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강남의 탄생 – 강남(江南), 그 이상의 강남 - AMORE STORIES
#문성민 님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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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강남의 탄생 – 강남(江南), 그 이상의 강남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은 '우리 삶 속의 서울'이라는 주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도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역사, 경제, 사회, 사람들의 심리까지 모두 이해하며 알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 매력이 있습니다. 오늘 '서울, 도시의 삶'에서는 '강남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사실 강남의 탄생이라고 하니 재미있는 부동산 투자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와 달리 한국의 근현대사 이야기에 가깝다는 점 양지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강남(江南)은 한강 이남이라는 지리적 위치의 의미를 넘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강남 불패 신화', '강남 스타일', '강남 스캔들'이라는 다양한 수식어들이 붙은 것들이 그 방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강남은 어디일까요? 작게는 강남구, 넓게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를 강남3구라고 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 3구가 우리가 일컫는 강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더 넓게 정의할 경우,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25개구 중 한강 이남의 11개 구를 강남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1. 강남의 영동시장과 영등포의 강남고등학교

 1960년대만 해도 한강 이남 지역에서 개발된 공간은 영등포구만이 유일했습니다. 바로 현재의 1호선인 경인선과 경부선 기차가 한강철교를 건너서 지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인데요. 현재 잠원동, 서초동 일대를 지나 청계산을 넘어가는 지역은 습지이고, 청계산과 관악산을 넘을 만한 기술이 당시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영등포 일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현재의 강남 지역이 개발에서 후순위로 밀리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 당시 한강 이남 지역에서 영등포의 동쪽은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마치 미 서부 개척 시절에 미국인들이 서부를 바라보는 시선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강남이라는 영등포 동쪽 지역은 비어 있는 미지의 공간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현재에도 강남아파트, 강남중학교, 강남교회 등 강남이라는 단어가 붙은 시설들은 영등포구와 그 일대에 위치해 있고, 현재의 강남이라고 불리는 지역에는 영동시장, 영동대교, 영동일고등학교, 영동고등학교, 영동대로, 영동세브란스 병원 등이 즐비해 있습니다.

 1953년 서울 인구 100만 명에서 1965년 375만 명으로 인구가 급증하며 도시의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됩니다.1) 또한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지 십수 년 만이 지났을 뿐이었기 때문에 제2의 한국전쟁에 대한 안보 불안감이 굉장히 클 때였습니다. 또다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급격히 늘어난 서울 인구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 가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우려되는 안보이슈로 인해 정부는 두 가지의 아이디어를 해결책으로 내세웁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세종시 부근으로 상당 부분 남쪽으로의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안이고, 두 번째는 서울 중심에는 핵심 기능만을 남기고 나머지 주요 시설들을 한강 이남 지역으로 옮기는 안이었습니다. 정부는 텅 비어있던 현재의 강남지역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강이남지역 개발이라는 두 번째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이를 위해 당시 사대문 안의 면적 500만 평의 두 배 규모인 937만 평인 강남 부지를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하며 남서울 개발을 시작합니다.2)

1) 서울정책아카이브
2) '강남의 탄생', 한종수, 강희용

  • 강남항공사진(출처 : 두피디아)



