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따가운 태양과 더위를 피해 여름 휴가 잘 다녀오셨나요? 저는 여름만 되면 뜨거운 햇볕에 피부가 금방 타는 타입이라 어려서부터 "와, 아프리카 사람 다 됐네!"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매우 애매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는 3,000개 정도의 확연히 다른 종족이 존재하며, 지구상 가장 유전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대륙이기 때문입니다. 이 커다란 대륙에는 옅은 색의 피부를 가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Afrikaaner족부터, 어두운 색의 피부를 가진 Hausa족까지, 정말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인종들이 모두 모여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외국인 중에서도 피부색이 매우 다양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미녀들의 수다>에서 활약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적의 브로닌 멀렌, 이젠 모두 익숙한 가나 국적의 샘 오취리, 그리고 <비정상회담>에서 무슬림 문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리비아 국적의 아미라가 있습니다.
• 성명 : Nelson Rolihlahla Mandela
• 출신지 : 남아프리카공화국 • 출생•사망 : 1918년 7월 18일 ~ 2013년 12월 5일 • 성격 : 인종차별 반대 인권운동가 •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가장 유명한 평화 운동가이자 남아공의 대통령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종차별 반대가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었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소수민족이었던 '백인'들이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게 되었고, 1948년부터 1994년까지 같은 국가에 사는 각 인종들을 분리하여 거주하도록 하는 법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남아공의 모든 사람은 출생 신고 시 자신의 인종을 밝혀야 했으며, 이에 따라 국가에서 받는 처우는 매우 달랐습니다. 피부색이 어두울수록 더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된 사람들은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의회를 만들었고, 1949년경 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에 속해 있던 넬슨 만델라를 선두로 평화로운 반항이 시작되었습니다. 흑인들은 탈 수 없었던 백인 버스에 탑승하고, 백인 화장실을 이용했으며, 통금 시간 이후 통행하는 등 당시 남아공에 존재하던 법은 모두 위반하며, 감옥이 모두 포화되어 이 시스템이 무너질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먹히지 않았고, 결국 폭력적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넬슨 만델라는 1962년부터 1990년까지 26.5년간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후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4년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뽑힌 대통령이 되었고,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 만델라는 인종차별, 빈곤, 불평등을 없애고 서로 다른 인종 간의 이해심을 높일 수 있는 정책을 내놓는 방향으로 정치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피부색뿐만 아니라 언어, 종교, 장애, 성적 성향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없애는 헌법을 도입하였습니다.
이렇게 넬슨 만델라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을 이겨낸 후에도, 모든 종류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으며,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에게 그는 우상이자 자랑스러운 위인이었습니다. 그의 비폭력적인 평화를 위한 행보가 전 세계에 다양한 인종들이 모두 행복한 이웃으로 지낼 수 있게 되는 데에 영향을 꽤 많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 성명 : Wangari Muta Maathai
• 출신지 : 케냐 • 출생•사망 : 1940년 4월 1일 ~ 2011년 9월 25일 • 성격 : 환경운동가 • 정치가
마타이는 동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박사학위를 딴 여성이자 환경 운동가입니다.
