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뮤다 삼각지’ 임솔 사장님을 만나다 - AMORE STORIES
#한강대로100
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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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뮤다 삼각지’ 임솔 사장님을 만나다

MZ세대를 사로잡은 용리단길 대표 맛집

한적한 신용산의 한 골목. 유난히 줄을 길게 늘어선 식당이 있다. 폭립과 멕시칸 요리로 용리단길 대표 맛집이 된 ‘버뮤다 삼각지’. 거리두기가 일상이었던 코로나 시기에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버뮤다 삼각지’의 임솔 사장님을 아모레스토리가 만났다.

 

‘버뮤다 삼각지’ 앞에서 임솔 사장님

 

 

열다섯 소년, 제이미 올리버를 꿈꾸다


원래 요리사가 꿈이었나요?

중학교 때 처음으로 요리사라는 꿈을 갖게 됐어요. 제이미 올리버라는 외국 스타 셰프의 요리 프로그램을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요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공고에 갔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엔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더라고요. 제 관심은 늘 요리였죠. 대학은 꼭 요리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공고에서 요리 대학에 가려면 특별 전형에 지원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조리사 자격증이 필요했어요. 요리 학원에 다니면서 조리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했죠. 열 번을 낙방했어요. 수능 딱 한 달 전이었는데, 그때도 떨어지면 요리 대학에 지원할 수 없었어요. 무조건 붙어야 했죠. 극적으로 열한 번째 시험에 붙어서 요리 대학에 갈 수 있었어요.

 

시험에 열 번 떨어졌을 때 좌절하진 않으셨어요? ‘재능이 없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집에서만 요리를 해봤지,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건 요리 학원이 처음이었거든요.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나에게 재능이 있든 없든, 잘하든 못하든 요리가 좋았어요. 좋으니까 한다는 마음이었죠. 지금도 요리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좋아하니까 하는 거예요.

 

요리 대학 졸업 후 진로는 어땠나요?

대학에서는 호텔 조리학과에서 요리를 배웠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일한 곳도 호텔이었죠. 저는 뷔페 파트에서 일을 했는데 신입이라서 밥을 짓고, 과일을 깎고, 베이컨을 굽는 것 같은 재료 손질을 담당했어요. 그런데 같은 일을 6개월 동안 하고 있으니 조금 초조해지더라고요. 물론 신입 땐 궂은 일부터 하는 게 당연하지만 여기선 실력을 빨리 성장시킬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호텔을 그만두고 싱가포르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죠.

 

왜 싱가포르였나요?

사실 싱가포르란 나라를 잘 몰랐어요. 그런데 대학 교수님이 싱가포르가 ‘미식의 나라’라고 한 게 기억나더라고요. 찾아 보니 싱가포르는 유럽의 미식 국가들에 비해 항공료나 거주하는 데 드는 비용이 훨씬 저렴했어요. 관광 비자로 싱가포르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인데, 3개월 동안의 생활비를 계산해보니 400만 원 정도 되더라고요. 부모님께 돈을 빌려서 3개월 안에 무조건 취업하겠다는 생각으로 떠났어요. 숙소만 구해 놓고 그 외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요.

 

취업은 바로 하셨나요?

처음 한 달은 취업 중개 사이트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렸어요. 역시나 연락이 오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죠. 그때부턴 이력서를 들고 직접 레스토랑에 찾아다녔어요. 당시엔 영어를 하나도 못해서 ‘나 일할 수 있어’만 영어로 외워서 갔죠. 그런데 막상 일하고 싶은 식당에 도착하니 너무 창피해서 들어가질 못하겠더라고요. 꼬박 두 시간 동안 식당 앞을 서성거렸어요.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으니 셰프가 나오더라고요. 달려가서 일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그 식당은 외국인을 더 고용할 수 없다고 했어요. 아마 식당마다 고용할 수 있는 외국인의 숫자가 정해져 있나 봐요. 그런 식으로 두 달 동안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다녔는데 같은 이유로 다 퇴짜를 맞았어요. 비자 만료까지는 한 달이 남은 상황이었어요. ‘한국 돌아가면 뭐 해먹고 살아야 하나’ 낙심해있는데, 한 호텔에서 연락이 왔어요. 면접을 보러 오라고요. 채용 담당자는 제가 영어를 못하니까 채용을 주저했는데, 헤드셰프가 이력서를 들고 발로 뛰어다니는 제 모습을 좋게 본 것 같아요. 열정을 보고 뽑아 줄 테니까 한 번 일해보라고 기회를 줬죠.