2. 남서울개발과 그린벨트

 지금은 서울 시내에 한강 다리가 매우 많고 흔해졌습니다만 1969년까지는 한강 다리가 3개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세계본사 앞의 한강로를 지나 노량진 방면으로 가는 한강대교, 1호선 노량진역으로 가는 한강철교, 그리고 양화대교뿐이었습니다. 1969년에 현재의 한남대교라는 제3한강교와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시너지를 내며 남서울 개발(이하 '강남 개발')이 가속화됩니다. 1970년 당시 정부는 강남의 체비지3)를 매각해 경부고속도로 개발과 강남 개발에 사용하려 했습니다. 이 체비지는 강남 일대에 10만 평에 달했는데, 지금과는 너무나 다르게 투자 가치가 매우 낮아 정부의 여러 가지 특별 혜택에도 불구하고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해당 토지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주변 일대에 그린벨트를 지정합니다. 시장경제의 원리에서 공급을 감소시키니 재화의 희소성이 올라가고 이를 통해 재화의 가치가 올라가는 효과를 노린 것이지요. 지금의 위력적인 환경보호제도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린벨트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정부의 위와 같은 촉진으로 인해 제3한강교 착공 당시에 평당 200원에 불과했던 신사동 일대의 땅값은 1년 후 3,000원으로 무려 15배가 폭등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3) 체비지 : 도시개발사업을 환지 방식(사업 후 필지 정리를 통해 토지소유권을 재분배하는 방식)으로 시행하는 경우에는 시행자가 사업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거나 사업 계획에서 정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정한 토지를 정해 처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토지를 보류지(保留地)라고 한다. 이러한 보류지 중 공동 시설 설치 등을 위한 용지로 사용하기 위한 토지를 제외한 부분, 즉 시행자가 경비 충당 등을 위해 매각 처분할 수 있는 토지가 바로 체비지이다. (서울도시계획포털)


3. 근린주구와 8학군의 탄생

 1971년 논현동에 공무원아파트가 탄생합니다. (현재의 가로수길 남쪽 신동아아파트가 공무원아파트가 재건축된 아파트입니다.) 이 당시 이 지역만 해도 서울시청까지 한남대교를 건너 20분이면 도달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았지만 상업, 편의 시설의 부족으로 상당수가 다시 한강을 건너 강북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후 정부는 1978년부터 반포 주공아파트를 시작으로 1981년 개포지구 등 대규모 부지를 '아파트 지구'로 지정하며 강남 개발을 본격화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커뮤니티형 아파트 단지의 아이디어가 이 당시 구현되기 시작하는데요. 바로 '근린주구' 개념을 적용한 아파트 단지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출퇴근하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고, 쇼핑도 하고 모든 생활을 큰 거리인 간선도로를 건너지 않고 할 수 있게 한다는 개념이 바로 근린주구인데요. 이 근린주구는 클래런스 아서 페리라는 미국의 도시계획가가 주창한 개념이었습니다.4) 이 개념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가로 세로 각 600m의 큰 블록을 한 구획으로 적용하게 됩니다. 덕분에 강남이라는 도시는 강북의 최근 힙한 도시인 연남동, 연희동, 익선동 일대와는 다르게 커다란 블록 형태의 도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큰 구획으로 만들어진 도시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큰 도로를 건너지 않고 아파트 단지 일대에서 생활을 다 해결할 수 있으니 그 안에 있으면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런 구획 바깥을 걸어가면 그 도시는 골목골목이 이어져 무엇이 나타날지 기대하게 되는 재미가 떨어져서 걷기에는 재미없는 도시가 된다는 점이 특징일 것입니다. 유현준 박사5)는 강남의 테헤란로를 걷는 평균 시속은 6km, 강북의 명동 일대를 걷는 시속은 4km라고 했는데 이 차이는 바로 강남 개발시 이런 구획을 크게 만든 근린주구 신도시이기 때문에 생긴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강남 신도시 개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뜻 강남으로 이동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기반 시설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죠. 기반 시설 부족을 개선하기 위해 고속터미널을 이전하는 노력 등이 후에 나타났으나 가장 큰 변화는 8학군의 탄생 아닐까 합니다.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시행되고 1980년에는 거주지 중심의 학군 배정이 이뤄집니다. 이즈음에 경기고(76년), 휘문고(78년), 숙명여중/고(80년), 서울고(80년), 중동고(84년), 경기여고(88년) 등 강북의 명문고가 대거 강남 지역으로 이전합니다. 지금은 핵심 업무 지구, 쾌적한 주거 단지에 좋은 학군이라 평가받는 지역이지만 당시 이전한 학교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기반 시설이 매우 열악해 위생과 수업에 지장을 받아가며 공부해야 했다고 합니다. 완전학군제라는 근거리 학교 배정이 본격화되고 8학군의 서울대 진학률이 가장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 합쳐지자 강남 8학군에 배정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의 이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1981~85년 사이 서울 시민은 평균 30%가 이사를 다녔는데 이 사이 강남구의 이사 비율은 89%였다고 합니다. 또한 1980년대 중반 서울의 가구 증가율은 7.9%, 고교생 증가율은 1.2%인데 반해 강남 8학군의 가구 증가율은 23.4%, 고교생 증가율은 57.5%에 달했습니다. 바로 학군 배정을 위해 강남으로 이주하려는 압력이 증가했다는 분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4) 근린주구론, 클래런스 아서 페리
5)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 반포주공아파트(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4. 공유수면매립과 강북 잠실섬의 남하

