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의 우연이 30년의 운명이 되기까지
용산우체국 건너편, 세월의 정취가 묻어 있는 파란색 간판이 눈에 띈다. 1985년부터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신용산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는 ‘보림한의원’ 이영성 원장님을 아모레 스토리가 만났다.
‘보림한의원’ 앞에서 이영성 원장님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
한의사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 한의사를 꿈꾸셨나요?
제가 고등학교 때 세계적으로 한방 붐이 일었어요.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로 화해의 움직임을 보이던 시기였죠. 그때 닉슨 대통령이 중국에 방문했는데 중국이 자국의 자랑인 한의학을 소개했어요.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고 침술로 마취를 시연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중계되었죠. 서양을 비롯한 전 세계가 깜짝 놀랐어요. 그때부터 다른 나라에서도 한의학에 주목하게 되었죠. 저도 원래는 의학계열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의대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의사와 같은 길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길이더라고요.
한의대에 입학해서는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어요. 대학 교재가 전부 한문으로 된 원서였거든요. 한문을 배우고 자란 세대긴 하지만 중국의 원전을 읽는 건 또 다른 얘기잖아요. 또 한의학은 학문 자체가 모호한 면이 있어요. 흔히 서양 의학은 손바닥, 한의학은 손등이라고 얘기해요. 손바닥에는 손금이 있어서 따라가다 보면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손등에는 손금이 없어서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요. 명확한 지침을 따라가기보다는 총체적으로 보고 유연하게 방법을 찾아야 하는 학문인 거죠. 생각한 것과 달라서 초반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적응을 하고 나니 나름대로의 매력과 재미가 있었어요. 제 성격이나 가치관과도 잘 맞았고요. 주변에서도 ‘넌 한의사 하길 잘했다’는 말을 많이 해요. 졸업 후엔 3년 간 수련의 생활을 하며 많은 케이스를 접했어요.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어주고 있죠.
‘3개월만 있으려고 했는데...’ 우연이 만든 운명
수련의 생활 마치고는 개업을 준비하셨나요?
바로 개업을 준비했어요. 양재에 한의원 자리를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부동산에서 빈 상가가 없다고 두 달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연락을 기다리던 중에 지도 교수님께 연락이 왔어요. 두세 달만 봐주면 되는 곳이 있다고, 시간이 맞으면 가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마침 시간이 비는 시기였으니 부담 없이 갔죠. 그렇게 온 곳이 보림한의원이에요.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평생 여기 있게 됐네요.
보림한의원을 개업하신 게 아니군요.
원래 계시던 원장님 건강이 안 좋아지시며 혼자 진료를 보기 힘들어져서 제가 잠깐 도우러 온 거죠. 3개월 정도 일하기로 했는데, 도중에 원장님이 돌아가셨어요. 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개업 준비를 하려고 했죠. 그런데 원장님 아내분이 한의원을 그냥 인수하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개업을 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들도 많고, 또 원래 오시던 환자들이 있으니까 시작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러겠다고 했죠.
처음 한의원을 맡고 어땠나요?
기존 환자들이 있어서 괜찮겠다 싶었는데, 막상 제가 맡고 나서는 환자들 발길이 뚝 끊기는 거예요. 원래 계시던 원장님에게 진료를 받으러 왔다가 저만 있으니까 그냥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았고요. 당시 이 주변에만 한의원이 여섯 개였거든요. 대안이 많으니까 환자가 더 없었죠. 한 1년 동안은 환자가 거의 없었어요. 원래는 건물 2층까지 한의원으로 사용했는데, 병원이 잘 안되니까 몇 달 만에 2층은 폐쇄했어요. 불안하기도 하고, 자리를 옮겨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어요. 그때 제가 20대 후반이라 꽤 젊은 나이였거든요. 결혼도 안 했고 책임질 가정이 있는 상황이 아니니 조금 더 버텨보기로 한 거죠. 다행히 손님이 한두 명씩 늘기 시작했고 상황이 점점 나아졌어요.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보림한의원 내외부
당시 용산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제가 여기 처음 온 게 85년도예요. 80년대 중반의 용산은 상업적으로 굉장히 활발한 곳이었어요. 청과물 시장이 크게 있었고, 시골에서 물건을 싣고 와서 하루 묵고 가는 사람들 덕에 여관도 많았죠. 그 청과물 시장이 이전해서 지금의 가락시장이 됐고요. 서울 시청부터 영등포,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심에 있고 기차역도 있어서 교통의 요지였죠. 그에 반해 동네 자체는 시골 동네 같은 느낌이었어요. 낙후했지만 정감 있었죠. 마을 사람들끼리도 다 아는 사이라, 거리에서 서로 인사를 하는 풍경이 있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지역을 떠난 분들도 있어서 그때를 생각하면 그립기도 하고 많이 아쉬워요.
당시에는 ‘태평양’이 있었죠?
노란색 10층 정도의 건물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태평양 제약은 더 나중에 생겼던 것 같고요. 맨 아래층에 한일은행이 있었는데, 저는 그 은행을 자주 이용했죠. 이 주변에서 가장 큰 회사여서 저희 환자 중에서도 태평양 직원들이 많았어요.
