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김치찌개와 삼일대로 - AMORE STORIES
#서동현 님
201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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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김치찌개와 삼일대로

칼럼니스트서동현 님
이니스프리 TM팀


1. 매운맛이 그리울 때

 작년 가을에 두 번째 김장을 했습니다. 여럿이 모여 각자 먹을 만큼만 만들었는데, 제 것은 스무 포기쯤 됐습니다. 김치를 맛있게 하려고 배추가 한창 나올 때는 오히려 피했습니다. 대신 밭에서 서리를 두 번쯤 맞힌 뒤 수확한 배추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수분이 빠져 배추 크기는 줄고 맛은 더 달아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전날 끓인 사골 국물을 김칫국 바탕 삼아 미나리며 쪽파, 갓, 무를 채 썰고 양념에 버무렸습니다. 김칫소를 잘 바른 배추는 마지막 잎으로 돌려 묶어 차곡차곡 쟁여두었습니다. 두고두고 먹을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반년쯤 지난 요즘, 김치가 벌써 익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다른 음식으로 변신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죠. 예전에 냉장고가 부실하던 시절에는 이맘때쯤 묵은지가 생겨나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어른들이 신김치를 핑계 삼아 김치전을 부치고, 봄비를 투덜대며 막걸리를 드시고는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도 신김치가 남으면, 며칠 걸러 한 번씩 밥상 위로 올라와 찌개도 되고 국도 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야 김치냉장고 성능이 워낙 좋아져서 핑곗거리가 줄었지만, 이맘때쯤 덜 익은 햇볕에 하루가 노곤하게 늘어질 때면 그때의 매운맛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땀 흘릴 각오하고 김치찌개집을 찾는데, 뜨겁고 멀건 국물에 허연 두부만 떠다녀서 실망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마른 입맛만 다시기를 몇 번 하고서야 원하던 매운맛을 찾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이야기들을 품은 그곳, 삼일대로가 시작되는 곳에서 말이죠.

2. 재동과 숙주나물

 삼일대로는 종로구 재동(齋洞)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은 수양대군과 관련이 있는데, 영화 <관상>에서 알려진 것과는 조금 사실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에 김종서 장군의 집이 있었다고 알고 있지만, 김종서 장군의 집은 서대문 바깥 충정로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김종서 장군은 수양대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아들 김승규가 몸으로 막아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여장을 한 채로 도성 안으로 다시 들어오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사돈 집에 숨어 있다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곳 재동은 김종서가 아니라, 북촌 언저리에 살던 다른 조정 대신들을 하나씩 불러냈던 곳입니다. 영화에서는 궁궐 문 안에서 일을 저질렀지만, 실제로는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이곳에서 그랬던 것이죠. 당시에는 안국역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율곡로가 뚫리기 전이었고, 운현궁 앞길은 작은 개울이었던 시절입니다. 그 언덕배기에서 흐른 피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재를 덮었다고 해서 재동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 / 숙주나물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관련한 음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숙주나물입니다. 숙주나물은 녹두를 싹 틔워 조금 키운 것인데, 쉽게 상하고 갈변하는 성질을 신숙주에 빗대어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는 것이죠. 하지만 사실 신숙주는 강력한 왕권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변절자라는 오명은 수양대군에 대한 민중의 앙심이 대신 덮어씌워진 면이 많습니다. 그가 세운 엄청난 공을 생각하면 조금 억울한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3. 간판 없는 김치찌개집

 재동을 뒤로하고 삼일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 건물 사이로 좁은 골목이 하나 나있습니다. 가게 이름은 없는데, 음식 이름만 써 있는 골목이죠. 그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된 식당이 나오는데, 역시 간판은 없습니다. 예전에는 근처 덕성여대 교직원들이 이곳을 '뽀빠이집'이라고 불렀고, 통계청 직원들은 '기차집'이라고 불렀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벽돌집', '담벼락집', '골목집'이라고 지어 부르기도 했던, 그런 곳입니다.
 날이 제법 덥지만 나무 그늘이 시원해서 바깥에 앉았습니다. 밥풀을 노리는 참새 떼들이 담장 위에 앉아 눈초리를 번뜩입니다. 주인아주머니가 은빛 쟁반을 들고 나와 담벼락에다 요란하게 두들겨 쫓습니다. 그래 봐야 녀석들은 멀리 가지 않고 또 돌아와 앉아 눈치를 살핍니다. 그런 참새들을 흘겨보며 자리에 앉아 김치찌개를 주문했습니다.

