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태조 건원릉과 SKY 캐슬 - AMORE STORIES
#김재석 님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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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태조 건원릉과 SKY 캐슬


 앞서 1화에서 저는 조선 왕릉의 조성과 그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왕릉 자체는 무덤이기 때문에 궁궐이나 다른 문화재들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왕들은 세속의 공간에 자신의 선조들이 묻힌 곳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정자각의 기둥 아래에 흰색 단청을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건물같이 보이지 않나요? 현실적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해 성스러운 공간으로서의 왕릉을 구현하고 그를 통해 지속적인 왕조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었지 않을까요?

 조선은 성리학 질서를 바탕으로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이념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사대부들이 이끌어가는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끌어와 지속 가능한 왕조 국가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승하한 왕의 능을 조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첫 번째 왕인 태조의 능을 만들 때 그 아들인 태종이 많은 신경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향후 왕릉 건축의 기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세심함은 더했을 것입니다.

 조선 왕릉 중에 제일 먼저 조성된 태조 건원릉(健元陵)은 배치와 구성이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조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이 조선 건국 이후 최초의 왕릉이나, 이후 태종의 정릉 이장 및 변경으로 초기의 왕릉 제도는 태조 건원릉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의 십삼릉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조선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왕릉에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연속성을 지닌 문화유산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위원들의 논의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건원릉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태조의 일생을 보면 그의 뜻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왕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 2월 1일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SKY캐슬]에 나오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입시에 시달린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태조에게 아들 태종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들이었고, 아들 중에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태종은 태조가 보기에 훌륭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측근과 자신의 이복동생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습니다. 아버지 태조는 가장 신뢰하고 믿었던 아들 태종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으로 떠나볼까요?


조선의 시작

 태조의 건원릉에 앞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은 우리가 역사 시간에 많은 양을 배우게 되는 대한민국의 선행 국가입니다. 우선적으로 <조선왕조실록> 등과 같은 기록이 많이 남아 있고, 조선 왕조에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다양합니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장 세력과 고려 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 사대부들이 결합해 세운 나라입니다. 조선의 앞선 왕조인 고려는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권문세족이라는 독특한 지배 세력이 집권하게 됩니다. 이들은 외세를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이들 소유가 되면서 나라의 살림이 늘어나지 않고 권문세족들에게 집중되고 그 아래 백성들은 농지를 잃고 권문세족의 노비로 전락하는 등 매우 힘든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권문세족의 전횡과 양인의 감소는 세수의 부족을 가져오고 전체적으로 고려 왕조가 흔들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출처 : 문화재청, 태조 어진

 이런 와중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 사대부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고려 왕조는 과연 국가 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신진 사대부들은 국가 운영의 핵심은 백성을 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보았고 민본주의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변화를 꾀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은 기존 세력을 넘어서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들 신진 사대부조차도 권문세족에 기반을 두거나 그들과 연결된 이들이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리학 질서가 기존 질서를 용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정치를 수행하고 백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념을 표방했기에 신진 사대부들은 기존의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 해소를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다수 신진 사대부들은 그런 변화를 기존 체제에서도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일부는 권문세족의 물질적 기반을 해체해야만 그와 같은 활동도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정도전을 위시한 신진 사대부 세력은 그런 기반을 해체하기 위해서 중앙 무대에서 배제된 동북 지방의 실력자 이성계와 손을 잡게 됩니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동북면 수복 활동을 통해서 중앙으로 진출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권문세족의 경계와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기존 집권자들의 반감을 사게 되고, 동북면으로 다시 돌아가 칩거하게 되었던 인물입니다.
  • 출처 : 문화재청, 삼봉 정도전 탄생 설화와 연관된 도담 삼봉(충북 단양군 매포읍)

 정도전은 기존 세력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이성계에게 제안하고 이성계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즉 정도전은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백성을 행하는 정치를 하고, 이성계는 왕조의 우두머리로서 왕권을 갖는데 동의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고려 우왕을 교체하고 권문세족의 물적 기반을 과전법(고려 말 공양왕 시기에 시행한 토지제도 개혁법)을 통해서 해체하게 됩니다. 이후 고려 공양왕의 선위를 통해 왕조가 교체됩니다.
  •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건원릉(경기 구리시 인창동)



