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에 담긴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요약해 소개합니다.
제1화. 소년과 어머니의 부엌
"냄새 나는 걸인을 저렇게까지 꼭 집에 들여야 하나?"식구들의 불만도 못들은 체하며 동냥 온 걸인에게 따로 차린 밥상을 선뜻 내어주시던 어머니…
창업자 장원 서성환(1924~2003)님은 그런 어머니 윤독정 여사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서성환 님이 일곱 살 되던 해, 가족은 개성으로 이주했습니다. 세상과 인심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던 어머니의 결정이었습니다. 성품이 곧고 생활력이 강했던 윤독정 여사는 번창한 상업 도시 개성에서 등잔기름, 염색물감, 그리고 머릿기름 등을 도매상에서 받아와 얼마간의 이문을 남기고 팔았습니다. 그렇게 일이 손에 익고 눈이 뜨이자 남의 물건을 받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당시 여성의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를 가꾸는데 필수품이었던 동백 머릿기름을 직접 만들어 팔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원료'의 확보였는데, 그동안 쌓아놓았던 신뢰를 바탕으로 다행히 전국을 다니는 보부상을 통해 좋은 동백나무 열매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제조'의 비결이었습니다. 타제품과 차이를 만들어 내는 비결은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는 미세한 감각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진지한 태도, 그리고 능숙하게 숙련하는 실습과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제품에 마지막으로 '신용'이라
는 덕목이 더해진 윤독정 여사의 동백기름은 차츰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윤독정 여사는 제품에 '창성당제품'이라고 표기했습니다. 당시 최고급 화장품이라는 뜻으로 '당급화장품'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윤독정 여사의 '창성상점'에서 만든 제품이 당급화장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습니다.
16세,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서성환 님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가업을 돕기로 했습니다. 서성환 님의 첫 번째 임무는 원료와 자재구매였습니다. 물자가 부족하고 귀하던 시절이라 원료 확보가 사업의 기초 능력인 셈이었는데, 어머니는 좋은 원료를 찾아 남대문 시장의 거래처를 찾아가는 일을 아들 서성환 님에게 맡긴 것입니다.
시장에 가는 날이면 서성환 님은 도시락 세 개를 자전거에 단단히 묶고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가는 길에 날이 밝으면 도시락 하나를 먹고, 일을 마친 뒤 또 하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남은 하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세끼를 식은 도시락으로 때우며 자전거로 오가는 길은 단순한 장삿길이 아니라 서성환 님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였고, 흙과 바람,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사귀며 세상을 배우는 학교인 셈이었습니다.
한해 남짓 남대문을 오가면서 여유가 생긴 아들에게 어머니는 제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서성환 님은 제조법이 아니라 제조에 임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기술은 훔쳐도 자세는 훔칠 수 없다"라는 어머니의 말이 장원의 철학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제조에 자신이 붙은 서성환 님은 판매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예성강 줄기
를 따라 형성된 상로를 수없이 오가는 서성환 님의 자전거 뒤에도 어김없이 도시락이 묶여있었습니다.
넉넉한 인정과 따뜻한 성품으로 또 하나의 밥상을 준비하던 어머니의 부엌에서 서성환 님의 삶 전체를 함께했던 화장품의 실마리가 된 동백기름과의 만남. 이는 창업자 장원 서성환 님에게 우연이 아니라 숙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