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부부 사이의 모든 문제를 드라마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는 취지로 1999년부터 10년 이상 방영되었는데요. 부부 사이가 아닌 연인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법적인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다룰 수는 없지만, 채소연 양과 강백호 군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연인 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사례 중 몇 가지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분 사칭
북산대학교에 갓 입학한 소연이는 장신의 근육질 남자인 백호를 보게 됩니다. 농구를 좋아하는 소연이는 백호에게 말을 걸어 농구를 좋아하는지 물어봤고, 소연이에게 반한 백호는 농구라는 스포츠 자체를 전혀 접해본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농구부의 에이스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출처 : 슬램덩크 만화)
경제적 이익을 취해야 '사기죄' 처벌
백호가 농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소연이는 백호가 괘씸합니다. 하지만 현행법상 백호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인 것만으로는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법 제347조의 사기죄는 타인을 기망해 착오에 빠뜨리고, 피해자의 재산 처분행위를 유발해 이득을 얻음으로써 성립합니다. 다시 말해 사기죄는 사람을 속이는 것과 함께 재산상 피해 사실이 있어야만 혐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만약 백호가 농구부 에이스 행세를 하며 소연이와 만나는 과정에서 돈을 요구했다면 사기미수로 처벌할 수 있습니다. 사기죄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며 미수도 형량은 동일합니다. 단, 상습범이거나 금액이 5억원 이상일 경우 가중 처벌됩니다.
2. 휴대전화 훔쳐보기
소연이는 백호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남녀 관계는 알 수 없는 것인지라 둘은 어느덧 연인이 되었습니다.
(출처 : 슬램덩크 만화)
소연이는 농구부에 입부해 연습을 열심히 하기로 약속한 백호에게 농구화 한 켤레를 사주었고, 둘은 쇼핑을 한 후 차를 한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연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백호는 그녀의 휴대전화에 눈길이 쏠립니다.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태웅이와는 무슨 연락을 하고 지내는지 등 백호는 여러 망상에 사로잡히며 궁금증이 커져만 갑니다.
타인의 휴대전화를 몰래 확인할 경우 '비밀침해죄' 성립
만약 백호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소연이의 휴대전화를 몰래 확인하게 되면 형법상 "비밀침해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는 친구나 연인 간이 아닌 부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이지만 타인의 휴대전화를 몰래 보는 것은 엄연한 사생활 침해로 형법상 범죄행위입니다.
실제로 배우자의 우편물을 몰래 봤다가 처벌된 사례도 있습니다. 2016년 11월 아파트 경비실에서 등기 우편물이 왔다는 연락을 받은 남편은 경비실로 가 우편물을 받은 뒤 아내에게 온 우편물을 뜯어봤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아내는 격분했습니다. 당시 이 부부는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아내는 자신의 사생활이 침해됐다며 남편을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법정에서 남편은 무죄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구지법 제10형사 단독 조성훈 판사는 남편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부부 사이라도 허락 없이 아내의 우편물을 뜯으면 형법 제316조의 '비밀침해죄'를 위반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 비밀침해죄는 친고죄
하지만 비밀침해죄는 당한 사람이 직접 고소를 해야 하는 친고죄에 해당합니다. 보통 연인끼리는 말다툼 정도로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가 많겠죠. 이때는 법률상 '피해자의 승낙'이 인정된 것입니다. 형법 제24조에 따르면 피해자가 자기의 법익에 대한 침해행위를 허용하거나 동의한 경우 가해자의 행위는 처벌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친구나 연인이라는 관계에서 휴대전화를 훔쳐봤다고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 것 같습니다.
비밀번호를 해제한 경우는?
