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구탕’ 김명희 창업주와 박혜미 사장님을 만나다 - AMORE STORIES
#한강대로100
202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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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구탕’ 김명희 창업주와 박혜미 사장님을 만나다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2대째 이어지고 있는 용산 대구탕 골목의 원조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 용산 대구탕 골목의 원조 ‘원대구탕’. 1979년 문을 열어 창업주 어머니에게서 아들 부부로 2대째 이어지고 있다. ‘원대구탕’의 창업주 김명희 사장님과 며느리 박혜미 사장님을 아모레스토리가 만났다.

 

‘원대구탕’ 앞에서 김명희 창업주, 박혜미 사장님

 

 

‘원대구탕’, 용산 대구탕 골목의 시대를 열다


어떻게 대구탕집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명희 저는 원래 봉천동 사람이에요. 당시에 친구들이랑 계를 했는데 그중 한 명이 곗돈을 가지고 도망갔어요. 그동안 남편이 벌어 놓은 돈이 다 사라졌죠. 내가 계주였는데, 나는 손해를 봐도 계원들 돈은 책임져야 하잖아요. 돈을 갚아주려고 집도 내놨어요. 그러던 와중에 계원 중에 친한 언니가 저를 도와주고 싶었나봐요. 삼각지에 가게 자리가 하나 나왔는데 장사해 볼 생각 있냐고 묻더라고요. 당시 남편은 이발소를 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빨리 곗돈을 갚아야 했으니 나도 장사에 뛰어든 거죠. 그게 1977년이었어요.

 

어떤 가게를 여셨나요?

김명희 처음엔 다른 음식 장사를 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떠올린 게 시어머니의 대구탕이에요. 밀양에 있는 시댁에 가면 늘 대구탕을 끓여주셨거든요. 대구가 엄청 커서 한 마리만 끓여도 열 명이 거뜬히 먹을 수 있었어요. 내가 먹어본 대구탕 중에 제일 맛있는 대구탕이었는데, 시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셔서 요리법을 알 수가 없었죠. 시어머니 대구탕 맛을 내려고 수없이 대구탕을 끓여봤어요. 결국은 시어머니의 맛을 재현해냈죠.

 

대구탕집으로 바꾸고 나서 장사는 잘 됐나요?

김명희 처음에는 잘 안됐어요. 다 끓여진 대구탕을 접시에 내는 방식이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더라고요. 매일 음식이 남으니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곤 했죠.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대구탕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것이 냄비에 끓이면서 먹는 방식이었어요. 지금은 흔한 방식이지만 그때는 냄비째로 음식을 내는 곳이 없었어요.
이 근처에 육군 본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군인 세 명이 들어와서 ‘이게 뭐예요?’ 하고 물어보더라고요. 대구탕이 뭔지 몰랐나 봐요. 한 번 잡숴보라고 하면서 냄비에 끓여줬더니 너무 맛있다면서 좋아하는 거예요. 그다음 날 그 군인들이 다른 군인들을 데리고 오고, 또 데리고 오면서 군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어요. 늘 군인들로 복작복작했죠. 군복 입은 몸집 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면 괜히 긴장이 될 정도였어요. 그 후엔 육군 본부가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옮기고 나서도 큰 통을 가지고 와서 대구탕을 포장해가고 그랬어요. 군인들이 우리집을 살려준 거죠. 그렇게 가게가 바빠지면서 남편도 하던 일을 접고 같이 대구탕집을 운영하게 됐어요.

 

당시 가게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요?

김명희 지금의 반도 안 됐어요. 너무 작아서 손님들이 늘 길에 서서 기다렸어요. 손님은 몰려오는데 일하는 사람은 나랑 직원, 달랑 둘뿐이라 늘 손이 모자랐어요. 그러면 손님들이 밥을 직접 떠먹기도 하고, 그럼 고마우니까 밥값은 안 받기도 했어요. 참 정겨운 시절이었죠.

 

 

원대구탕의 옛 모습

 

 

‘원대구탕’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요?

김명희 최고로 맛있게 하자고, ‘으뜸 원(元)’을 써서 ‘원대구탕’이라고 지었어요. 남편 이름에 ‘원’이 들어가기도 했고요. 당시 이 주변은 사람도 잘 안 다니고 옷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였는데, 우리 가게가 잘 되면서 옷 가게들은 싹 사라지고 대구탕집을 비롯해서 식당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래서인지 식당 이름들을 보면 ‘원’이라는 글자가 꼭 들어가 있죠.

 

당시에 일과가 어땠나요?

