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9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가 개막작인 <군중낙원>을 시작으로 10월 2일부터 11일까지 장장 10일 동안 화려한 은막의 축제를 펼쳤습니다. 19년 동안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국제영화제로 발돋움하며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대표 축제가 된 BIFF, 그 동안 아시아 영화의 창구로서 큰 역할을 해왔던 BIFF는 이제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와 어깨를 견주며 전 세계 씨네필(cinephile)과 영화인의 주목을 받는 영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평소 부산국제영화제를 알고는 있었지만, 시간이나 지리적인 접근성 때문에 가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BIFF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내년부터는 시간을 내셔서 참석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올해 못 가신 분들을 위해서는 이미 수입되어 개봉을 기다리는 19회 주요 상영작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1아시아(Asia)
지아장커 감독의 <천주정> / 출처 : 씨네21
BIFF는 1회부터 지금까지 아시아 각국의 영화들을 세계에 소개한다는 소명을 가지고 운영된 영화제입니다. 상영작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시아 영화의 창> 섹션은 BIFF의 이러한 본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데요. 이 섹션을 통해 발굴된 많은 감독들이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 감독이 된 점을 상기해본다면 BIFF가 19년동안 얼마나 큰 영향력으로 성장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에게는 <스틸 라이프(Still Life)>, <플랫폼(Platform)>, <천주정(Touch of the Sin)>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중국의 지아장커(賈樟柯) 감독은 BIFF 3회 때 <소무>라는 영화를 들고 부산을 찾았었는데, BIFF를 통해 지아장커는 중국 6세대 감독으로서의 첫 시발탄을 쏘며 화려하게 데뷔하게 됩니다. 작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거장이 된 지아장커의 데뷔에 BIFF가 있었다는 점, 놀랍지 않으세요?
지아장커 뿐만이 아니라 BIFF는 그 동안 소외되었던 이란, 말레이시아 등의 국가 출신 영화들을 꾸준히 소개하며 숨겨진 걸작들을 발굴해내는데 최선을 다했고, 허우샤오시엔(侯孝賢), 구로자와 기요시(くろさわきよし), 차이밍량(蔡明亮) 등 뿔뿔이 흩어진 아시아 거장들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내며 아시아 영화라는 '예술적 연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 출품작을 선정하기 위해 각국 아시아 담당 프로그래머들이 BIFF 기간 중 열리는 필름 마켓에서 본 영화들을 서구권에 소개한다고 하는데요. 앞으로 더더욱 좋은 아시아 영화들을 서구에 소개하여 척박한 환경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월드 프리미어(World Premier)
올해 BIFF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소녀 나타> / 출처 : BIFF 홈페이지
'핵심 브랜드를 얼마나 보유하느냐'가 기업의 큰 자랑이듯, 국제 영화제에서는 '세계에서 처음 선보이는 영화들이 몇 편인가'가 그 영화제의 힘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BIFF 1회 때는 고작 열 몇 편 남짓한 영화들이 월드 프리미어(전 세계에 처음으로 해당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는 작품을 뜻함)였던 데 비해, 19회 때는 132편의 영화가 BIFF에서 처음 공개됐습니다. 시작에 비해 작품의 수가 열 배 이상 증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세계 각국의 감독들이 BIFF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올해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어 화제를 뿌린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중국 작품 <소녀 나타>입니다. 이 영화는 두 소녀의 성장담을 담은 리샤오펑(李霄峰) 감독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이미 첫 상영 후 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다른 영화제에 미리 선 출품되기도 했다는데요. 아무 영화나 월드 프리미어로 초청하지 않는 까다로운 BIFF 프로그래머들의 안목이 BIFF의 유명세를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직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영화의 수가 칸 영화제만큼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BIFF의 모습을 볼 때 이 수는 갈수록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부 경쟁 부문이 있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BIFF는 모든 공식 상영작들이 비경쟁으로 출품되는 영화제입니다. 칸 영화제가 공식 초청작 모두를 경쟁 부문에 올린 후 일부 영화들을 비경쟁으로 초청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비경쟁 영화제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덜 받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일반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큰 영화제이기도 합니다. BIFF는 전세계에서 가장 일반 관객들의 참여가 높은 영화제입니다. 부산 시민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영화애호가들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BIFF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옵니다. 엄격한 제한을 통해 영화 관람을 통제하는 경쟁 영화제와는 다릅니다.
영화에 대한 반응도 각양각색이어서 생생한 관람 후기를 듣기 위해 일부러 BIFF를 찾는 감독과 배우들도 많습니다. 비경쟁 영화제임으로 투자자와 언론의 로비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부산영화제가 큰 굴곡 없이 시민들과 관객들의 애정으로 성장해온 배경에는 비경쟁을 통해 일반 관객들의 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는 이러한 점을 가장 큰 이유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Independant
작년 BIFF 화제작 <족구왕> / 출처 : 상상마당 시네마 배급부문
부산영화제는 <와이드 앵글> 섹션 등을 통해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단편 영화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상업적인 영화들이 아닌 작가주의 영화들을 소개하는 영화제의 성격 상, 척박한 투자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감독들의 독립 영화 또한 BIFF에서 자주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배급사를 찾지 못해 개봉을 못하는 한국영화들을 소개하여 한국 영화산업의 활기를 찾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 우문기 감독의 <족구왕> 등의 화제작들은 모두 BIFF에서의 스포트라이트로 빛을 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해도 한국 영화 가운데 <거짓말>, <거인>등의 작품 등이 미리 선보여 좋은 반응을 보였는데요, 균형 잡힌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BIFF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더 많아 보입니다.
19년의 역사를 단 몇 개의 단어를 통해 조명한다는 것이 무리긴 하지만, BIFF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위의 네 가지 키워드를 잘 기억해두셨다가 기회가 되시면 부산으로 찾아가셔서 영화에 바다에 풍덩 빠져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번외수입되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19회 BIFF 상영작 추천!
가) 임권택 감독의 <화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혁신적으로 영화를 찍는 청년"(평론가 정성일), 임권택 감독의 신작으로서 소설가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수작입니다. 매우 정교한 형식과 세트를 통해 중년 남성의 공황과 욕망을 진부하지 않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극 중 안성기는 화장품 기업 상무로 분하는데 이 영화의 회사 장면은 이니스프리에서 촬영했다는 점은 눈 여겨 볼 지점입니다.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
나) 누리 빌제 세일란의 <윈터 슬립>
언론의 극단적인 호불호가 갈린 영화임에도 올해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은 화제작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통찰을 자연과 아름다운 영상미로 표현한 이 작품은 3시간이 넘는 영화로 관객에게 인내를 요합니다. 일부 놀라운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가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하다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 하반기 개봉 예정.
다)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 로랑>
올해 상반기 개봉한 영화 <이브 생 로랑>이 생 로랑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였다면,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 로랑>은 마약과 유혹에 찌든 이브의 몇 년 간을 조명합니다. 화려한 미장센과 이야기 구성은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하지만 예술가의 유한한 삶을 영화를 통해 무한대로 확장함으로써 <생 로랑>은 예술적 경지에 이른 감독의 손길을 느끼게 합니다. 내년 상반기 개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