보림한의원의 주 고객층은?
60세 이상의 노년층이 많이 오세요. 비교적 한방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편이고, 나이가 들수록 근골격계 질환이 많아지니까요. 젊은 분들은 직장생활하면서 어깨나 허리가 아프거나, 운동하다가 뼈에 무리가 생기면 찾아오시는 편이에요. 80~90% 정도는 단골인데, 새로 오는 분들도 단골 환자의 소개를 받아서 오기 때문에 거의 단골이라고 봐야죠.
거의 단골이라니 놀랍네요. 보림한의원만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제가 내과 전문의라 내과 질환으로 오시는 분들을 보면 반갑긴 하죠. 하지만 근골격계, 소화기, 심혈관계, 부인과 등 전체적으로 다 진찰합니다.
병원 후기에 ‘원장님이 친절하다’는 글이 많던데요,
특별히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다른 업과 다르게, 의사는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잖아요. 아파서 왔는데 의사가 불친절하게 대하면 환자는 쉽게 상처받아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여려져서 의사의 한마디 한마디에 예민해지거든요.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항상 친절하게 하자고 얘기해요. 최대한 편안하게 진료하고, 아픈 부분들을 감싸주려고 하죠. 특별한 비결은 없지만, 항상 그걸 염두에 두고 노력하고 있어요.
홍보를 많이 안 하시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으신지?
보통 하루에 30명 정도 진료를 보러 오시는데, 그게 저에게는 적당한 수준인 것 같아요. 환자가 더 많이 온다고 해서 제가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욕심이 있었다면 평생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웃음). 젊을 때부터 더 규모 있게 했겠죠. 그러면 돈은 훨씬 더 많이 벌었겠지만 그 정도의 욕심은 없었어요. 그저 처음보다 상황이 점점 좋아지는 것에 만족했죠.
“이건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3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한의원을 운영해오셨는데,
어떤 원동력이 있었나요?
가장 큰 원동력은 건강이에요. 의사가 건강하지 않으면 환자를 제대로 진료할 수 없어요. 맥 하나를 볼 때도, 몸이 불편하면 정성 들여 맥을 볼 수 있을까요? 힘들면 모든 게 귀찮아지기 마련이에요. 세심하고 꼼꼼하게 진료를 할 수 없죠. 그래서 의사 본인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워낙 건강한 체질이기도 하지만, 건강을 위해 많이 걸으려고 노력해요. 매일 저녁 먹고 30분~1시간 정도를 걷죠.
또 하나의 원동력은 ‘약속’이에요. 영업시간에는 진료를 한다는 약속이요. 그건 환자들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죠. 30년 넘게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여름휴가, 명절, 법정 공휴일 외에는 쉰 적이 없어요. 몸살로 조퇴한 것도 30년 동안 두 번 정도고요. 근태에 있어서는 굉장히 성실하게 임했다고 생각해요. 환자가 ‘지금 가면 진료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병원에 왔는데 문이 닫혀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죠. 영업시간에는 늘 병원 문을 열어두겠다는 ‘약속’이 원동력이 되었어요.
30년 넘게 일을 하며 슬럼프는 없었나요?
특별히 슬럼프는 없었어요. ‘이게 내 일이다’,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침에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도 거의 해본 적 없어요. 너무 피곤하면 ‘오늘 하루는 쉬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할 때도 있지만, 아까 말씀드렸듯, 이건 환자들뿐 아니라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꼭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죠.
일을 하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마 의사라면 대부분 똑같은 대답을 할 거예요. 환자가 잘 치료돼서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제일 행복해요. 20년 동안 원인을 모르는 편두통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있는데,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두통이 잡히지 않으셨대요. 우리 한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어혈로 진단되어 약을 먹으면서 증상이 사라졌어요. 두통이 사라졌다고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뿌듯했죠. 그게 한방의 자랑이에요. 진통제를 먹어서 증상을 모면하는 게 아니라, 근원적인 원인을 찾고 원인에 대한 치료를 하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나 만성질환이 있는 분들도 오시면 좋겠네요.
한 번쯤은 한방 진찰을 받아보는 것도 좋죠. 한의학의 치료약은 2천 년 동안 누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발전된 것들이라, 상당히 강점이 많아요. 그런 점을 많이 알아주셨으면 해요.
진료 중인 이영성 원장님
반대로 가장 힘든 점은 어떤 점인가요?
한의사에 대한 편견이나 비하를 접할 때 가장 마음이 아파요. 저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진 않지만, 인터넷에서 ‘무당이다’, ‘사이비다’라고 말하는 글들을 자주 보거든요. 한의학에 대한 오해로 인해 점점 불신이 높아지는 현실이 안타깝죠. 그 외에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크게 힘든 점은 없어요. 누구나 아프면 예민해지는 게 당연하니까 가끔 상처를 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에요.
아무리 일이 힘들 때도 꼭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다면?