 

호텔에선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엔 조식 파트를 담당했어요. 특이한 점은 신입에게 재료 손질을 시키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경력이 있는 셰프들이 재료 손질을 했어요. ‘이건 내가 할 테니 넌 2주 안에 요리를 다 배워. 그다음부턴 너한테 다 맡길게’라는 식이었죠. 그래서 주방에 들어가자마자 팬을 잡았어요. 당시에 셰프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운이 좋았죠. 2주 후에 바로 실무에 투입됐는데, 조식 주방을 저 한 사람에게 다 맡기더라고요. 조식 메뉴가 20개 정도 됐는데, 대부분 처음 해보는 음식들이었어요. 그러니 주문도 밀리고, 음식 모양도 안 예쁘고, 컴플레인도 많이 들어왔죠. 혼자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2시간 일찍 출근하고 4시간 늦게 퇴근하면서 연습했어요. 레시피를 몸에 익히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그렇게 3개월 정도 지나니 어느 정도 주방에서 저만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어요. 당시엔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경험이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나 자신을 몰아붙이며 뭔가를 만들어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아무리 바쁜 매장에서 주문이 밀려도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호텔에서 핫파트, 콜드파트, 디너 파트까지 경험하고 1년 반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싱가포르 호텔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젊은 셰프들이 모여 ‘버뮤다 삼각지’를 만들다


돌아올 땐 한국에 음식점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오셨나요?

아뇨. 반대예요. 오히려 요리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싱가포르에서 요리하면서 너무 힘들었거든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고, 향수병도 심했어요. 영어를 잘 못하니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요. 패션에 관심이 생긴 시기라 한국에 돌아가서 옷 장사를 했어요. 싱가포르에서 번 돈을 다 투자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안됐어요. 그러던 중에 예전에 호텔에서 같이 일했던 형이 홍어집에서 같이 일해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마침 쉬고 있던 차라 한번 해보겠다고 했죠.

 

홍어집 일은 어떠셨어요?

홍어를 잡고 손질하는 것부터 손님들에게 설명해 드리는 일을 했는데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직원들끼리도 단합이 잘 돼서 즐겁게 일했어요. 홍어집 사장님도 같은 호텔 출신이었는데, 그분이 너희들 다 실력 있고 젊은데 여기서 직원으로만 일하기는 아깝다고 가게 한 번 차려보자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렇게 홍어집에서 같이 일하던 네 명이 모여서 차린 식당이 ‘버뮤다 삼각지’예요.

 

왜 신용산에 가게를 열었나요?

당시 눈여겨 본 지역 중에서 임대료가 제일 저렴했거든요. 경복궁, 이태원, 여의도 등 여러 곳을 알아봤는데 그곳들보다 몇 배는 더 저렴했어요. 당시 신용산은 상권이랄 게 없고 거의 가정집뿐이었어요. 임대료도 잘 맞았고, 몇 년 후에는 아모레퍼시픽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이곳에 터를 잡게 됐죠.

 

 

‘버뮤다 삼각지’ 초기 모습과
당시 임솔 사장님

 

 

2015년에 개업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장사는 잘 됐나요?

잘 안 됐어요. 거의 수익이 안 남았죠. 남미 요리사에게 레시피를 배워서 멕시칸 음식점으로 시작했는데, 장사가 잘 안되니까 이것저것 메뉴에 추가했어요. 동네에서 안 파는 건 뭐든 팔았어요. 그러다 보니 명확한 컨셉 없는 무국적 음식점이 되어 버렸죠. 당연히 손님도 없었고요. 투자금 회수가 안되니 동업자들 사이에서 이제 그만하고 가게를 팔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고민 끝에 제가 동업자들의 지분을 사서 가게를 인수했고, 그때부터 저와 아내, 둘이서 운영하게 됐어요.

 

장사가 잘 안 되는 가게였는데 왜 인수하기로 결정하셨어요?

동업자들과 같이 운영할 때는 큰 책임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내가 가져가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수익도 나지 않으니 가게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었고요. 저도 가게를 파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는데 아내가 조금만 더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가게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그렇게 장사가 안 되는 시기였는데도 말이에요. 아내가 아니었다면 지금 ‘버뮤다 삼각지’는 없었을 거예요. 아내는 패션 디자이너였는데 가게 운영에 뛰어들어서 메뉴판 디자인부터 가게 인테리어, 서빙까지 모두 도맡았어요. 인테리어 일부를 새로 하고, 칵테일 바를 만들어 칵테일 만드는 모습을 보여드리면서 이전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죠.