 김치찌개는 사실 그리 어렵고 복잡한 음식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과 식당에서 자주 접하는, 저렴하고 평범한 음식이죠. 하지만 그만큼 맛있기가 어려운 음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김치찌개의 맛은 대부분 김치가 결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즘처럼 직접 김장을 잘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하나의 요리로서 평가받기조차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없는 집은 찌개용 김치를 직접 담그는 몇 안 되는 곳입니다. 찌개용 김치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지만, 젓갈을 쓰지 않은 김치를 김칫소까지 좀 떨구고 끓여야 찌개가 맛있다는 걸 보여주는 식당입니다. 젓갈이 많이 들어간 김치를 그대로 끓이면 떫은맛이 좀 남기 때문이죠. 그래서 젓갈 없이 담근 김치를 6개월 이상 숙성해서 끓이는 이곳의 김치찌개는 '쩡'한 신맛을 냅니다. 개운하고 시큼한데 찡그려지지는 않는 그 맛을 본 사람들은 첫마디에 짧은 날숨만 내뿜을 뿐, 말을 잘 잇지 못하곤 합니다.

 김치 이야기를 꺼낸 김에 배추 이야기도 좀 해볼까요? 사실 요즘 우리가 많이 먹는 결구배추(結球白菜, 잎이 둥그런 모양으로 뭉쳐 있는 배추)는 1960년대에 와서야 널리 퍼졌습니다. 이 배추는 중국이 원산지로, 구한말 청나라 군사들이 들어올 때 그 씨앗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배추의 영어 명칭은 Chinese Cabbage이지요. 그래서 한동안 호배추(胡白菜)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전까지 우리가 원래 먹어왔던 배추는 비결구배추(非結球白菜, 잎이 둥글게 뭉치지 않고 옆으로 퍼지는 배추)라고 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고려 때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중 경성 배추, 개성 배추가 유명했던 품종으로, 지금도 경북 의성에 가면 원래의 품종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 조선총독부농업시험장 자료 / 경향신문
    (위쪽은 결구배추, 아래쪽은 비결구배추)

  • 조선 배추 – KBS <한국인의 밥상>

 조선 배추는 요즘 배추와 달리 속이 노랗지 않습니다. 오히려 겉이 소나무처럼 파랗다고 해서 송채(松菜), 속이 희다고 해 백채(白菜)라고 불렀었죠. 이 백채라는 말이 와전되어 지금 우리가 배추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 배추로 김치를 담그면 그 푸르고 아삭함이 훨씬 오래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조선 배추만을 고집하는 대구 동성로의 상주식당 같은 곳은 겨울에 영업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잎이 많지 않은 조선 배추가 추위에 약해서 겨울에는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먹는 결구배추가 맛이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그 달고 노란 속잎으로 돼지고기 수육을 싸서 먹는 맛은 조선 배추로는 이룰 수 없는 영역입니다. 또 겨울에는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자란다고 해서 흔히들 납작 배추, 납딱 배추, 떡 배추 등으로 부르곤 하는데, 이걸 이른 봄에 따서 양념에 무친 것이 바로 '봄동나물'입니다.
 배추 이야기에 잠시 빠진 사이, 김치찌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장님, 김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김치찌개에 반찬이라고는 달랑 김치뿐입니다. 김치찌개 반찬이 김치라니. 게다가 김치찌개 속에는 흔해빠진 얇은 삼각형 오뎅이 잔뜩 얹혀 있습니다. 저 많은 오뎅을 처음에 봤을 때는 저도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그 맛을 보고 순식간에 이해했지요. 신김치에서 나온 그 '쩡'한 신맛을 오뎅들이 순식간에 빨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두툼한 두부나 참치 같은 걸 넣었다면 그 맛이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이곳 사장님이 선택한 값싼 오뎅이 사실은 가장 옳았던 것이죠.
 여름은 아니지만, 꽤 더운 날씨 속에 김치찌개를 먹다 보니 땀이 비 오 듯합니다. 그래도 맛있다고 흰밥에 벌건 국물을 자꾸 끼얹습니다. 어느새 밥 한 공기가 오뎅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랩니다. 그런데 고집 센 사장님은 소주도 빨간 뚜껑만 판답니다.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더운 입김을 삼키며 찌개를 뒤적였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냄비에서 오뎅이 사라지자 김치와 고기가 드러났습니다. 비계가 넉넉히 붙은 돼지고기가 찌개에 담백함을 더합니다. 김치의 신맛은 돼지고기 냄새를 잡았습니다. 단맛이 거의 없는 국물 속 방금 끓인 김치가 아삭합니다. 턱밑이 시큰해지며 군침이 돌아서 밥 한 공기를 더 불렀습니다. 앞치마도 벗어 치워버렸습니다. 새파란 테이블 위로 새빨간 뚜껑이 자꾸만 늘어갔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집 메뉴판 글씨도 그런 파란색 빨간색이었습니다.

