화해 온 지 몇 천 년이 지나왔지만, 아직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을 구분하는 경험은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어찌 되었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대로 느껴 보는 경험들은 우리가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의 공감, 진정 타인이 되어보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선물해줄 것입니다. 오늘 칼럼은 소설가 한강이 지난 추석 연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로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VR과 같은 기술의 진보가 조금 더 좋은 세상,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 나는 제 2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보스니아 내전, 미국 원주민 대학살에 관련한 자료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궁극적으로 특정한 시점이나 장소가 아니라 이 세상 역사에 드러난 전 지구적인 인류애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이 인간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드는지, 또 그 폭력에 직면해서도 인류애를 잃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나는 야만과 존엄성 사이의 벌어진 틈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더듬어 찾고 싶었다. 내가 연구 중 깨달은 것은 모든 전쟁과 대학살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로 인식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다른 국적, 인종,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동시에 왔다. 인간이 인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은 이러한 모든 편견을 극복하고서 완전하고 진정한 시각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의지와 행동은 우리에게 매 순간 요구된다. "
- 소설가 한강의 뉴욕타임스 기고문 中 -
* Reference
- Kteily, N., Bruneau, E., Waytz, A., & Cotterill, S. (2015). The ascent of man: Theoretical and empirical evidence for blatant dehumaniza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09, 901-931.
- 생각의 탄생,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미셸 루트번스타인 지음, 박종성 옮김, 에코의 서재, 2007
- 감각의 미래, 카라플라토니 지음, 박지선 옮김, 흐름출판, 2017
- EBS 과학 다큐 비욘드, 가상 현실의 미래, 2017.09
- 가상 현실에서의 몰입을 통한 공감구현 기술의 가능성과 숙제, 김선지&윤정현 과학기술정책 전문연구원, 과학기술정책, 2017년 2월호 (통권223호)
- 미국이 전쟁에 대해서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 친다, 소설가 한강 기고문, New York Times,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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