케냐 녜리 지역의 평범한 가정의 딸로 태어난 마타이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당시 동아프리카 식민지 시절이 끝나가는 것을 기점으로 서양 사회와 아프리카의 화합을 위한 활동이 활발했으며, 그중 하나로 미국 대통령 존 에프 케네디의 'Kennedy Airlift' 프로그램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마타이는 1960년 9월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학부 시절 베네딕틴 칼리지에서 생물학을 전공, 화학과 독일어를 부전공했고, 피츠버그 대학에서 생물학 석사 이수, 그리고 1971년 나이로비 대학에서 생명 과학 박사 학위를 따내면서 동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나이로비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마타이는 꾸준히 케냐 적십자 등 외부 시민 단체를 위해서도 일하였습니다. 그녀는 케냐 여성 단체 협의회에서 활동하던 중 시골 여성들이 연료로 활용할 수 있는 나무를 심으면서 삼림 벌채와 사막화를 늦출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고, 1977년 '그린벨트 운동'(The Green Belt Movement, GBM)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21세기 초 3천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는 데 성공하였고, 1986년 이 단체의 대표들은 '범아프리카 그린벨트 네트워크(Pan African Green Belt Network)'를 설립하여 세계 리더들의 환경 보호 및 환경 정화에 대한 교육을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GBM 덕분에 케냐 외의 다른 국가들도 환경 보호 활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마타이는 환경 보호 활동 외에도 인권 보호, 에이즈 예방 운동, 여성 관련 활동도 활발히 하며 유엔 총회에 관련 이슈 해결을 꾸준히 요구했습니다. 2002년 마타이는 98%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케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003년 케냐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2004년 마타이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 인권 및 특히 여성의 권리를 포용하는 지속 가능한 개발 활동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마타이는 환경과 인권을 위해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아프리카의 환경 보호와 여성의 인권, 사회적 지휘에 대한 안정감을 찾는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 성명 : Didier Yves Drogba Tébily
• 출신지 : 코트디부아르 • 출생•사망 : 1978년 3월 11일 ~ • 성격 : 운동선수
드록바는 코트디부아르 대표 축구 선수입니다.
1993년 15세의 나이에 Levallois 2부 수련생 활동을 시작한 드록바는 1997년 이동한 Le Mans FC 팀에서 정식 축구 선수로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은 드록바는 2002년 1부 리그인 Guingamp에서 발탁되었고, 34게임 중 17골을 넣는 실력을 보여주며 바로 2003년 Olympique de Marseille 팀으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팀에서도 35게임을 뛰며 19골을 넣고, 유러피언 컵(UEFA) 에서 11골을 넣으며 팀을 결승전까지 이끈 드록바는 바로 다음 해인 2004년에 영국의 Chelsea FC로 이적하며 실력을 빠르게 인정받는 축구선수가 되었습니다.
이적 후 드록바가 함께 뛴 첼시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50년 만에 우승컵을 안는 영광을 누렸지만, 드록바의 실력이 일관성이 없고, 빠르게 흥분하는 성격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팬심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2006-2007 시즌에서 33골을 넣으며 FA 컵과 칼링 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드록바도 첼시 팬들의 사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쉽게 흥분하는 성격을 고치지 못한 드록바는 중국, 터키, 미국 리그로 이동하며 활동하다 2018년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2002년 코트디부아르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드록바는 2006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주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코트디부아르가 같은 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중요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그는 2010년, 2014년 모두 코트디부아르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직후 국제 경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스포츠는 한 국가의 국민들을 단합하게 만들 수 있는 매우 영향력 있는 활동 중 하나입니다. 세계가 놀랄 정도로 단합했던 2002년 대한민국의 월드컵을 통해 우리나라도 직접 경험했듯이, 드록바를 통해 코트디부아르도 평화를 얻었습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02년, 출신지가 코트디부아르가 아닌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내전이 터졌습니다. 이로 인해 백만 명 이상의 이재민과 4천 명 가까이 되는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2005년 월드컵 본선 진출 결정전이 진행되던 날에도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트디부아르의 2006년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마자 모든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은 국민들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조국의 평화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모든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축구의 승리를 위해 응원했듯이, 같은 민족끼리 화합을 통해 같이 살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며 조국의 평화를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코트디부아르는 2007년 평화 협정을 통한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드록바는 Didier Drogba Foundation을 통해 조국을 돕기 위해 노력하며,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가진 영향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칼럼을 마무리하며
저는 주로 여행을 하고 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현지인일 수도 있고, 나와 같은 여행자일 수도 있는 어떤 한 사람으로 인해 새로운 곳에서의 기억에 대한 감정이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길을 잃은 여행객에게 친절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에서의 기억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했더라도 다시 가고 싶은 곳과 가고 싶지 않을 곳으로 나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칼럼에서 아프리카의 유명인들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며,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저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우린 모두 따듯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한국보다 인터넷 보급률이 떨어져도, 문맹률이 매우 높아도, 피부색이 다르고, 날씨가 달라도, 아프리카 역시 애국심 가득하고 사람과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