태종의 반발과 왕권 강화

 조선을 개국하고 안정기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내부에서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경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경우는 신진 사대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적절한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을 비롯한 세력의 경우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셈이지요. 그리고 변화를 통해 개국한 신생 조선의 실질적 기반이 되는 사대부들도 기존 세력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초기에 태조는 정도전 세력과의 연합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태조의 후계자 선정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은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우선 왕위 계승에 개입한 쪽은 태조 이성계의 정비인 신덕왕후입니다. 태조에게는 먼저 결혼한 신의왕후 한씨가 있습니다. 태조가 동북면에 있을 때 결혼했습니다. 신의왕후는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에 사망했고, 왕조 건국 후 태조에게는 신덕왕후만 있었습니다. 신덕왕후의 왕릉은 정릉(貞陵)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정릉은 태종에 의해서 본래 있던 위치에서 벗어나 현재의 성북구로 옮겨지게 됩니다. 태조는 이 정릉에 같이 묻히고 싶어 했으나, 아들 태종의 반대로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정릉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이제훈과 수지가 과제를 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입니다. 정릉은 주변을 구성하는 석물들과 묘역이 빈약한데, 이것은 태종에 의해서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정릉은 덕수궁 인근 정동(貞洞)의 현재 영국대사관에 있었습니다. 정릉은 태조가 현재 구리시 인창동에 묻히게 된 이후 도성에 무덤이 위치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여론을 등에 업고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왕위 계승에 대한 불만인지 태종은 정릉의 석물을 해체해 청계천 공사에 쓰기도 했습니다.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 아닌 후궁의 것으로 격하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 현종 시기에 왕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 출처 : 문화재청, 정릉(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신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신의왕후의 아들들이 반발하게 됩니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게 됩니다. 1차 왕자의 난은 신덕왕후가 사망한 후에 태종을 비롯한 세력이 세자와 정도전 세력 등을 제거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태종은 아버지를 상왕으로 만들고, 자신의 형인 방과를 정종으로 옹립합니다. 이 과정에서 사병 혁파와 종친 세력을 견제하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다시 한 번 태조 이성계의 아들 사이에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고, 태종이 이를 계기로 즉위하게 됩니다.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고, 아들의 죽음과 형제끼리의 싸움으로 현실에 실망하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갑니다.

 이때 등장한 유명한 이야기가 '함흥차사'입니다. 차사로 간 인원을 태조가 죽이거나 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차사 인원 중에서 죽은 인원은 조사의의 난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사람 이외에는 없습니다. 태조는 태종에 대한 미움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연이은 도전의 실패로 다시금 태종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태조는 오랜 무관 생활에도 불구하고, 문관으로 자랑스러웠던 아들 태종에게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고 용서했다는 서울 북부의 '살곶이' 다리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이곳이 정말 태조와 태종이 만난 곳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종은 개경(현재의 개성)으로 수도를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 출처 : 아시아경제, 살곶이 다리(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건원릉의 조성과 동구릉 이야기

 구리시에 가면 동구릉이 있습니다. 한양 도성의 동쪽에 존재하는 아홉 개의 능이라 해서 이름이 동구릉입니다. 이곳은 조선 왕릉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동구릉을 구성하고 있는 왕릉은 다음과 같습니다.
  • 출처 : 문화재청, 동구릉(경기 구리시 인창동) 능역도

  제일 먼저 만나는 왕릉은 수릉(綏陵)입니다. 여기는 23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인 문조와 그의 왕비인 신정왕후가 함께 묻힌 합장릉입니다. 문조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인 박보검이 맡은 효명세자입니다.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서 세도정치하에서 왕권 강화를 모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 세도정치가 너무 드세서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 출처 :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그리고 최근 개봉한 영화 <명당>에서 조승우가 터가 좋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다 권력자들에게 의해 죽음에까지 몰리게 되었는데 그때 그 무덤의 주인공이 바로 효명세자, 문조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셨다면 왕릉에 방문하실 때 특별한 재미를 선사할 것입니다.
  • 출처 : 맥스무비, 메가박스플러스엠, 영화 <명당>

 수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재궁(왕의 관)의 위치가 문조가 왼쪽, 신정왕후가 오른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참고로 왕릉의 배치는 왼쪽이 왕, 오른쪽이 왕비입니다.) 대개 재궁은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위치하게 되는데, 승하할 때의 신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봅니다. 문조는 세자의 위치에서 돌아가셨고, 신정왕후는 대비의 위치에서 승하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조는 고양 서오릉에 가시면 비슷한 것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현릉(顯陵)입니다. 이곳은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과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아들이 세조에 의해서 쫓겨난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그리고 직진하게 되면 태조의 건원릉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선조의 목릉(穆陵)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목릉에는 선조와 제1비 의인왕후, 제2비 인목왕후가 묻혀 있습니다. 1화에서 말씀드린 동원이강릉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꽤 넓은 공간에 세 능원이 있습니다. 여기 가시면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능침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선조가 평소 부인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일까요?

 왼쪽으로 가게 되면 인조의 제2비였던 장렬왕후가 묻힌 휘릉(徽陵)이 있습니다. 인조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분인데, 인조와 따로 떨어져 이곳에 있습니다. 그 옆의 원릉(元陵)에는 영조와 정순왕후가 잠들어 계십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버지이고, 정조의 할아버지입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지만,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분이기도 합니다. 원래 영조는 서오릉에 있는 홍릉(弘陵)에 묻힌 정성왕후 옆에 있기를 원했지만 정조가 이곳으로 모시게 됩니다. 서오릉에 가시면 홍릉에는 빈터가 있는데 영조가 미리 자리를 마련해놓았던 곳입니다.