그런데 휴대전화 비밀번호까지 풀어서 휴대전화를 뒤진 경우는 어떨까요? 상대방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상대방 모르게 알아내서 몰래 휴대전화 속 내용을 훔쳐본 경우라면 형법상 비밀침해죄보다는 전자기록장치를 개봉한 것이기 때문에 정보통신망법에 저촉될 여지가 있습니다. 정보통신망법 위반은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형법상 비밀침해죄의 3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 벌금에 비해 강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3. 이별 후 선물 반환 요구
소연이는 백호가 휴대전화를 훔쳐보는 것을 보게 되었고, 다툼 끝에 결국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출처 : 슬램덩크 만화)
그런데 문득 백호에게 사준 농구화가 생각납니다. 유명 브랜드의 제품인데 이렇게 자신을 실망시킨 백호에게 준 것이 아깝습니다. 결국 소연이는 농구화를 돌려달라고 했고, 백호는 돌려주기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건 없는 선물은 '증여'로서 반환 의무 無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호는 선물을 돌려줄 의무가 없습니다. 법률상 연인 간 주고받은 선물은 호의 관계에 의한 증여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증여는 무상으로 준다는 의미입니다. 연인 관계에서 대가 없이 준 만큼, 헤어졌다고 돌려줘야 할 이유도 없는 거죠. 이미 이행된 증여에 대해서는 반환청구를 할 수 없는데요, 선물의 경우 상대에게 전해준 것을 이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고가의 선물인 경우 상황이 달라질까요? 명품 가방이나 외제 차, 혹은 억 단위의 전셋집과 같은…
이 경우에도 증여로 보기 때문에 금액은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물을 줄 때의 의사입니다. 연인에게 아무리 비싼 선물을 했다고 해도 그 당시에 호의로 줬다면 증여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을 걸었다면?
하지만 선물할 당시 주는 쪽이 조건을 걸었다면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연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지급한 선물이라면 이를 반환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소연이가 백호에게 "우리가 사귀는 동안 이 농구화를 신고 농구해"라고 하면서 농구화를 선물했다면 단순한 증여가 아닌 '조건부 증여'가 됩니다. 이별은 '사귀는 동안'이라는 조건의 해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소연이는 반환청구를 통해 농구화를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약혼 예물이 대표적인 '조건부 증여'에 해당합니다. 판례상 약혼 예물은 '혼인의 불성립'을 해제 조건으로 하는 증여입니다(대법원 96다5506). 파혼을 하면 조건이 해제되기 때문에 반환청구를 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파혼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는 반환청구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대법원은 "약혼의 해제에 관해 과실이 있는 유책자는 그가 제공한 약혼 예물을 적극적으로 반환청구할 권리가 없다"고 했습니다(대법원 76므41, 76므42).
이혼했을 경우의 예물은?
이처럼 약혼 예물은 파혼 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 생활을 하다 이혼할 때도 예물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 결혼 5개월 만에 파경을 맞은 부부의 경우 예물을 돌려줘야 한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2011년 2월, 서울가정법원 가사4부(부장 정승원)는 부인이 남편을 상대로 낸 이혼 및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부인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하지만 결혼 1년 만에 헤어진 부부에 대해선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2부(부장 임채웅)는 한 여성이 전 남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위자료만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결혼 생활을 얼마나 지속했는지에 따라 예물의 반환 여부가 달라진 겁니다. 사실혼이 상당 기간 지속된 경우 혼인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보기 때문이죠.