 1962년 당시, 정부는 부족한 재정으로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어렵자 공유수면매립제도라는 것을 도입합니다. 공유수면매립이란, 하천 인근의 홍수가 빈번한 지역을 민간이 돈을 들여 매립해 제방을 만들어 간척사업하듯 땅을 만들면 그 땅을 해당 공사를 실시한 민간에게 주는 제도였습니다. 지금 한강은 둔치와 강변북로, 올림픽대로로 잘 정비되어 있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자주 범람했고 이로 인해 강변 일대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습니다. 1969년 현대건설은 저자도 인근의 공유수면매립권을 획득해 저자도라는 섬의 모래를 퍼다가 압구정 인근의 땅을 만듭니다. 저자도는 지금 옥수동과 압구정 사이에 있던 한강 위의 섬이었습니다. 이 저자도의 모래를 건설 비수기인 12월부터 4월까지 남는 중장비를 동원해 퍼다가 압구정에 제방을 만들고 후에 모레를 부어 땅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는 모래를 이용해 아파트를 지은 것이지요. 그렇게 탄생하게 된 아파트가 바로 압구정 현대아파트입니다. 이 시기 이전에는 와우시민아파트(와우산 위치), 금화시민아파트(금화산 위치) 등 지역 이름이 붙은 아파트 이름이 일반적이었는데, 압구정 현대아파트 이후 건설 회사 이름이 붙은 아파트가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의 아파트 브랜드 등이 이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공유수면매립과 비슷한 사례로 만들어진 곳이 잠실입니다. 잠실은 부리도와 잠실섬이라는 두 개 섬으로 이뤄진 곳이었습니다. 이 두 섬은 현재의 광진구와 송파구 사이에 있었는데요. 1925년 이전만 하더라도 잠실은 강북 쪽으로 더 가까운 동네였습니다만 을축년 대홍수(1925년) 이후 상당수의 흙과 모래가 쓸려 내려가면서 섬이 강남 쪽으로 상당히 붙게 되었습니다. 이후 1971년 잠실 물막이 공사를 통해 잠실섬과 송파 사이를 흐르던 송파강을 완전히 막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는 공간은 현재의 석촌호수가 되었습니다. 간혹 싱크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 지역이 과거 강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토지의 특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공유수면매립제도는 압구정이라는 땅을 넓게 만들었고 잠실이라는 섬을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기는 효과를 초래하며 강남의 확대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잠실섬.부리도(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 저자도(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5. 서울의 강남, 강남의 서울

 1960년대 서울 집중으로 생긴 도시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남을 탄생시켰으나 이제는 강남과 경부축은 청출어람처럼 서울을 이끄는 지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남서울 개발로 탄생한 강남3구(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지역 옆은 강남4구라는 이름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연결성이 강하며, 강남과의 접근성이 좋은 경부축, 신분당선, 2호선, 3호선, 7호선, 9호선은 서울과 서울 세력권 지역의 거주민들의 선호 주거 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도시라는 것은 1화에서 말했듯 시멘트로 만들어진 객체가 아닌 그 안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연결성을 만들어내고 이를 토대로 혁신하고 발전하는 생물체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50년 전 강남이라는 도시를 인위적으로 만들었지만 이곳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도시를 구성했고 교육과 산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도시를 기획하고 만들더라도 그 안에 사람이 채워지고 활동해야 도시가 번성하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 강남전경(출처 : 한겨레신문)

 강남 지역의 거주자나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강남은 이미 경제 규모, 일자리, 문화 등에 있어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도시 생성 관점, 문화 콘텐츠 관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도시가 되었지요. 이상 '강남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도시는 과연 反환경적일까?'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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