김명희 새벽 일찍 나와서 남편과 가게 앞 거리 청소부터 했어요. 가게 주변도 깨끗해야 하니까요. 당시에는 삼각지 로터리가 있었는데, 옆에 ‘평양집’ 아주머니랑 거기를 다 쓸었어요. 평양집은 우리보다 먼저 생겼는데 그때부터 유명했어요. 이 동네에 식당이 그렇게 많아도 우리집이랑 평양집만 손님이 많았어요. 서로 친해서 손님이 많아서 반찬이 다 떨어지면 서로 가져다가 쓰기도 했죠. 아주머니랑 우리 부부랑 매일 함께 동네를 쓸고 닦고 했는데, 아주머니는 돌아가셨어요. 그때 우린 참 열심히 했어요. 30년 동안 하루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어요. 찾아오는 손님들 밥 못해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명절에도 문을 열었어요. 그래도 손님들 덕에 힘든 것도 몰랐던 것 같아요.

 

육아와 장사를 병행하는 게 힘들진 않으셨어요?

김명희 애들이 이미 국민학생이었는데요, 뭐. 3남매인데 다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었어요. 늘 가게 2층에서 놀고 자고 했어요. 바쁠 때는 돕기도 하고요. 그 조그만 손으로 열심히 도와줬어요.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2대째 이어지는 맛


어떻게 며느리가 가게를 맡게 되었는지요?

김명희 우리 남편이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었어요. 부부 사이가 정말 좋았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맥이 탁 풀리더라고요. 지금도 어저께 돌아가신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요. 원래는 대구탕 하나하나 안치는 것도 다 내가 했거든요. 근데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만약 그때 아들이 못 한다고 했으면 우리 가게는 없어졌을지도 몰라요.

박혜미 어느 날 갑자기 ‘너희가 가업을 이어받아라’라고 해서 하게 된 건 아니고요, 어머님이 아버님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가게 일을 도와주던 저희 남편이 자연스럽게 이어받게 된 거죠. 그런데 남편도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가게 일을 하기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3년 전부터는 제가 맡게 된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 조금씩 일을 돕기만 했지 이렇게 가게를 맡게 될 줄은 몰랐어요.

 

부담되진 않으셨어요?

박혜미 남편 건강이 안 좋고, 애들은 너무 어리니까 선택지가 없었죠. 그런데 가게에 와서 보니까 한동안 주인 자리가 비어있으니 관리가 안 되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시작을 안 하면 안 했지, 할 때는 완벽하게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이왕 할 거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죠. 어떤 사람들은 제가 계산대에 앉아서 계산만 하는 줄 알아요. 절대 그렇지 않거든요. 할 일이 정말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아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죽기 살기로 해야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어머님이 힘들게 가게를 일구어 놓으셨으니 그 명예를 지키려면 열심히 해야죠.

김명희 열심히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너무 잘해줘서.

 

 

원대구탕의 현재 모습

 

 

어머님이 며느리에게 늘 강조하는 게 있을까요?

김명희 좋은 물건을 써라, 재료는 항상 아끼지 말고 써라,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해라. 그것밖에는 없어요.

박혜미 어머님이 지금은 일을 안 하셔도 온 생각이 항상 가게에 가 있으세요. 늘 가게 걱정뿐이시죠. 그래도 저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진 않으세요. 늘 ‘너 잘하고 있다, 잘할 거다’라고 해주시죠. ‘나는 옛날 방식밖에 모르는데 시대가 바뀌었으니 젊은 세대인 네가 잘 할 거’라고요. 건강 조심하라는 얘기는 자주 하세요. 어머님이 젊을 때부터 일을 많이 하셔서 이곳저곳 많이 아프시거든요. 너는 일찍부터 몸 챙기면서 일하라고 당부하시죠.

김명희 고생하니까요. ‘내가 고생한 만큼 며느리도 고생하겠구나’하는 생각뿐이에요. ‘자기 돈 버는데 뭐 어때?’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가게에 와서 보면, 막 붕어 뛰듯이 팔딱팔딱 뛰어다녀요. ‘아휴, 저렇게 뛰어다니면 어떡하나’ 걱정되죠.

박혜미 저희 이모님들이 오래 일하신 분들이라 다들 연세가 많으시거든요. 손님들이 뭘 요청하셔도 마음처럼 빨리 대응하시기가 힘드세요. 그래서 제가 뛰지 않으면 안 돼요. 제일 젊으니까 발로 뛰어야죠.

 

직원분들도 다 오래 일하셨다고요.