4. 커플 각서의 효력
사소한 다툼으로 헤어지고 앙금이 남을 뻔한 백호와 소연이는, 백호가 삭발까지 하며 소연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출처 : 슬램덩크 만화)
하지만 소연이가 아직도 백호를 미더워하지 못하자 백호는 휴대전화를 훔쳐보지 않겠다는 내용과 일주일 안에 슛 2만 개를 연습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소연이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약속을 어기면 전 재산을 준다'는 말까지 썼는데요, 이를 실제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대부분 효력 없어, 공증받으면 예외적 인정
각서는 일반적으로 법적 효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커플 각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을 말이 아닌 문서로 남겨도 도의적 책임만 있을 뿐 법적 구속력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각서가 '판결문'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강제집행 문구가 들어간 공정증서로 공증을 받아둔 경우입니다. 공증은 제3자가 거래와 관련한 특정한 사실 또는 법률관계를 공적으로 증명하는 걸 말합니다. 공증은 크게 공증인이 해당 서류를 직접 작성하는 공정증서와 신청인이 문서를 작성해 공증을 받는 사서증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약속어음, 금전소비대차계약, 준소비대차계약 등의 공정증서는 변제 기일이 지나면 바로 강제집행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언제까지 돈을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공정증서로 공증까지 받았는데 이를 어겼다면, 채권자는 별도의 소를 제기하지 않고도 재산을 강제집행할 수 있습니다. 연인 사이에서도 단순한 약속이 아닌 채무 관계를 입증할 만한 각서를 썼다면 똑같이 법적 구속력이 생깁니다.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각서는 원천 무효
하지만 공증을 받았다고 해도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각서는 원천 무효입니다. 예를 들면 신체포기 각서 같은 것입니다.
'베니스의 상인'을 예로 들어볼까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돈을 갚지 못하면 심장에 가장 가까운 부위의 1파운드 살을 떼어간다는 계약을 맺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은 민법 제103조에 따라 무효입니다. 따라서 샤일록과 같은 사채업자의 청구는 실제 판결이라면 바로 기각될 것입니다.
사기나 강박에 의해 작성된 각서도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실제로 공증까지 받은 각서가 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습니다.
입시학원을 운영하는 한 남성이 동거하던 여성 몰래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를 알게 된 여성은 "학원에 알리겠다"며 격분했고, 남성은 '다시 바람을 피우면 위자료 10억원을 주고 헤어진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성이 이별을 통보했고, 여성은 약속대로 10억원을 달라며 약정금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이에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부장판사 김대성)는 "각서의 공정성이 없다"며 B씨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여자관계를 폭로한다는 말이 교육업 종사자인 A씨에게 큰 위협이 된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민법 제110조에 따르면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공증을 받은 각서라도 사기 또는 강박에 의해 작성됐다면 어떤 법적 효력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거죠.
소송 땐 '혼인 파탄의 책임' 증거자료
부부 사이에 쓴 각서도 대부분의 경우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특히 한쪽이 불륜•도박•폭행 등 잘못을 저지른 뒤 각서를 쓰는 경우 '비진의(非眞意) 의사표시'로 간주해 무효인 법률행위가 됩니다.
예를 들어 '또다시 바람피우면 5억을 주겠다'는 내용의 각서는 법적 채무를 부담하겠다는 의사 표현이라기보다는 가정생활에 소홀한 잘못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진의가 아닌 의사표시에 해당한다고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 진정한 합의에 의한 계약이 아닌 '반성문'에 가까운 문서로 법적 효력이 없는 거죠.
이혼 시 각서의 효력
이혼소송에서 자주 등장하는 게 바로 각서인데요. 특히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두고 홧김에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법원은 재산분할청구권 포기의 유효성을 매우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행법상 재산분할청구권의 사전 포기는 무효입니다. 법적 효력 또한 없는 거죠.
그렇다고 각서를 아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판결에 영향력을 미칠 만한 증거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혼인 파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혀줍니다. 이를 통해 재산분할, 친권자•양육자 지정, 위자료 등의 분쟁에서 정신적•육체적 고통의 증거자료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혼 전 재산 포기가 아닌 재산분할을 약속한 각서를 썼을 때에는 법적 효력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가령 합의로 '7:3 비율로 재산을 나누기로 했다'거나 '부동산을 부인에게 귀속시키겠다'고 약속했다면 조건부 의사표시로 유효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협의이혼을 전제로 맺은 약정이기 때문에 재판상 이혼으로 넘어갈 경우 이때 각서는 무효가 됩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문제들도 분명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쉽게 행동했다가 나중에 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데요, 연인 간에 서로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질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우 여러분,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즐거운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직 연인이 없으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