 

 

아내가 직접 디자인한 메뉴판

 

리뉴얼한 외관과 인테리어

 

 

기다리며 노력하는 자가 운을 맞는다


웨이팅이 생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코로나 때부터였어요. 손님이 조금씩 늘더니 웨이팅이 생겨서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오지?’ 저도 의아했어요. 아마 폭립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장사가 안 되니 이것저것 다 도전해보던 시기였는데, ‘폭립을 팔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정말 불현듯이요. 패밀리 레스토랑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폭립을 통으로 파는 곳이 많지 않았거든요. 파는 곳들은 가격대가 굉장히 높았고요.
유명하다는 집은 다 찾아다니면서 먹어 보고, 레시피 연구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온도와 시간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 오븐에 구워도 보고, 삶아도 보고, 소스도 다르게 해보고요. 조리법에 따른 맛의 미묘한 차이를 찾아내려고 폭립에만 매달려 있었죠. 아내가 세 달 정도는 매일 폭립만 먹었을 정도예요. 그러다가 찾아낸 조리법이 수비드였어요. 수비드로 조리하니까 고기가 훨씬 부드럽고 맛있었어요. 바로 수비드 머신을 구매했죠.
지금은 가격이 조금 올랐지만 초기에는 2만 원대에 판매했어요. 가성비가 좋으니 고객 반응이 정말 좋았죠. 폭립을 개발한 시기가 아모레퍼시픽이 돌아오고 ‘몽탄’이나 ‘효뜨’ 같은 힙한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며 용리단길 상권이 뜨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렸어요.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저희가 수혜를 봤죠. 운이 정말 좋았어요.

 

폭립이 효자 상품이었네요.

맞아요. 폭립이 잘 팔리면서부터는 다른 메뉴들은 정리하고 폭립과 멕시칸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가게에 ‘컨셉이 없다’는 것이 가장 고민이었거든요. 멕시칸 음식점이라는 정체성은 가져가되 인기 메뉴인 폭립을 가져가는 것으로 가게의 방향성도 확립할 수 있었죠.

 

‘버뮤다 삼각지’의 베스트셀러 메뉴를 추천해 주신다면?

꼭 하나 먹어야 된다면 추천하는 건 단연 폭립이에요. 제가 폭립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고기의 부드러움인데, 고기를 삼킬 때 어느 정도 씹어야 하는지까지 계산하면서 레시피를 만들었어요. 고기가 가장 부드러운 온도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서 수비드 하죠. 아마 이 정도 고기 퀄리티에 이 가격의 폭립은 어딜 가도 만나기 힘들 거라고 자부해요.

 

 

‘버뮤다 삼각지’의 대표 메뉴, 폭립

 

 

두 번째 추천 메뉴는 ‘버섯 무덤 파스타’예요. 버섯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버섯을 엄청나게 많이 넣고 만들어 준 파스타예요. 아내가 너무 맛있다고 메뉴에도 넣어보자고 하더라고요. ‘버섯 무덤 파스타’라고 재미있게 이름을 짓고 메뉴에 넣어봤죠. 손님들 반응도 굉장히 좋았어요. 버섯의 풍미를 좋아하시면 꼭 한 번 드셔보세요.
마지막 추천 메뉴는 엔칠라다인데요, 엔칠라다는 또르띠야에 치즈와 채소, 고기, 해산물을 넣고 구운 멕시코 음식이에요.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제육볶음과 매운 로제 소스를 넣어 퓨전식으로 만들었어요. 매콤하고 달달하고 짭조름한, 맛의 레이어를 느낄 수 있어서 많이 찾으시죠.

 

 

‘버섯 무덤 파스타’와 엔칠라다

 

 

최근엔 신용산에 또 새로운 음식점을 내셨다고요.

‘시옥’이라는 싱가포르 음식점이에요. 싱가포르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동안 싱가포르는 생각도 하기 싫었어요. 그곳에서 요리 경력을 쌓을 수 있었지만, 힘든 기억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신혼여행을 싱가포르로 가게 됐어요. 근데 이번엔 너무 즐거운 거예요. 일하러 갔을 땐 몰랐는데 음식도 너무 맛있고요. 그 후 싱가포르 여행을 자주 가게 됐고, 싱가포르 음식점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싱가포르에서 음식을 배운 것, 신혼여행으로 다시 싱가포르를 가게 된 것 모두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년 한 해 열심히 준비해서 올초 신용산에 가게를 열었어요.

 

'시옥'도 '버뮤다 삼각지'처럼 잘 되나요?