박혜미 개업 초기부터 40년 가까이 일한 분도 있었어요. 지금은 건강 때문에 더 이상 일을 못하시게 됐어요. 남아있는 분들은 23년, 17년, 10년 되셨네요. 여기서 오래 일하신 이모님들은 어머님 때부터 가족처럼 지낸 분들이라, 합도 잘 맞고 신뢰가 쌓여 있죠. 어머님과 남편이 직원들에게 정말 잘했거든요. 사장과 직원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말 가족처럼 대해드렸어요. 이모님이 아프셔서 병원에 가야 하면 남편이 이모님 쉬는 날에 맞춰서 병원에 모셔다드리기도 하고요. 어쩔 땐 가족보다도 이모님들을 더 챙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들 이렇게 오래 일해주시는 것 같아요.

 

나중에 가게를 3대까지 물려주실 생각이신가요?

박혜미 지금은 엄마가 힘들어하니까 아이들이 도와주고는 있는데, 나중에 가게를 이어받고 싶은지는 모르겠어요. 이제 막 군대 갔다 온 아이들이라 아직 어리거든요. 몸도 힘들지만, 장사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잖아요. 손님들 작은 표현에도 상처를 받더라고요. 저야 나이가 있으니 유하게 넘길 수 있고, 좋은 손님들이 훨씬 많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까요. 아마 제가 아이들 나이였으면 저도 힘들었을 거예요. 나중에 아이들이 그럴 의사가 있다면, 책임감을 갖고 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물려받을 수도 있겠죠.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사장님의 하루는 어떤가요?

박혜미 처음에 가게 맡았을 때는 아침 7시 반쯤 가게에 나왔어요.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았으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느라고요. 지금은 10시쯤 출근해요. 이모님들과 재료 손질하고 점심, 저녁 장사를 하죠. 다들 퇴근하시면 저는 양념장을 만들고 뒷정리를 한 뒤 밤 11시쯤에 퇴근해요. 거의 하루 종일 가게에 있는 거죠. 일주일 중 월요일 하루가 휴무인데 그날도 쉴 수가 없어요. 매장에 손님들이 없을 때 고치거나 손봐야 할 것들이 있거든요.

 

하루도 못 쉬고 일하면 너무 힘들지 않으세요?

박혜미 초반 2년 동안은 가게에 묵은 것들을 벗겨내느라 정말 애를 많이 썼어요. 그런데 올해 초에 구안와사가 왔어요. 거울을 봤는데 얼굴 절반이 안 움직이는 거예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정신력도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힘들겠다고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일했는데 한순간 몸에 이상이 온 거죠. 그때 ‘내가 힘든 상태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병원에 갔더니 몇 달 동안은 일을 쉬면서 치료에 전념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손을 놓으면 가게는 어떻게 해요. 마스크 끼고 일했죠. 엄마가 걱정된다고 우리 아들 둘이 가게 일을 도와줘서 틈틈이 치료 받으러 다닐 수 있었어요. 두 달만에 다 나았어요.

김명희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게 그 얘기예요. 장사하면서 얼굴 돌아간 사람들이 많거든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빨리 돌아왔어요.

 

 

기본이 좋으면 멋 부릴 필요가 없다


당시에 대구탕집이 많이 생겼다고 하셨는데,
유독 원대구탕만 잘 된 이유가 궁금해요.

김명희 좋은 원물을 썼어요. 생대구를 쓰면 맛이 덜한데, 배에서 갓 잡았을 때 냉동시킨 대구를 쓰니 쫀득쫀득하고 맛있더라고요. 더 좋은 대구를 구하려고 전국 각지를 찾아다녔어요. 부산에 가서 뱃사람들한테 어떤 물건이 좋은지, 언제 실어 오는지 물어봤다가 좋은 대구를 구하면 신나서 냉동창고에 넣어두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대구탕에 다른 재료를 이것저것 넣어보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원물이 좋으면 그럴 필요가 없더라고요. 나쁜 건 한 번도 써본 적 없어요. 그래서 지금도 맛이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건 아주 자신해요.

박혜미 어머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원물이 좋으면 멋을 부릴 필요가 없대요. 진짜 맛은 원재료의 신선함이지, 아무리 좋은 육수나 화려한 양념을 써도 소용없다고요.

 

생물을 쓰는데 재료 수급이 어렵진 않으세요?

박혜미 상황에 따라 힘들 때가 있죠. 예를 들면, 지금 러시아가 전쟁 중이잖아요. 초반에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대구 가격이 4~5배 오르더라고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재료는 좋으니까 일단 써야죠. 어머님 말대로 좋은 재료에 충실한 것, 그게 저희 집의 철학이니까요.

