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것 같지 않던 지난 여름의 더위는 아무래도 가을에게 멱살을 잡힌 모양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만간 뜨악한 찬바람이 불어 닥칠 기세던데요. 이르긴 하지만, 이번엔 주택의 겨울에 대해 기술해 보려 합니다.
주택의 여름이 자가용이라면, 겨울은.. 늦은 회식 후 어쩔 수 없이 타야 하는 모범택시 같은 느낌입니다. 직접 몰지 않아도 되는 편함은 있지만, 미터기를 향한 은근한 초조함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 난방의 추억
이사온 첫해 겨울은 대체로 냉혹했습니다. 이곳 추위의 특징은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인데요. 내가 지금 집안에 있는 것인가, 밖에 있는 것 인가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춥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단지 전체에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LPG를 쓴다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이사를 몇 일 앞두고 알게 되었다는 것이죠. 역시나 우리 부부의 대책 없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왜 가스 앞에 '도시'가 붙어있었는지 알게 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절도와 위엄의 도시가스와 왠지 위태로워 보이는 LPG가스통
대신 난방을 위해 일반 가스보다는 저렴한 '심야'전기라는 것이 있었는데요. 재미있는 건 이 보일러는 밤 10시부터 새벽 5시정도까지만 가동이 된단 사실이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난방을 못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었는데, 해가 지고 10시가 될 때까지는 전날 예열된 온기로 버텨야 한다는 점이 더 기가 막혔죠.
그에 더하여, 난방비로만 치면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2-3배가 더 많이 나왔으나, 런닝에 반바지는 고사하고, 밖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단 점이 최악이었습니다.
언젠가 장인어른께서 처음으로 집에 오셨는데, 좀처럼 외투를 벗으려 하지 않으시는걸 보았습니다. 이제 집안으로 들어왔으니, '외투 저에게 주세요'하며 몇 번을 권유했지만, 중앙 난방의 축복 속에 몇 십 년간 온화한 겨울을 보내신 당신께선 정작 본인은 잔뜩 옷을 껴입으며 벗으라 권하고 있는 사위가 이상하게 보였을 겁니다.
세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동안, 주택에선 누릴 수 없는 몇 가지 호사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게 되었고, 더하여 징벌적 전기요금에 대한 불손한 경계심도 일단은(?) 접어두게 되었습니다. 대신, '겨울은 본디 추운 것'이란 자연철학에 근거한 마인드 리셋과 함께 철저한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한겨울에도 실내 온도 19도를 유지하는 강철의 정신력을 배양하려 노력 중입니다.
# 그렇게 노동은 계속된다
지대가 높은 이곳은, 경사진 집 앞 도로 때문에 눈이 내리면 언제나 집밖으로 나와 눈을 쓸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최 차를 몰수가 없는데요. 이사온 첫 해, 아내는 무려 2kg 감량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역시나 다이어트엔 유산소 노동과 주택적 삶이 최적의 조건인 것 같더군요. (^^)
겨울철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시 현수막과 눈을 쓸고 있는 아이들
집 앞에 내린 눈들을 쓸어 내린다 하여, '이웃들간의 애정 어린 담소 나누기'라는 서정적 장면이 약간 기대되기도 했습니다만, 역시나 어르신들이 많이 사시는 동네답게, 이른 새벽에 모든 작업(?)들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아침잠 많은 저로선, 지난 3년간 이분들과 함께 눈을 쓸어본 적이 없을 만큼 말이죠.
그 와중에 노동의 진화는 불연 듯 찾아왔습니다,
빗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분주한 아비 어미를 본 아이들이 지들도 돕겠다며 나섰는데요. 물론 일을 더 만들어 내긴 했습니다만, 나름의 정:부 담당을 두어 적어도 데크위 눈만큼은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안내를 했습니다. 육체적 노동이 안겨주는 참 기쁨의 기회와 함께 말이지요.
아이들이 자주 넘어지는, 상습 슬라이딩 구간에는 염화 칼슘은 물론이고, 약간 오버해서 도보 시 자빠짐 방지를 위한 아이젠, 그리고 눈썰매와 다양한 제설 장비까지, 안전하고 신나는 월동준비는 매해 모자람 없이 갖춰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좀 크면, 층고가 높아 냉/난방에는 전혀 도움 안 되는 거실에 운치 있는 벽난로 한번 추진해봄 어떨까 싶네요. 물론, 내부 품의가 필요한 지점이긴 합니다만.
# 개썰매와 커피.
그럼에도 이곳, 주택의 겨울이 기대되는 것은, 나름 흥미 진진한 겨울 액티비티와 가끔이지만 한가로운 여유로움 때문입니다.
단지의 동쪽에는 서울로 이어지는 공릉천이 흐르고 있는데요. 꽁꽁 얼어붙는 겨울이 되면, 일부 하천이 얼고, 부지 옆으로 눈이 가득해서, 썰매타기에 제격입니다.
첫 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느닷없는 어떤 아저씨의 권유로 큰 아이가 개썰매라는 걸 처음으로 타보기도 했는데요. 극한 지역의 그것과는 규모 면에서 비할 데가 안되지만, 경기북부 지역에서 경험 할 수 있는 나름 그럴듯한 겨울 액티비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속도 내는 걸 좋아라 하던 아이라 큰 걱정은 안했습니다만 막상 썰매가 생각보다 빨리 나가자 약간은 무서워하더군요.
'아더'라는 서양식 이름의 투견은 제법 늠름해 보였는데요. 기회가 되어 강아지를 분양하게 된다면, 저런 친구로 한번 도전해봐야겠단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집 앞 공릉천에서 펼쳐지는 소박한 개썰매 체험 현장
나름 커피 애호가이자, 폭음가인 저는 한가로운 주말 오전, 2층 테라스에서 마시는 커피를 무척 사랑하는데요.
집을 삼켜버릴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소나무에 눈이라도 쌓이면, 당장에라도 시집 한 권 써내려 갈 것 같은 감성의 포텐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물론 누군가와 나누긴 뭣한, 참을 수 없이 얄팍함이 있긴 합니다만…
# 4화를 마치며…
입이 떡 벌어지는 천혜의 자연 환경도 아니고, 철거되지 않은 오래된 공장의 굴뚝과 어지럽게 정돈되지 않은 컨테이너가 여전히 거슬리는 동네이지만 집이란 울타리 안에서 경험하는 한가로움과 기쁨은 그 어떤 것으로도 치환되지 않는 소중한 가치란 생각이 듭니다.
몇달 전 큰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꽤 오랫 동안 집을 떠나 있었는데요. 그래서 더욱 이곳에서의 일상적 안락함이 새삼 귀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가족이란 관계가, 멀리 두면 그립고, 가까우면 거슬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요즘 같아선, 당분간은 곁에 두고 성질부리더라도 함께 함이 낫겠단 심정입니다.
다들, 차조심~ 음식조심~ 이불 밖 모든 것 들로부터 조심~들 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