처음에는 장사가 정말 잘 됐어요. 따로 홍보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많이 찾아오시더라고요. ‘마케팅도 안 하는데 이렇게 잘 되다니, 나 정말 잘하나 봐’ 하면서 어깨가 좀 올라갔어요. 그런데 매출이 점점 떨어지더라고요. 그때 자숙을 좀 했죠(웃음). ‘장사가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걸 다시금 느꼈어요. 지금은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본질에 집중하며 매출을 올리고 있어요. 처음엔 진짜 현지 싱가포르식으로 음식을 만들다가 손님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한국인 입맛에 맞게 약간 레시피를 수정했어요. 싱가포르 음식이 궁금하시면 시옥도 한번 찾아주세요.

 

 

싱가포르 음식점 ‘시옥’과 대표 메뉴들

 

 

힘들 때마다 바닷가재를 떠올린다


식당 창업 후,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요?

코로나 전이었어요. 폭립 메뉴를 개발하기 전에 매출이 바닥을 쳤거든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아내와 둘이 하루 종일 일하면 겨우 한 명 인건비 정도가 남았는데, 같은 금액이어도 회사에 다니면서 버는 것과는 다르거든요. 자영업은 하루 종일 가게에 묶여 있어야 하니까요. 아내는 임신을 해서 만삭인데도 계속 출근을 했어요. 아이를 낳고도 아이를 업고 서빙을 했고요. 매일이 스트레스였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걱정이 더 커졌어요. 돈이 부족하니 한동안 아내 친정에서 기저귀값과 분유값을 내주셨어요.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고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암담했죠. 아내에게 가게를 포기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는데, 그때 아내가 딱 1년만 더 해보자고 설득하더라고요. 여태까지 노력한 게 너무 아깝지 않냐고요. 거짓말처럼 그 1년 사이에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어요.

 

후회할 뻔 했네요. 힘든 시기에 마음 관리는 어떻게 하셨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디에 하소연을 하기보다는 그냥 참아내는 성격이에요. 예전에 바닷가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바닷가재는 몸이 커지면 주기적으로 탈피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힘들다고 해요. 그런데 탈피를 하고 나면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대요. 힘들 때마다 바닷가재를 떠올렸어요.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지만, 버텨내면 다음엔 이 정도의 일로는 끄떡없을 만큼 강해져있을 거라고 되뇌었죠. 힘들 때 바닷가재 이야기를 떠올리면 힘이 되더라고요.

 

사업이 어려울 때도 꼭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재료비와 인건비는 절대 아끼지 말자는 게 저의 신념이에요. 음식은 재료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음식의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좋은 재료를 수급할 수 있는 거래처를 꾸준히 찾아다니고 있어요. 또, 가게가 바빠지고 직원을 늘리면서부터는 인건비에 대한 고민도 많았는데요, 인건비를 아끼면 서비스의 질도 그만큼 떨어지더라고요, 다섯 명이 할 일을 네 명이서 하면 힘드니까 그만큼 손님 응대에 소홀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되도록 인원은 1.5배 정도로 투입하려고 해요. 직원들이 편하게 일하면 그만큼 손님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로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1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오래 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일이 잘 안되는 시기, 제가 가장 힘든 시기에도 저를 믿고 지지해 준 아내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커졌고요.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부침을 겪어내며 생긴 우리 가게에 대한 신뢰도 있어요. 이 가게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죠. 그 믿음 덕에 힘든 시기가 와도 예전보다는 힘들지 않게 이겨낼 수 있는 것 같아요.

 

 

늘 힘이 되어주는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

 

 

부부가 같이 일하는 것의 장단점은 무엇인가요?

장점은 힘든 상황에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서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단점은 아무래도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고 편한 사이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상대에게 풀게 된다는 점이에요. 바빠서 예민해질 땐 더 부딪힐 때도 있고요. 갈등이 생기면 대개는 제가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자영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팁이 있다면?

저처럼 평범한 코스를 밟고, 평범한 요리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꼭 전략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거의 주 7일을 일하는데 퇴직금도 없고 연차도 없는 직업이 자영업인데 돈까지 못 벌면 너무 힘들거든요. 기획이면 기획. 마케팅이면 마케팅, 확실한 전략을 갖고 시작하시면 좋겠어요.

 

현재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가게는 잘 되지만, 스스로는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식재료 공장까지 매장을 3개 운영하고 있으니,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있으면 제가 가서 해결을 해야 하거든요. 몸이 계속 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 사업을 어떻게 성장시킬지에 대한 고민을 할 시간이 부족하죠. 요즘 정말 잘하는 셰프들이 많잖아요. 늘 새로운 기획을 하고 탄탄하게 브랜딩을 해나가는 셰프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성장하고 있는데 난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는 약간의 자괴감이 들 때가 있어요. 장사가 안 될 땐 돈을 조금만 더 벌어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느 정도 잘 되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저 사람과는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내 길을 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최근 가장 뿌듯했던 일은 무엇인지도 궁금해요.