 

대구탕과 함께 나오는 아가미 젓갈 무김치도 유명하다고요.

김명희 대구는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내장이랑 알까지 다 쓰잖아요. 아가미도 염장해놨다가 젓갈을 담그는데, 이건 경상도식이에요. 남편이랑 연구해서 아가미 젓갈로 무김치를 만들었죠. 가게에서 직접 만드니까 더 깨끗하게 손질하고, 맛도 더 좋아요.

박혜미 다른 반찬도 해봤는데 손님들이 많이 드시지 않더라고요. 대구탕이랑 다른 반찬들이 어울리지도 않고요. 그래서 반찬은 아가미 젓갈 김치와 동치미만 내고 있어요.

 

 

아가미 젓갈 무김치, 동치미

 

 

원대구탕의 숨은 보석 같은 메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혜미 얼마 전부터 대구 튀김을 개시했어요. 예전부터 손님들이 튀김을 많이 찾으셨는데 시간이 없어서 레시피 개발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가게를 맡으면서 만들었죠. 튀김용 냉동 대구살을 쓰는 게 아니라, 대구를 손질할 때 따로 튀김용으로 대구살을 빼놓고 나중에 포를 떠서 튀겨요.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더라고요. 대구 튀김만 이번에 추가된 메뉴고, 나머지는 어머니가 하실 때부터 50년 동안 이어진 메뉴들이에요. 대구탕 드실 때 대구 튀김도 한 번 꼭 드셔보세요.

김명희 나도 먹어보니까 맛있더라고요. ‘아이고, 이제 이것만 찾겠다’. 싶었죠.

 

 

원대구탕의 숨은 보석 같은 메뉴, 대구 튀김

 

 

대구탕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나요?

박혜미 무엇보다도 불 조절이 중요해요. 처음에 끓일 때는 센 불로 팔팔 끓이다가, 점점 중불로 줄여주면서 대구를 뒤집어주고 콩나물 등 내용물을 꺼내줘요. 미나리는 먼저 먹고 대구에 맛이 밸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해요. 대구가 다 익으면 약한 불로 줄여주고요.
가끔 ‘별로 대단한 맛도 아니더라’ 하는 후기를 볼 때 조금 안타까워요. 아마 불 조절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시간 여유가 없어서 진하게 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셨을 거예요. 손님들에게 ‘더워도 조금만 더 끓여주세요’라고 당부드리는 이유예요. 적당한 불 조절과 약간의 기다림이 대구탕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 같아요.

 

 

원대구탕의 대구탕

 

 

대구탕 가격이 저렴한 편인 것 같아요.

박혜미 최대한 가격을 유지하려고 해요. 식자재 물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500원을 올려야 해도 굉장히 고민해요. 물가가 높아진 것에 비해서는 많이 안 올렸는데, 손님들에게는 늘 죄송하죠. 좀 더 받아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옛날에는 몇 천 원이었는데 비싸다는 분들도 있고요.

 

 

같이 밥을 퍼주던 손님들, 30년의 원동력


30년이 넘게 일하셨는데, 그때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김명희 손님들이죠. 바쁠 때는 손님들이 다 같이 일해줬어요. 나 혼자서는 아마 못했을 거예요. 가게가 바쁘면 밥도 직접 떠가고, 다른 손님들 밥도 떠주고, 음식도 날라주고. 그런 친근한 분위기였어요 맛있게들 먹고 남기는 사람도 없었어요.

박혜미 용산이 터가 좋은지 가게 오시는 손님들 대부분 좋으세요. 파출로 다른 지역에서 여기로 일하러 온 직원들이 하나같이 ‘여기 손님들은 다 점잖고 예의바르시다’고 하더라고요.

 

단골손님이 많은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박혜미 저희 음식이 모든 사람 입에 다 맞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런데 먹을 땐 엄청난 맛까진 아닌 것 같은데 며칠 있다 보면 자꾸 생각이 난대요. 그 맛이 자꾸 맴돌아서 며칠 뒤에 또 오시고, 또 오시고, 그렇게 단골이 되는 것 같아요.
어머님 때부터 계속 오시는 단골손님도 많고요. 군인 때 와서 제대하고 나서 친구들이랑 오고, 나중에 애인 생겨서 오고, 결혼해서 아이랑 오고, 그렇게 2대째 오는 손님도 있어요.

 

아모레 직원들도 자주 찾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면?

