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 담긴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요약해 소개합니다.
제3화. 태평양 너머를 향한 꿈
가업은 전과 다름없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은 여전히 가내 수공업 수준에 머물러 있던 가업이 갑갑했습니다. 중국에서 보았던 넓은 시장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베이징에서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가족의 동의를 얻어 상호를 '태평양상회'로 바꾸었습니다.
'태평양!' 모든 강물이 마침내 닿는 바다. 어쩐지 모성을 닮았고, 생명의 근원이고, 가장 낮으면서도 한없이 깊은 곳. 그곳은 서성환 님이 스스로 나아가고픈 세상이기도 했습니다.
상호 변경으로 서성환 님은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군소 화장품 회사들이 시장을 압박해도 서성환 님이 제대로 된 원료로 만든 크림과 포마드는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커다란 세상을 경험한 서성환 님에게 개성은 '태평양'의 꿈을 실현할 무대로는 너무도 좁았습니다. 어머니의 동의를 얻은 서성환 님은 1947년 마음을 정리하고 서울로의 이전을 단행했습니다.
서울로 온 서성환 님 가족은 남창동에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고, 1948년 1월에는 중구 회현동 109번지에 사업장을 열었습니다.
새 사업장을 열 때부터 서성환 님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바로 품질이었습니다. 현재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비자들의 신뢰와 좋은 평가이며, 그 첫걸음이 바로 품질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서성환 님은 제품에 김재현 백화점과 베이징에서 접했던 고급 제품들처럼 산뜻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습니다. 인쇄소와 일본 브로커까지 찾아 다니며 만만치 않은 비용과 어려움을 감내한 끝에 서성환 님은 비로소 완벽한 옷을 입은 제품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쏟아 세상에 선보인 첫 번째 제품이 바로 '메로디 크림'이었습니다.
만들어 놓기만 하면 팔리던 당시의 업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고집스러우리만치 남다른 품질을 지향하는 장인정신과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메로디 크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메로디 크림'의 덕분으로 차곡차곡 사업의 성과가 쌓여나갈 즈음, 반도의 허리를 찢는 포성이 울렸습니다. 전쟁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남의 전쟁에 끌려나갔던 악몽이 잊히기도 전에 이젠 동족 간에 칼을 들이대는 비극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성환 님도 부산행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피난 짐 속에는 집 마당에 묻어두었던 향료가 가장 소중히 갈무리되어 있었습니다. 피난처에서도 제품을 만드는 장원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장원은 국내 최초 순식물성으로 번들거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윤기를 내는 건 물론, 외국에서 들여온 고급 향료를 첨가하여 냄새 문제까지 개선한 확연히 다른 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을 채택하여 '용기 혁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 이 제품이 바로 유명한 'ABC포마드'입니다.
새 브랜드를 채택한 과감한 결정에 보답이라도 하듯 'ABC포마드'는 출시된 지 반년 만에 사업 거점을 확장 이전하여 확대생산에 들어가야만 할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거둔 누구도 믿기 힘든 결과였습니다. 품질과 기술과 디자인, 거기에 내재한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의 승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