’버뮤다 삼각지’가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가면서 ‘더 현대 서울’에서 팝업 제안이 왔어요. 팝업 스토어가 힘들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처음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버뮤다 삼각지’는 따로 마케팅을 하지 않아서 홍보 목적으로 도전해보기로 했죠. 바로 옆에서 굉장히 유명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같이 팝업을 했는데, 초반부터 줄을 죽 늘어서더라고요. 저희는 상대적으로 손님이 없어보여서 기가 많이 죽었죠. 결과적으로 매출은 크게 차이 나지 않았어요. 주문과 동시에 음식이 나갈 수 있게 시스템을 만들어서 회전율이 좋았죠. 매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게를 ‘증명’했다는 뿌듯함이 컸어요. 백화점 측에서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버뮤다 삼각지’라는 브랜드에 대한 의구심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내부에서도 굉장히 만족했다고 하더라고요. 그후로도 꾸준히 협업 제안이 오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팝업 요청이 많이 왔어요. 시간 여유가 생긴다면 팝업은 또 해보고 싶어요.

 

 

백화점에서 열린 팝업 스토어

 

 

용리단길의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게


사장님에게 아모레퍼시픽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단어를 골라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비옥한 땅’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고객 불모지였던 신용산에 아모레퍼시픽이라는 회사가 비옥한 땅을 다져줌으로써 작은 가게들이 씨앗을 뿌릴 수 있었고, 그 가게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큰 나무들이 될 수 있었어요. ‘버뮤다 삼각지’가 신용산에 가게를 열고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는 것도 아모레퍼시픽의 덕이 크다고 생각해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동안 신용산의 변화 과정을 봐오셨는데 느낌이 어떠신지요?

고등학교를 용산에서 다녀서 오래전부터 이 동네의 변천사를 봐왔는데요, 당시 이 동네는 정말 허름한 동네였어요. 지금은 아모레퍼시픽 같은 큰 회사도 많고 상권도 발달해서 정말 좋아졌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용리단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유행이 지나면 한순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는 곳들이 많잖아요. 용리단길을 꾸준히 찾으실 수 있게 저는 제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려고 해요.

 

장사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어요?

현재 직원이 15명 정도 있는데요, 지난 크리스마스 때 파티를 했거든요. 마니또를 정해서 선물도 주고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그때 직원들이 너무 즐거워하더라고요. 직원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좋고요. 직원들이 워크샵이나 파티, 소소한 이벤트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장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죠.

또, 손님들 중에 다 먹고 나가시면서 “너무 맛있다”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예전에는 손님들이 제 음식을 드시는 걸 못 쳐다봤어요. 요리에 자신이 없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안 좋은 얘기가 있을까 봐 리뷰도 잘 못 읽었어요. 그래서 손님들께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벅차고 감사해요. 공짜로 뭐라도 막 드리고 싶을 정도로요.


 

 

직원들과 워크샵

 

 

최근 ‘흑백요리사’라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었는데요, 혹시 사장님이 출연하셨다면 ‘인생 음식’으로 내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가요?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내가 저기 나가면 저 셰프들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대단하신 분들이라 아마 같은 재료로 요리하면 이기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희소한 재료인 홍어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특이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루지 못하는 재료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홍어집에서 일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녹일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장님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저의 행복이에요. 나이가 들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실감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하죠.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면?

신용산에서 ‘버뮤다 삼각지’를 더 뚜렷한 색으로 확실하게 브랜딩해서 다른 지역에도 2, 3호점을 내고 싶어요. 이름은 그대로 ‘버뮤다 삼각지’로 하고요. 장기적으로는, 좀 이상적인 꿈이긴 한데 외국에서 한식 장사를 해보고 싶어요. 현실적으론 쉽지 않겠지만 뭐, 꿈이니까요(웃음).

 

 

‘버뮤다 삼각지’에서 인터뷰 중인 임솔 사장님

 

 

epilogue
가게의 인기 비결을 묻자 10년 가까이 버티어 온 뚝심도, 호평을 받는 음식도 아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답하는 그에게서 겸허함을 보았다. 그의 바람대로 ‘버뮤다 삼각지’가 2. 3호점으로 저변을 넓히며 신용산을 널리 알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한강대로 100은 아모레퍼시픽 주변 사장님들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위기를 타개한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에디터 신혜원(책식주의)

사진 디자인몽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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