박혜미 아모레 직원분들도 많이 오세요. 사원증이 없으면 모르는데, 대화하다 보면 아모레퍼시픽 직원분들이더라고요. 늘 상냥하시고 같이 오신 분들끼리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요. 옷도 개성 있게 입으시고요. 기억 남는 손님은.. 저한테 예쁘다고 한 여자 손님?(웃음)

 

그러게요. 어머님도 그렇고, 두 분 다 피부가 정말 좋으세요.
비결이 대구탕일까요?

김명희 오늘도 먹었잖아요. 끓는 냄새만 맡아도 좋아요. 질리지도 않아요.

박혜미 저도 대구탕 자주 먹어요.
제가 먹어봐야 대구 상태를 알기도 하고, 워낙 좋아해요. 사람들이 저 대구탕 먹는 거 보면 대구탕 먹으려고 시집온 것 같다고 해요. 하도 잘 먹으니까(웃음).

 

신용산에 오래 계셨는데 자주 가는 공간 있으세요?

김명희 요즘은 노인정이죠. 장사만 하다 보니 친구들이 다 사라졌어요. 용산에서 오래 일했어도 가게에만 있었으니 아무것도 모르죠.

박혜미 지금 제가 딱 그래요. 온종일 가게에서 보내요. 친구도 만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려면 가게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어요. 용리단길이 생기고 주변에 핫플이 있다고 해도 저희는 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도 저도, 여기서 오래 일했는데도 아는 곳이 없어요.

 

장사하시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김명희 손님들이 ‘맛있다’고 하시면서 그릇을 싹싹 비울 때가 제일 행복했죠. 조금 남은 국물에도 밥을 비벼서 다 드시면 그게 너무 행복해서 계속 쳐다보고 그랬어요. 먹고 싶어서 쳐다보는 사람처럼요. 간혹 음식을 남기면 제가 주방 가져가서 먹어봤어요. ‘왜 남겼을까,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요. 다음날 오실 때 물어보면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다, 맛있다’고. 그 대답 들으면 안심하곤 했죠.

박혜미 맞아요. 진짜 행복하고 기분 좋을 때가 ‘맛있게 먹었다’고 몇 번씩 인사하고 가실 때예요. 그리고 오랜만에 오신 분들이 맛이 안 변하고 그대로라고 할 때, ‘내가 잘못하고 있진 않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죠.

 

자영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김명희 잘해보고 싶은 욕심에 이것저것 첨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다가 안 되면 문을 닫고요. 그런데 음식에 자신이 있으면 주변 말에 휘둘리지 말고 내 것만 잘하면 돼요. 맛있고, 깨끗하게.

박혜미 저는 각오하시라고 말해드리고 싶어요(웃음) 진짜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면 힘들거든요.

 

두 분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요?

김명희 늘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손님들 덕분에 정말 행복했죠.
또 남편이 생전에 같이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가게를 시작하고 나서 원인 모를 두통이 있었는데 아무리 병원에 다녀도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더라고요. 고개만 돌려도 머리가 쏟아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남편이 전국을 데리고 다니면서 몸에 좋다는 건 다 먹인 거예요. 거제도에 가서 장어를 잡아서 고아줬는데 그거 먹고 머리 아픈 게 싹 나았어요. 두통을 고쳐주고 가신 거죠. 그때가 제일 행복한 기억이에요.

 

 

창업주 김명희 님과 남편 고 손양원 님

 

 

박혜미 저는 큰 사고 없이, 주변에 아픈 사람 없이 하루하루 무탈하게 지나가는 게 행복 같아요. 행복이란 게 별게 아니고 무난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10년 후에 내 모습을 그려본다면?

어머님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요. 10년 후면 우리 손자들 다 장가가 있겠네요(웃음).

며느리 처음에 ‘딱 10년 열심히 해보자’ 하고 장사에 뛰어든 거거든요. 그게 벌써 3년이 됐네요. 아직도 7년이 남았단 말이죠(웃음). 힘이 들긴 하지만 손님들이 오셔서 긍정적인 말을 해주시면 그게 또 하루를 버티게 하는 것 같아요. 이왕이면 남은 시간도 재미있게 일하고 싶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가게가 사라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죠.

 

 

원대구탕에서 인터뷰 중인 김명희 창업주, 박혜미 사장님

 

 

epilogue
시어머니의 대구탕을 떠올리며 만든 며느리의 대구탕이 또 다시 며느리로 이어지기까지, ‘고부’라는 인연이 참 신기하다. 귀한 인연으로 수십 년 동안 명맥을 잇고 있는 원대구탕이 지금처럼 오래도록 용산을 지키기를 바란다.

 

 

한강대로 100은 아모레퍼시픽 주변 사장님들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위기를 타개한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에디터 신혜원(책식주의)

사진 디자인몽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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