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를 시작하며 : 조선판 왕좌의 게임
문종의 짧은 치세와 그의 현릉(顯陵)
출처 : 전쟁기념관, 화차(서울시 용산구)
출처 : 문화재청, 현덕왕후(현릉) 쪽에서 문종(현릉)을 바라본 모습(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단종의 등장과 퇴장 : 희극과 비극의 교차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王邦衍), <청구영언> -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의 이름은 홍위입니다. 단종은 왕위 계승 신분인 원손으로 봉해졌고, 이후 세손, 세자가 되었습니다. 세종은 현덕왕후가 승하하자 앞서 말씀드린 자신의 후궁이었던 혜빈 양씨를 세손의 유모로 삼았습니다. 단종은 조선 시대에 숙종과 더불어 후계자로서 완벽 그 자체에 가까운 왕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사람이었고, 승계도 비교적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천수를 누린데 비해 단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고자 했고, 그중에서도 주나라에서 확립한 종법제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종법제는 적자 승계를 원칙으로 합니다. 계유정난에 동의하던 세력조차 세조의 즉위를 두고 논란을 벌인 것은 바로 이 종법제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수양대군(훗날 세조, 이후 세조로 통칭)이 살았던 시절에는 왕위 교체에 대해서 사회적 분위기가 용인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태종이나 아버지 세종처럼 왕위를 승계했던 상황이 존재했고, 그 이전 시대인 고려나 심지어 통일신라 때도 그러한 역사적인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의 아들들이나 현종의 아들들이 순차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조카를 대신해 집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조가 후일 비난 받은 것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했다는 점과 당시 성리학적 관점에서 사대부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청령포(淸泠浦) 설화와 영월 장릉 : 흐르는 강물과 눈물
출처 : 문화재청, 청령포 입구(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출처 : 문화재청, 청령포 사당(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출처 : 문화재청, 담장을 넘어간 소나무(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출처 : 문화재청, 청령포 관음송(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천연기념물 제349호)
이렇게 청령포에 얽힌 설화들이 많지만, 단종은 유배되던 해 여름 홍수 우려로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 청령포에 머물렀습니다. 단종이 처음 왔을 때만 이곳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배지 관리 문제가 발생해 단종은 영월군 관사로 거소를 옮겼고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단종에 대한 기록은 세조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단종실록에는 수양대군이 세조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단종실록은 세조가 승하한 이후에 편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종은 세조에 의해 폐위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실록을 남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에 단종 즉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명했고 이후 예종 시기 세조실록을 편찬하는데 전 왕이었던 단종의 기록을 남기게 해 노산군 일기라는 이름으로 실록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후 숙종이 정종과 단종을 추증하면서 그 명칭이 노산군 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단종이 죽은 후 그 시신이 아무렇게나 버려졌는데, 영월의 엄흥도라는 사람이 수습해 몰래 매장했습니다. 이후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중종 때 영월 군수였던 박충원이 묘역을 정비했습니다. 선조 때 석물들을 일부 설치해 노산군묘라고 불리었습니다. 숙종 시기에 이르러서야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다가 이후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노산군묘도 장릉이라는 능호가 붙게 되었습니다. 단종의 능은 다른 왕릉에 비해 소박한데, 이것은 단종이 평민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관리가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릉 입구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이 나무는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의 사릉(思陵)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죽어서도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양주시에서 보내온 것을 영월군에서 심은 것입니다.
주변에 단종의 죽음과 관련한 다양한 시설들이 있는데, 그를 수습한 사람, 그를 위해 순절한 사람들의 것들입니다. 아울러 장릉에는 단종 관련 배식단사와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함께 조성된 점이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장릉 입구에는 단종과 관련한 단종 역사관이 있는데 한번 둘러보시고 장릉을 가신다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출처 : 문화재청, 장릉(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세조의 사정 : 왕이 되기 위한 품격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이름은 유입니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다가 후에 수양대군으로 봉해졌습니다. 세조가 즉위한 후 신권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부활합니다. 이것은 왕권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고 북방 개척을 위한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세조의 북방 개척은 아버지 세종의 업적에 비견될 만한 것입니다. 조선이 북방 개척을 꾸준하게 추진한 이유는 지방 세력의 발호를 막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경영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무신 정권부터 조선 건국까지 수많은 지방 세력이 왕조에 도전했고 실제로 중앙 국가의 역량이 분산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방 개척을 추진했을 겁니다. 경제적으로 효용성이 떨어진 과전법을 수정해 직전법을 실시했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한 서적도 간행했습니다. 또한 국방력 강화 활동과 <경국대전>으로 집대성되는 조선의 제도를 완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조는 조선 시대 국왕 중에서도 국가 기반을 마련하는 여러 업적을 세웠습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수령고소금지법을 일시적으로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세조가 국왕이 되기 위해 당시의 유교적 정치 질서에서 벗어나는 행동들을 했고, 측근을 비호한 것이 후대의 세조 평가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례로 세조의 공신 중에 홍윤성이라는 고급 관리가 비리를 다수 저질렀음에도 세조가 그를 공신이라는 이유로 용서해주는 모습은 과연 세조가 엄격한 기준이 있는 국정 운영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눈감아주는 것은 세조를 좋게 평가할 수 없게 합니다.
세조의 정치는 공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신들의 힘을 통해 집권했기에 그들과 잘 협조해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할아버지 태종처럼 공신들을 제거하기 않을 것이라는 의지도 담겨 있었습니다. 세조는 자주 자신을 당 태종에 비유했습니다. 도탄에 빠진 왕실을 구하고 공신들과 함께 새로운 조선을 개국한 왕으로 보이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조는 중요 직책에 관리를 배치하는 데 있어 능력보다는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조회가 끝나면 세조는 매번 연회를 열었고, 그 과정에서 신하들을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용비어천가>로 유명한 정인지의 경우 술자리에서 세조를 깔보는 발언으로 정승직을 박탈당하기도 했고, 북방 개척과 외교에 뛰어난 업적을 거둔 신숙주의 경우 팔씨름에서 이기자 세조가 그가 술에 취했는지 확인하고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세조 시기의 인물들은 그 능력은 뛰어났지만 새로운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재산 축적에 더 힘을 쏟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조의 즉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집중되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가 출간되면서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세조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었다면 이 소설을 계기로 세조에 대한 평가가 매우 부정적으로 바뀝니다. 이후 군사정권 시절 세조에 대한 평가를 좀 더 높이는 식으로 구성되었지만 억울한 죽음이라는 부분에서 단종을 애달프게 생각하고 세조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조는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업적을 세웠고, 임진왜란 전까지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는 점에서 분명 왕의 자격이 있는 인물입니다. 다만 측근들의 비리를 눈감아주고 조선 초기의 제도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선하지 않았던 것은 세조가 과연 훌륭한 왕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국립수목원과 광릉 :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출처 : 국립수목원, 국립수목원 전경(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
출처 : 데일리안, 원시림 속에 안장된 빛나는 무덤 '광릉' 기사(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글을 마치며 : 무엇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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