4. 삼일대로와 낙원상가

 골목을 나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삼일대로에 섰습니다. 서울에서 제일 오래됐다는 플라타너스 나무들 사이로 푸른 바람이 불어옵니다. 어깻죽지가 제법 시원해졌습니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낙원상가가 보입니다.
 1960년대 서울시는 안국동에서 종로를 연결하는 도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산도 부족했고, 그곳에 있던 낙원시장 상인들의 반발에까지 부딪치자 기막힌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도로를 뚫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분양한다는 것이었죠. 도로법과 건축법을 모두 위반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토지세 대신 도로세를 내고 있습니다.
  • 낙원아파트 엘리베이터 내부 / 낙원아파트 중정 – 중앙일보

 사람들은 낙원상가 하면 으레 악기 상가만 떠올리곤 하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재미있는 공간입니다. 지하에는 큰 재래시장이 있고, 4층에는 작은 극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6층부터 15층은 아파트인데, 그 공간의 디자인이 뛰어나서 50년 전에 설계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아직도 그 구조가 튼튼하다는 점도 그렇고요.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입니다.
 발길을 돌려, 제가 좋아하는 지하 시장으로 가봤습니다. 지하라고는 해도 천 평이 넘는 규모에, 없는 게 없습니다. 그 규모와 물건의 다양함이 어지간한 마트를 압도합니다. 그 안에는 오래된 국숫집들도 몇 있는데, 아직도 이천오백 원이면 국수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비빔국수에 김치전까지 먹고 나오려는데, 아주머니가 제게 나긋이 "오천 원만 받을게.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가슴이 따뜻했습니다.

5. 혁명의 맛

 낙원상가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다시 길을 건넜습니다. 운현궁을 향해 걷다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봤습니다. 재동에서 낙원상가까지, 이 짧은 길 위에는 유난히 혁명가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유정난의 수양대군부터 희대의 개혁가 조광조,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과 박영효, 고종과 흥선대원군, 그리고 손병희와 방정환. 거기다가 3.1운동의 이름 모를 주역들까지, 뜨거운 피를 가졌던 이들이 시간을 가로질러 이곳에 함께하는 듯했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고, 역사를 만들어낸 그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예전에 마오쩌둥이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매운맛이 강인함이나 불굴의 끈기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서 그랬겠지요.
 "혁명의 맛"이라고 중얼거리는 입 안에 얼큰한 김치찌개 향이 돌아다닙니다.

 이른 더위에 헛것을 본 것일까요. 저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서, 김치찌개와 소주에 불콰해진 얼굴로 그분들이 너털웃음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건 아마도, 김치찌개가 보여준 짧은 꿈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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