환자에게 진솔하게 대하는 마음이요. 진정성은 상대에게 그대로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이 의사는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구나’라는 마음을 환자가 느끼면 그때부터 유대감이 생기죠.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이제는 옛날 같지 않아서 많이는 못 하지만 최신 소견에 대한 논문을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나이 들었다고 해서 뒤처지면 안 되니까요. 너무 ‘구닥다리’가 되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꾸준히 하고 있어요. 기억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계속하려고 해요.
한의사한테 꼭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의사는 무엇보다 꼼꼼해야 돼요. 의사가 너무 털털하거나 덤벙대면 놓치는 게 많겠죠. 환자의 모든 면을 유심히 봐야 하기 때문에 세심함과 꼼꼼함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잠깐, 건강을 챙기는 시간
목과 허리가 아픈 직원들을 위한 팁이 있다면?
컴퓨터를 오래 하다 보면 목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가면서 일자목이나 거북목이 되기 쉬워요. 일하다가 중간중간 10초 정도 목을 뒤로 최대한 꺾어서 하늘을 보는 동작을 해주면 좋아요. 모니터를 올려다보면 목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모니터 화면은 15도 정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것이 좋고요. 너무 고개를 푹 숙이지 않을 정도로요. 모니터 위치를 조정할 수 없으면 의자를 높게 조정해서 화면을 살짝 내려보는 것이 좋죠.
날씨가 많이 더워졌는데, 더위를 이겨낼 팁이 있을까요?
더위에 좋은 음식으로 가장 대표적인 게 오미자예요. 오미자를 잘 씻어서 냉수에 하루 정도 담갔다가 꿀을 조금 넣어서 마시면 돼요. 끓이지도 않아도 되고 물에 담가두기만 하면 되니 간편하죠. 실제로 더위로 인한 갈증, 원기부족으로 아픈 분들이 오면 한의원에서 해주는 처방이 ‘생맥산’인데, 생맥산의 재료가 오미자, 인삼, 맥문동이에요. 셋 중 오미자가 주재료죠. 인삼과 맥문동은 기운을 돋우는 것을 도울 뿐이지, 갈증을 없애고 더위를 해소시키는 것은 오미자예요. 굳이 보약 먹지 않아도 오미자 하나면 건강하게 여름을 나기에 충분할 거예요.
번아웃이나 스트레스,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요즘 그 질문을 참 많이 받아요. 마음이 힘든 분들이 많은 가봐요. 우울감이나 번아웃이 느껴지면 되도록 혼자 있지 않는 게 좋아요. 옆에 누구든 함께 있는 게 좋죠. 운동을 해서 땀을 내는 것도 우울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고요. 그런데 우울함이 느껴지면 사람도 잘 안 만나려고 하고 활동하는 것도 귀찮아지니까 그게 어려운 문제죠. 가족이나 직장 동료,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옆에 있어 주는 것이 가장 좋아요.
인생은 조금 손해보며 사는 편이 낫다
기억에 남는 아모레퍼시픽 직원이 있나요?
태평양 시절에는 개인적으로 ‘형, 동생’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낸 분도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아모레퍼시픽 직원분들은 목에 건 사원증을 보고 아는 경우가 많아요. 대부분 깔끔한 이미지더라고요. 오셔서 알은척해주시면 반가울 것 같아요.
원장님에게 아모레퍼시픽은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겐 ‘이정표’예요. 한의원 처음 오시는 분에게 길을 설명할 때 대부분 헤매시거든요. 아모레퍼시픽 건물 쪽으로 오라고 하면 쉽게 찾아오세요. 신용산에서는 그 정도의 존재감이 있죠. 든든한 이정표예요(웃음). 또 저는 아모레가 변모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지켜봐왔잖아요. 태평양 시절의 구사옥부터 지금 아모레퍼시픽 신사옥까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일종의 자극이 된 것 같아요. ‘나는 너무 멈춰 있는 게 아닌가’ 하며 되돌아보기도 하고요. 좋은 자극제죠.
70세까지 살아보시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어느덧 칠십이 됐는데, 살아 보니 인생은 ‘내가 조금 양보한다’는 마음으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매사에 너무 손해 안 보려고 애쓰는 것도 좋지 않더라고요. 그 자체가 스트레스거든요. ‘내가 조금 손해 보고 말지’ 하는 마음으로 살면 여러모로 편해지죠. 제가 생각하는 행복은 욕심내지 않는 거예요. 욕심내지 않는 사람은 조그만 곳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어요. 큰 행복을 좇지 않고 사사로운 것에서 행복을 찾으면 행복은 늘상 그곳에 있어요.
10년 후에 내 모습을 그려본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신용산에서 한의원을 계속 하고 싶어요.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똑같이 이 자리에 앉아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으면 좋겠어요.
보림한의원에서 이영성 원장님
epilogue
3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환자들을 진료한 이영성 원장님. 그 성실함과 우직함이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신용산과 맺은 특별한 인연이 부디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다.
한강대로 100은 아모레퍼시픽 주변 사장님들의 인터뷰를 전합니다.
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위기를 타개한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에디터 신혜원(책식주의)
사진 디자인몽
기획 총괄 아모레퍼시픽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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