 이어 경릉(景陵)이 나오는데 이곳은 삼연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여긴 헌종과 그의 왕비인 효헌왕후, 효정왕후가 묻혀 있습니다. 헌종은 세도정치 기간에 재위한 임금인데, 가장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헌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입니다. 조선 왕릉 중 아름다운 곳이기도 합니다. 다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기에 안동 김씨였던 효헌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입니다. 헌종은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로맨티스트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서 창덕궁 내에 낙선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낙선재는 그 단아한 멋 때문이라도 창덕궁을 방문하시면 꼭 둘러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 출처 : 문화재청, 취운정에서 바라본 낙선재(창덕궁)

 그 옆에 경종의 왕비인 단의왕후의 혜릉(惠陵)이 위치하고, 마지막으로 숭릉(崇陵)이 있습니다. 숭릉에는 예송 논쟁 시기를 보낸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과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있습니다.

 동구릉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왕릉이 아홉 개나 되니 정말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동구릉을 방문하는 분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바로 태조의 건원릉입니다. 다른 왕릉은 외자의 능호를 쓰지만, 건원릉만 두 자를 쓰고 있습니다. 당시의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능호를 붙이는데 태조의 경우 나라를 개국한 공이 지대하기에 건원(健元)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면 조선 왕릉 중에서 왜 태조의 건원릉이 가장 중심이 되었을까요? 신덕왕후의 정릉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것은 정릉의 경우 기존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고려 왕릉의 양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1화에서 말씀드린 조선 왕릉의 구조를 건원릉에서 최초로 구현했습니다.

 태조는 승하하기에 앞서서 태종에게 신덕왕후 옆에 묻히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태종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태조는 고향인 동북면 함흥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태종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교 사회에서 부모의 말을 어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태종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신덕왕후 옆이 아니면 함흥에 본인의 무덤을 안치하라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왕릉은 도성 밖 100리 이상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왕이 함흥까지 능행을 하게 될 경우 비용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너무 먼 곳으로 왕릉을 조성할 경우 능행 횟수가 줄어들어 자칫 아버지와 화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종은 고민 끝에 묘수를 내게 됩니다. 태종은 태조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방법으로 봉분에 함흥 지역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왕릉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건원릉에는 억새풀이 심어져 있습니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1년에 한 번 한식에 벌초를 합니다. 태조가 태어나고 살았던 함흥 지역의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벌초를 1년에 한 번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종으로서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절충안이었던 셈입니다.

 조선 왕릉은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기에 능침에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벌초 행사에 참석하면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혹은 억새가 절정인 11월에도 가능합니다. 문화재청 조선 왕릉 홈페이지에 접속하시면 예약 가능합니다.

 능침 관람 예약 사이트 http://royaltombs.cha.go.kr > 참여마당 > 문화행사 > 문화행사 안내 > 달력에서 해당 행사를 클릭하면 예약을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참여해보시기 바랍니다.
  • 출처 : 연합뉴스, 건원릉 억새 베기

 건원릉은 1화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조선 왕릉의 배치도가 그대로 표현된 곳입니다. 고려 왕릉 양식과 새롭게 적용된 정자각 등 조선 왕릉의 기본 원칙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건원릉에서 보이는 부분들은 후대에 모두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다만 세조 시기에 석실분은 회격으로 마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회격은 무덤 내부를 채우는 일종의 방벽 같은 것인데, 광릉을 설명할 때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글을 마치며

 동구릉과 태조의 건원릉을 2화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태조는 나라를 세운 왕이지만 말년은 다소 우울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정도전 등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어떻게 보면 배신당한 셈이었으니까요.

 드라마 [SKY캐슬]에서는 입시 코디네이터인 김주영이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복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태종은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형제들이 후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가장 조용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려 했고, 확실하게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태종이 보기에 아버지와 협업도 필요했지만 강력한 왕권을 갖는 것이 새롭게 열린 조선 왕조를 유지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만약 태조가 아들 태종 이방원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관계였다면 어땠을까요? 약간은 다른 역사적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건원릉의 억새풀을 보면 태조 이성계의 강건함도 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도 묻어납니다. 그렇지만 건원릉을 통해서 무력 519년 동안이나 이어진 조선 왕조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억새를 보고 있지만 고려 말 외적을 물리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왕조를 열었던 태조는 건원릉에서 태종이 세우는 나라를 보면서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이름나 있고,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까지 많은 왕과 왕비의 왕릉이 이곳에 위치하게 됩니다.

 아직 건원릉과 동구릉을 가보지 않으셨다면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계절 내내 주변의 자연과 함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고민했던 태조 이성계를 만나보고 추모하는 기회를 가져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왕릉은 죽은 자의 공간입니다. 지난 왕조의 무덤을 보고 감상에 젖고 멋진 자연환경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그 왕릉에 묻힌 왕조의 임금들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가고자 했는지를 생각하며 방문한다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우리 집의 행복을 어떻게 가꿔갈지도 같이 고민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다음에는 세종과 효종의 왕릉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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